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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마경훈목사 - YouTube
성경에 보면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본문의 명령입니다. 본문에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이 세 가지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항상 기뻐하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항~상 무슨 일이 있어도 기뻐하는 사람이요. 여러분 중에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잠시도 쉬지 않고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사는 분이요. 없을 것 같네요. 그럼 여러분 중에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좋은 일은 물론이고 힘든 일, 억울한 일,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감사하는 사람이요. 이 중 하나도 불가능한데 이 세 가지를 다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 중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까요? 답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말씀을 왜 성경에 기록하였을까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기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할 수 있든 행할 수 없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행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항상 기뻐하라(16절).
세상의 기쁨은 성취와 소유로 인한 기쁨인데 반해서 주님 안에서의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내적인 기쁨입니다. 성취와 소유는 잠시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 같지만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중국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난 다음에 밤새도록 양자강에 배를 띄워 놓고 술을 마시고 즐거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 안개가 뿌옇게 끼었을 때 진시황이 피곤한 몸을 가지고 강둑에 배를 띄우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락이 극하니 슬픔도 너무나 많다.” 밤새도록 즐거워했는데 강둑에 배를 대니 그 마음속에 슬픔이 강물같이 출렁이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언제나 공허함을 동반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기쁨은 일시적이고 거짓된 것입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 기쁨을 주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슬픔과 공허함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기쁨의 표현이 웃음입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웃는 것은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에 도움이 되니 복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동물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조사·기재된 동물은 18,052종이랍니다. 그런데 웃는 동물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사람만이 웃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그래서 사람이 웃음을 잃으면 점점 짐승처럼 되고, 많이 웃으면 점점 사람답게 된다고 하는데, 의미 있는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웃음이 줄어듭니다. 한 통계를 보면 하루에 어린아이는 400번 웃고 어른은 15번 웃는답니다. 많이 웃으면 그만큼 젊고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잘 웃지 않는 사람들이 치매에 걸리는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면 많이 웃어야 합니다. 요즘은 젊은 사람도 치매에 많이 걸립니다. 남자가 소변을 보고 지퍼를 올리지 않는 것은 건망증입니다. 그런데 지퍼를 내리지 않고 소변을 보면 치매랍니다. 계단 중간에 섰는데 지금 내가 올라가다 섰는지 내려가다가 섰는지 모르겠다면 바로 검사를 받아봐야 합니다.
과학자들의 말로는 뇌는 진짜로 웃는지 가짜로 웃는지 분간을 못한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억지로 웃어도 몸에 좋은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나온답니다. 미국 스텐포드 의과대학교에서 웃음의 효과를 연구하였습니다. 1시간동안 웃음 터지는 비디오를 보여주고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사했습니다. 그때 암을 억제하는 호르몬이 평소보다 200배가 증가되더랍니다. 한바탕 웃을 때 몸속의 650개의 근육 중에서 231개의 근육이 움직여 위장과 가슴, 근육과 심장 전체를 움직이게 하더랍니다. 1분을 웃으면 2일을 더 살 수 있고 5분을 웃으면 5천불, 우리 돈으로 약 650만원 상당의 엔돌핀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웃는 사람은 심장이 더 튼튼하고 암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이 더 커집니다. 웃으면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여성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평균 7년을 더 삽니다. 그것은 여성들이 남성들 보다 더 감사하고 더 많이 웃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웃으면 기쁨이 옵니다. “웃을 일이 없는데 어떻게 웃습니까?”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래도 웃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웃으면 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고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마음의 즐거움을 위하여 웃어야 합니다. 그런데 설교시간에 이렇게 웃어야 한다는 말만 하면 안 됩니다. 이 시간은 설교 시간이니까 우리가 마음의 즐거움을 가지고 기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적으로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희락의 영이시고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가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공기보다 무거운 풍선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이유는 풍선 속에 들어간 헬륨가스 때문입니다. 공기보다 가벼운 헬륨가스가 풍선 속에 들어가서 풍선을 하늘로 올라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성령님의 역사로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이 세상에는 슬픔과 절망이 충만합니다. 불신자들에게만 슬픔과 절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성도들에게도 슬픔과 절망이 찾아옵니다. 심지어 목사인 저에게도 슬픔과 절망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과 절망의 감정을 이기고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비결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은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었던 비밀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원망하고 답답하고 슬프고 절망스럽던 상황을 넓게 보게 되고 이해가 되고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하박국서 이야기입니다. 하박국서 1장에서 하박국은 이스라엘은 타락하였고 이방 세력들은 강해져서 하나님의 선민 짓밟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차례에 걸쳐서 하나님께 왜 그런지 따지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1장에서 하박국의 기도에 답을 하셨고 2장에서도 다시 답을 해주셨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3장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면서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하박국 3:17-18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때 하박국의 기쁨은 환경으로 인한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을 대면한 후에 하나님의 높은 뜻을 깨달았으며 그 결과 그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충만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꽃밭에서 꽃향기가 나듯이 하나님 앞에 서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시편 16:11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므로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2. 쉬지 말고 기도하라(17절).
