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正見] (189) 변증법의 '합(合)
'깨어남에서 말하는 '중도'
헤겔의 변증법(Dialectics)은 결국 양쪽을 모두 다 수용하는 입장(합,Synthesis)을 취하게 된다. /셔터스톡
삶이란 현상은 꿈처럼 홀연히 일어났고 나는 그 속에 홀로 있습니다. 나란 현상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나는 이 삶속에서 있다 없다합니다. 내가 분명히 이 삶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 같기는 한데 생각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나 자신을 챙기지 않는 한 일상 중에도 나는 자주 사라져 없기 일쑤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무언가에 몰입하거나 숙면 중에는 나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가 나를 자각하거나 느낄 땐 반드시 생각과 느낌이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禪)에선 나란 생각(想),느낌(受)의 결함에 불과한 환영 같아서 본질이 허깨비처럼 공(空)하므로 있다거나 없다고만 단정해선 안 된다고 합니다.
즉 내가 있다는 것은 내가 그렇게 생각으로 굳게 믿을 뿐이란 말입니다. 이는 생각이 아직 없는 갓난아기나 치매노인에겐 자기 정체성이 아예 사라져 없는 것을 볼 때에도 쉽게 증명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나란 것은 아예 없기만 한 걸까요? 사실 누구나 나란 생각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불교에선 진실에 깨어나려면 이렇게 생각으로 있다거나 없다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라고 합니다. 즉 색즉시공에만 치우치지도 말고 반대로 공즉시색에도 치우치지 말란 것이지요. 이걸 이것과 저것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거나 떨어지지 않는다하여 중도(中道)라고도 합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이라고 설명되는데 처음엔 어떤 명제(내가 있다)를 있다고 하며 살다가(정), 통찰정견해보니 이게 항상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 명제의 반대되는 쪽(내가 없다)에 갑니다(반). 하지만 그 역시 항상 그런 것은 아니므로 결국은 반대되는 양쪽을 모두 다 수용하는 입장(합)을 취하게 됩니다.
즉 깨어남이 말하는 중도(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란 변증법의 합입니다. 삶 속에선 이것과 그 반대되는 저것이 항상 같이 공존하며 나타납니다. 우린 때론 이것을 따라가다가 뭔가를 체험하곤 또 반대되는 저것을 따릅니다. 하지만 그런 방황을 통해 도달하는 것은 결국 애매모호한 [알 수 없음]입니다.
영적 깨어남이란 생각으로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다]는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것과 저것이 모두 내가 분별해서 생겨난 하나의 생각이거나 감정, 느낌들이란 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이것과 저것도 본래 그렇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분별함으로서 그렇게 창조, 인식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으려면 모든 이것과 저것의 본래적 속성을 정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모든 내 생각들은 다 내가 그렇다고 인식 분별함으로서 그렇게 환영처럼 내 의식 안에 창조되어 머무르고 있을 뿐이며, 이 진실에 깨어날 때 모든 걸 스스로 창조하는 본래의 부처를 볼 수 있습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