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 괴팍한 엄마의 일상」이라는 글에서 보았습니다.
혜운이라는 필명을 가진 분의 브런치 스토리입니다.
《엄마 아빠의 말을 왜 잘 들어야하는지 어른들의 말을 왜 잘 들어야 하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그게 왜 착한 어린이지? 왜 착해야 하지?
그저 말을 할지 몰라서, 말 주변도 없고 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동네 어르신이나 조부모 모두.
하지만 이 사회에서 자주 쓰는 말이라고 할지언정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 번 숙고해봐야 하지 않나?
착하다는 말로 잘 포장한다고 해서 부드러운 표현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 나이 많은 어른이 나이 어린 아이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착하다는 평가에 구속되어 자기 욕구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해보지도 못하고 자기 스스로 옥죄며 사는 성인(成人?)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화를 내야하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 눈치나 보고 비위나 맞추고 있으니 속으로 얼마나 부대낄까
그 사람이 또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면 본인이 들어왔던 말 그대로 아이를 짓누르려 할 것이다. 그르면 상명하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권력남용, 내 아이에게도 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행동의 목적과 이유를 분명히 설명하면서 아이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부모가 할 일이다.
사회와 부모가 바라는 모습의 아이가 되도록 회유하는 것은 아이의 자율성과 특성을 죽이는 일이다.》
참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교직에서 35년간 재직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운 부모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육이 모든 가정에서 행해진다면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얼마 전 ‘착한 어린이’ 온라인 영상이 화제였다.
일고여덟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얼른 뛰어 길을 건넌다. 맞은편으로 건너간 아이는 뒤로 돌더니 배에 두 손을 올리고 90도 가까이 허리 굽혀 인사한다. 차를 세워 길을 건너게 해준 운전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것이다. “누구 집 아이인지 잘 컸다” 같은 댓글이 달렸다. 그런데 아이는 서른 되고 마흔 되고 쉰 살 되어서도 ‘착한 심성’을 지킬 수 있을까.
최근 식사를 함께 한 정부 관료 A는 부하 직원 얘기를 하다가 “나는 착한 게 싫다”고 했다. 일 못하는 직원이 주로 착하다고 했다. 착함과 능력은 카테고리(범주)가 다른데도 ‘착함=무능’이라는 범주 오류를 확고히 믿고 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신화(神話)다. 사소하고 궂은 일은 떠넘기고 주목받는 일 좇으며 성과 내는 게 능력이다. 아랫사람 윽박지르고 핍박해서 퍼포먼스 보이는 게 능력이다. 남들이 기피하는 일, 돋보이지 않는 일 묵묵히 하는 이들이 무능한 것이다.
건전한 시민의 덕성이 무능과 동일시되는 시대다. 이번 총선에서도 드러났다. 욕설과 막말과 범법이 능력이다. 대학생 딸에게 11억 대출받게 해 강남 아파트 사는 게 능력이다. 잘못 인정한다면서도 “너나 깨끗해라” 조롱하는 게 능력이다.
표창장 위조해 딸 의전원 보내는 게 능력이다. 범죄 혐의에도 정치에 나서 제3당 만드는 게 능력이다. 자식 위한 일에 그깟 사소한 범법이 무슨 잘못이냐 여기는 게 능력이다. 공직도 마찬가지다. 선관위 경력직에 자식 꽂아넣는 게 능력이다. 위조문서 만들 여건이 되지 못한 이들, 할 수 있어도 차마 하지 못한 이들이야말로 무능한 것이다.
물론 평범한 시민인 필부(匹夫)의 도덕과 나라 구해야 할 정치인·공직자의 도덕은 때로 다를 수 있다. 2300년 전 맹자는 ‘형수의 비유’로 이 차이를 간명하게 설명했다.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을 잡아서만 아니라 머리채를 당겨서라도 끌어올려야 한다.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야 할 때 사소한 도덕에 얽매여선 안 된다. 그러나 이 말이 평소 형수한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착각하는 이가 적지 않다. 입으로는 정의(正義)를 외치면서 시민의 도덕은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임진왜란 발발 전인 450년 전 사회에도 이런 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이 일갈했다. “요즘 배웠다는 사람들은 손으로는 물 뿌리고 비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며 이름을 도둑질하고 남을 속인다.”
왜 비질하기 전 물을 뿌리는가. 먼지를 최소화해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는 ‘착한 마음’이다.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큰 배움)’을 배우기 앞서 아이들 배우는 ‘소학(小學·작은 배움)’에 나오는 내용이다. 작은 배움도 모르면서 큰 배움을 안다고 하는 이들이 지금도 목소리를 높인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희생과 존중 같은 가치가 조롱받는 사회는 건강하지도 않고 어느 수준 이상으로 발전할 수도 없다. 스타플레이어가 제 몫 다 하고, 돋보이지 않더라도 팀원들이 제자리에서 서로 존중하며 단단한 팀워크를 짤 때 ‘수퍼 A급’ 팀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욕설·막말·범법하는 이들이 스타가 되는 팀은 잠깐 반짝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모두(冒頭)의 횡단보도 아이를 생각한다. 아이는 서른·마흔·쉰 살 되어도 착한 심성을 지켜갈 수 있을까. 건전한 시민의 덕성이 무능과 동일시되는 시대에 상처받거나 조롱당하지 않고 세상을 온전히 건너갈 수 있을까. 눈물이 난다.>조선일보. 이한수 문화부장
출처 : 조선일보. 오피니언 태평로, 건전하면 무능하다? 착함을 조롱하는 사회
“착하다”의 우리말 사전의 뜻은 ‘곱고 어질다’입니다.
영어로는 ‘① good ② nice ③ sweet ④ kind’의 뜻을 가지고 있는 걸로 나와 있습니다.
한자 善 : 착할 선은 ‘① 착하다 ② 좋다 ③ 훌륭하다 ④ 잘하다 ⑤ 옳게 여기다’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옛 중국인은 양을 온순하고 착하며 주인에게 무조건 순종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이 주인을 따르는 것처럼 사람도 하늘에 순복하고 사람의 마땅한 도리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모든 사람이 양의 정신을 본받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래서 '善'에선 '대단히 좋다'의 의미가 파생되었다”[유문호廖文豪의 한자수漢字樹].
‘상담자 혜운’이라는 분은
“양보, 배려라는 말끝에 항상 ‘착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웃기는 소리다. 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 양보하고 배려하는 게 아니라 같이 잘 어울리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그 의미와 자유를 퇴색시킨다. 반발심이 큰 나는 ‘착하다’는 말을 극도로 싫어한다. 내 아이에게 절대 쓰지 않는 말 중 하나이다”라고 합니다.
혹 제가 난독증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데 '착하다'는 말이 이런 뜻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에 많이 놀랐습니다. 티비에 나오는 오 아무개 박사보다 훨씬 놀라운 상담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러니 착한 사람이 조롱받고, 착한 어린이가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나 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