“기도는 영적 호흡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도는 숨을 쉬듯이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마치 우리가 호흡을 하듯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숨을 멈추면 죽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숨을 쉬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려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쉬면 영적으로 죽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호흡만은 멈출 수 없습니다. 식사 중에도 호흡을 멈추지 않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호흡하고, 노래를 하면서도 호흡을 합니다. 놀 때는 어떻습니까? 놀이에 빠져서 숨 쉬는 것을 잊어먹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심지어 사람은 잘 때도 숨을 쉽니다. 사람만 그렇습니까?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다 그렇게 합니다. 기도는 호흡하듯이 해야 합니다. 슬플 때도 기도해야 하고, 기쁠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일할 때도 기도해야 하고, 쉴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행 중에도 기도해야 하고, 길을 가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전철 안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하면서도 호흡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쉬지 않는 기도, 무시로 드리는 기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사는 기도를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늘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며 쉬지 않고 기도하려고 자신을 훈련한 로랜스 형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1635년 21세의 나이에 전투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는 수도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늘 수도사에 대한 생각과 꿈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온갖 노력 끝에 26세의 나이에 맨발의 가르멜수도원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는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평신도 수도자로 임명 받았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수도원 회계(會計)의 잔심부름꾼이었는데 일이 매우 서툴렀습니다. 그 후에 그는 부엌에서 백여 명의 수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아 15년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친 다리로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오가는 것이 어려워서 신발수선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주방일이나 신발을 수선하는 일을 하면서도 순간순간 호흡하듯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깊은 임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수도를 할 때, 그들을 위해 부엌에서 열심히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장 보러 갈 때에는 “주님! 좋은 식품을 값싸게 구입하게 하시어 수도사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주님! 제가 이 그릇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씻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불을 지피면서도 “주님이시여! 이처럼 성령의 불이 내 마음속에 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연관시켰고 또 그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반복된 임재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수도사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자신이 섬기던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로렌스 형제를 흉내 냅시다.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주님과 연관시키는 훈련을 하고, 모든 것을 기도로 바꾸는 훈련을 합시다. 그런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늘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마귀가 쉬지 않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도둑놈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적 생명과 믿음 그리고 기쁨과 감사 그리고 행복과 풍성한 것들을 빼앗아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마귀에게는 밤낮이 없습니다. 우리를 속여 넘어뜨리려고 쉬지 않고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6:41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을 이길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시험에 든다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기도할 때 성령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다서 1:20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말로 기도를 하는데,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종교에도 있습니다. 무당 중에도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을 하면 귀신이 역사하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기도를 하나님방언과 마귀방언으로 나눠서 말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 하는 사람의 중심입니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 잡혀 있다면 그 방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이고 그의 중심이 마귀에게 잡혀 있다면 마귀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중심을 드리고 하나님을 찾으면서 방언을 한다면 그것은 마귀 방언일 수 없습니다. 그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방언입니다.
