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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4일 목요일 [(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욥은 그의 구원자가 살아 계심을 알고 있다며, 기어이 뵙고자 하는 그분을 보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게 하신다(복음).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 19,21-27 욥이 말하였다. 21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2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내 살덩이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인가?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갈라 6,14-18)와 복음(마태 11,25-30)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는 유산을 버리고 집을 떠나 보잘것없고 가난하게 되었지만, 주님이 그를 들어 올리셨네.” 성인은 임종할 때에도 잿더미로 돌아갈 인간의 삶을 기억하였습니다.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가난과 고난을 본받으려 하였습니다. 성인은 그리스도께서 배척받고 모욕받으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강조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많은 제자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세상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배려를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배척받는 일이 될 것인지 미리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상에서 살아야 할 기준과 방향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평생 실천하며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한 분이 바로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성인은 탁발 생활을 하면서 어떤 집에 들어가거나 만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빌어 주었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선행은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따르는 행위에서 옵니다. 오늘 우리는 성인에게 전구를 청하면서 그 길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위대하고 빛나는 자기 극복과 해방의 여정 가톨릭 성인(聖人)이면서도 타종교 신자들뿐 아니라, 무신론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이야 말로 성인 중의 성인, 참 성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그렇고, 또 한 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가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개척한 성화의 길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는 복음서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여러 면모 가운데, 머리 두실 곳 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예수님, 그래서 그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으셨던 대자유 그 자체, 예수님을 흠모하고 추구했습니다.
인간적 나약함과 유한성을 딛고, 그 위에 펼쳐진 자기 극복과 자기 해방과 자기 이탈을 위한 프란치스코의 하루 하루 여행길은 참으로 위대하고 빛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의 성화(聖化) 여정을 바라볼 때 마다 큰 감탄과 함께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발밑을 내려다보며 큰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 자신으로부터 한번 이탈해보겠노라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보겠노라고, 갖은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보겠노라고, 발버둥쳐왔지만 아직도 제 자리 걸음입니다. 초심자 시절 지니고 있었던 악습을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 때 당시 일상적으로 짓던 죄를 아직도 같은 방식으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탈, 자유, 해방...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프란치스코의 삶이 대단해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한올 한올 얽히고 꼬인 실타래 풀듯이 인내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의 문제나 약점들을 극복해나갔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을 머릿 속이나 마음 속에만 간직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행해나갔습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대 성인 프란치스코에게도 젊은 시절의 흑역사(黑歷史)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지 아십니까? 사실 그의 본래 이름은 죠반니 베르나도네(Giovanni Bernadone)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자수성가한 포목상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부자 아버지 덕분에 호화판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시 남자 청년들의 로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옆나라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청년 문화 중에 하나였습니다. 멋진 기사(騎士)가 되고, 잘 생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아름다운 여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리던 여인을 찾게 되면, 미리 준비해둔 낭만 가득한 음유시를 한편 멋드러지게 읊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프란치스코 역시 프랑스 음유 시인들의 서정시를 열심히 읽고 외웠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프랑스 패션으로 온몸을 치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바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어린 프랑스인’이라는 뜻입니다.
한때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 이웃 사랑의 실천이나 청빈의 덕과는 철저하게도 담을 쌓고 살아왔던 프란치스코, 잔뜩 겉멋만 들어 유행의 최첨단을 걷고 있던 그가, 적당한 회개가 아니라 180도 완전 회개해서, 몇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 만인들로부터 존경과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의 신앙 여정, 회개 여정, 하느님을 찾아갔던 순례 여정은,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으며 ‘이 나이에 회개는 무슨 회개?’라고 외치는 우리, ‘나 좀 그냥 내버려둬!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라고 자포자기하는 우리를 향해 프란치스코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도 가능합니다!’라고 온 몸으로 외치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가 극단적 청빈을 모토로 내세우면서 당신 스스로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처절하리만치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는 우울한 금욕주의자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이 우리의 가난과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는 더없이 환하고 행복한 얼굴로 가난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은 반면 그는 무소유의 삶 속에 진정한 행복, 대자유의 삶을 찾았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하느님 특사의 품격>
헨리 나우엔 신부는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1985년 초에 불란서에 있었던 정신지체아들을 돌보는 라르쉬라는 공동체에 한 지도자가 예일대학으로 헨리 나우엔을 방문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그 공동체의 지도자로부터 처음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세계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또 정신지체아들을 섬기면서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날은 그들이 사는 얘길 감동적으로 듣고 그냥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 공동체의 지도자로 있었던 장 바니에 신부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자기의 공동체에서 정신지체아들의 피정이 열리는데 거기에 왔으면 좋겠다.”는 글이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처음에 자신을 강사로 초청한 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가보았더니 “우리 피정은 침묵 피정입니다. 이 피정은 사흘 동안 열리는데 기도만 하고 행동으로만 사람들을 돌봐주고 섬기는 피정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특이한 피정을 참석하면서 헨리 나우엔 신부는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 소리 안 하고 정신지체아들을 돌봐주고 발도 씻어주고 밥도 해주고 같이 식사하고, 그들을 쳐다보면서 그는 처음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침묵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또 한 장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신부님이 함께 있어서 축복이었습니다. 신부님이 우리 같은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주신다면 얼마나 커다란 하느님의 선물일까요.”