현대 오순절 사건은 1901년 1월 1일 미국의 벧엘 성서신학교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학장이었던 찰스 팔함 목사님이 학생들에게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인지 성경을 연구해서 발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사도행전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논문을 발표할 때 보니까 한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말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도 방언할 때까지 기도하자”라고 해서 전교생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오스만이라는 여학생이 제일 먼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더욱 뜨겁게 기도하여 결국 모두가 방언을 하고 성령충만의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 후에 1906년 4월에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에서 흑인 시무어 목사님이 설교하던 중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서 많은 사람이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문을 듣자 온 미국과 온 세계에서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모여서 그 은혜를 받으려고 부르짖는데, 예배당에 사람이 너무나 많이 들어와서 예배당 마루가 꺼지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그때 로스앤젤레스 타임지는 “아주사 집회는 지진과 같았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는 아주사 집회의 불길은 그 이후에 유럽, 남미, 아시아, 전 세계에 일어나 오늘날 성령운동의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때와 같이 성령 충만을 체험하면 대개 방언을 합니다. 저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삼각산에서 기도를 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기 시작했는데,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방언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방언기도를 못하시는 분들은 방언을 구하시고, 방언을 하시는 분들은 방언기도를 많이 하세요. 로마서 8:26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데, 우리의 기도도 도우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방언기도를 하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하는 기도가 가장 정확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 같은 지성인도 성령의 간구를 알았기 때문에 방언기도를 많이 했던 것입니다. 고전 14:18입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충만하게 나타났던 교회입니다. 비록 그들은 영적인 질서를 잘 지키지 못했지만 은사는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그 교회에 방언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방언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길게 기도하려면 방언으로 기도하세요. 우리말로 기도하면 길게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말로 몇 시간씩 기도하는 분들은 대단한 분들입니다만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방언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방언기도를 할 때는 방언으로 기도하다가 성령의 인도가 있으면 우리말로 기도하고, 또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러다가 성령의 감동과 인도가 있으면 우리말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를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기도하면 안 됩니다. 기도의 방향을 정하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쪽 창문을 열면 강이 보이고 저쪽 창문을 열면 산이 보인다고 가정합시다. 여러분이 강을 보고 싶으면 이쪽 창문을 열면 됩니다. 여러분이 산을 보고 싶으면 저쪽 창문을 열면 됩니다. 방언 기도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방언 기도의 초점을 한 부분에 맞추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나게 하시고, 감동을 하시고,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는 등 그 부분에 대한 성령의 인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님에 의하여 깨달아지고 알아지고 생각나는 것을 우리말로 하면 그것이 통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언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응답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 28:11입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하나님은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방언의 은사입니다. 왜냐하면 고전 14:21에서 방언과 통역과 예언을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고 두려울 때 방언기도를 많이 하면 상쾌하게 됩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환경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우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뻐하는데 나는 기쁘지 않습니다. 늘 불안합니다. 그럴 때 마음을 치료하는 방법이 방언기도입니다. 사 28:11,12입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방언기도를 하면 마음이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마음이 상쾌해집니다. 곤비함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도 방언기도를 합니다. 방언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은 예배시간에 방언기도를 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정상적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26을 보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옛날 초대교회에는 예배를 보면 찬송가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하나님의 계시도 받아서 증거 했고 방언기도도 하고 또 방언통역도 했습니다. 예배에 반드시 방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 전통을 잃어버리고 방언하는 사람, 방언 하는 교회를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들 가운데 방언을 못하게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해는 갑니다. 왜냐하면 은사를 쓰는 사람들이 덕스럽지 못하게 은사를 사용해서 교회에 해를 끼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방언을 금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금하지 말라고 하는데 방언을 금한다면 성경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39입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성경에서 금하지 말라고 했는데 목사님들이 자기 생각을 따라서 방언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두 번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입니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방언기도가 크게 도움이 됩니다.
3. 범사에 감사하라(18절).
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범사라는 것은 모든 일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은 좋아서 감사하고 안 좋은 일은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안 좋은 일이 좋은 일보다 많이 다가옵니다. 계속해서 염려와 근심, 불안과 초조, 아픔과 절망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를 잘되게 합니다. 그 말을 증명하는 말씀이 시편 50:23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과 범사와 육체에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브란스병원 암센터 소장을 지내신 이희대 박사님의 간증입니다. 2003년 1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암이 발생했습니다. 그때부터 병마와의 긴 싸움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박사님은 암세포 발견 후 다섯 번의 수술을 했지만 암은 간과 골반으로 전이되어 네 번의 방사선 치료와 세 번의 항암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간증을 할 때까지 12번의 암 재발이 있어서 수술하며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그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내가 암이 걸려야 했는가? 내 손으로 암치료를 받은 사람 얼마나 많은데, 아직까지도 내가 할 일이 많은데, 내가 이렇게 죽을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암치료 전문의사인데, 자신이 암에 걸렸으니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분은 투병 과정에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은혜 받아 구원받은 후 이전에는 원망스러웠던 일들이 오히려 감사의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이 감사로 충만했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몇 년을 암과 사투를 별이면서 암 환자들을 모아 놓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환자들을 모아서 암 토의만 했는데 이제는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의 생활을 계속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몸속에 남아있던 암세포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후 그는 계속해서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하며, 한국 유방암 학회 이사장, 영동 세브란스 병원 외과 과장으로 일했고, 교수직은 물론 암센터 소장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희대의 소망」이라는 책까지 냈습니다. 감사를 통한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영국의 BBC방송이 신앙자가 비신앙자 보다 평균 수명이 길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왜 더 장수하는가 하면 신앙자들이 규칙적으로 교회에서 봉사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랍니다. 감사가 힘입니다. 비신앙자들 보다 신앙자들이 혈압이 낮고 우울증이 적고 불안증이 적습니다. 그리고 면역력은 더 강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장수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용기목사님이 불광동에서 목회를 하실 때, 다른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조목사님 교회에 와서 새벽기도를 아주 오랫동안 했습니다. 그분은 몸을 움직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기도는 안하고 늘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래서 조목사님이 등을 탁 치면서 “그게 무슨 기도요?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감사합니다. 그것도 감사합니다. 이게 무슨 기도요?”라고 하셨답니다. 조목사님이 볼 때 그분의 기도는 정상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조목사님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분 참 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왜냐하면 조목사님이 오래 살아보니 그저 그저 감사한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조목사님도 모든 것이 그저 그저 감사하더랍니다.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안 좋은 것은 좋게 될 것이니 좋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니 그저 그저 감사하더랍니다. 조목사님은 그러므로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아주 초보 기도임에도 불과하고 제일 최고의 기도인 것을 알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안 나오는 사람은 감사만 하십시오.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을 비우지 못하면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이 망하는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행복하려면 욕심을 비우고 자족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어느 부잣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일하다 말고 자기도 모르게 푸념을 했습니다. “내 수중에 지금 현금 100만원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일을 해결 할 수 있을 텐데…” 그 말을 2층에 있던 집 주인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 집 주인은 가사도우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필요한 곳에 쓰세요. 제가 들으려고 해서 들은 것은 아닌데요. 2층에서 들으니 100만원만 있으면 해결하실 수 있다고 해서 준비했어요.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필요한 곳에 쓰세요.”라며 봉투를 하나 주었습니다. 100만원이라는 말을 들은 가사도우미는 너무 너무 신이 나서 집 주인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돌아 서서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정말로 봉투 안에는 가사도우미에게 꼭 필요한 100만원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가사도우미의 마음속에 ‘이럴 줄 알았으면 200만원이 필요하다고 할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감사한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광야를 횡단 중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은 원망과 불평이 충만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은 은혜가 컸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며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는 유대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렸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던 유대인들을 하나님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만으로도 감사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이 비록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광야생활 중에 받는 은혜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감사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새벽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40년간 그들을 먹여주셨습니다. 쓴물을 만났을 때는 하나님께서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셨습니다.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니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대적들이 나타날 때는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중에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고, 그들을 보호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생활은 한시적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젖과 끌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에 입성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공급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의 결국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다음 주일은 1년의 절반을 마치고 하나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리는 맥추감사절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중심을 다해서 진실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입술로 감사를 고백합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감사헌금도 준비합시다. 다음 주일은 특별한 주일입니다. 특별한 감사를 드리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세 가지를 나누었습니다. 항상 기뻐합시다. 쉬지 말고 기도합시다. 범사에 감사합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므로 하나님의 복이 더욱 넘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