그 당시 헨리 나우엔 신부는 예일대학에서 하버드대학 교수로 이제 막 옮겨 한참 할 일이 많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얼마든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는데, 그 편지 한 장이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하버드대학을 떠나서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로 부르신다.’
그의 마음에 자꾸 그런 부르심이 느껴져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그는 매우 갈등했지만 주님의 강렬한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1985년 가을에 캐나다의 토론토 근처에 ‘데이브레이크 커뮤니티’(Day Break Community)라는 정신지체아를 위해 새로 생긴 공동체의 지도자로 떠납니다. 그 곳에는 단 6명의 정신지체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 6명과 함께 살기 위해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상하다. 이것은 희생이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뒤엎는 나의 새로운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웬일인가! 이상한 마음의 평안이… 이 놀라운 평안이여, 자유여, 자유여.’
[‘주님의 강렬한 부르심: 소명편’, 한태완 목사 예화 모음]
예수님은 오늘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세상 속으로 가는 제자들을 향해 당부하고 싶으셨던 것은 “조심하라!”는 것일 겁니다. 절대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일 것이라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이 제자들에게 호의적이라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며 이리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예수님께서 먼저 당부하시는 것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유해지면 아무래도 세상 유혹에 빠지기 쉬워집니다. 또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세상 애정이나 애착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치 그들의 호의를 얻으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항상 ‘갑’의 위치를 유지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교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나누어주려 하는지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약 임금이 주려는 보물들을 나누어주러 가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굽실거리고 세상 것이나 사람에게 애착을 느껴 휘둘린다면 임금이 준 특권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됩니다. 하물며 임금 중의 임금이신 하느님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받아 세상에 파견된 자라면 그것에 합당한 품격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시며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그 집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 집은 그것으로 이미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발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버리고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것은 말하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말씀을 정리해보자면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재물이나 먹고 마시는 것이나 애정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되면 결국 그들에게 잡아먹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특사는 특사로서의 품위를 지켜야합니다. 맹수는 약해 보이는 것부터 잡아먹습니다. 헨리 나우엔 신부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세상 명예를 쓰레기처럼 버렸습니다. 이것이 파견된 자의 품격입니다. 이 품격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가치를 증명해줍니다. 세상 가치들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휘둘려서는 복음전파자의 품격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리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신 하느님 은총의 분배자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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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Francis)
신분 : 부제, 설립자
활동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연도 : 1181/1182?-1226년
같은이름 :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done)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부친이 출타 중인 틈을 이용하여 어머니가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1202년에 투옥되었다.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딴사람이 되었다.
그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내 교회를 고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옛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는 버려진 옛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서 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고,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가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3년 후인 1210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가 극도의 가난을 살려는 그와 11명의 동료들을 인정하였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본부는 오늘날 아시시 교외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하였고 교계 진출 또한 사양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1212년에 그는 성녀 클라라(Clara)와 함께 ‘가난한 부인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때 그는 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레크 알 카멜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결국 사라센 선교가 실패로 끝난 줄 알고 성지를 방문한 뒤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England)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우고리노(Ugolino) 추기경의 도움으로 규칙을 확정짓고 승인을 받았다.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면서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어 갔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서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병세가 깊어지자 성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미리 유서를 작성하고 자신의 죽음의 다가온 것을 알자 그는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2년 후인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가 그를 기념하여 지은 프란치스코 대성전의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도처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를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시시의 가난뱅이 프란치스코 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