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용묵-무제(無題)
-분야 어문 > 수필 > 경수필/수필
-저작자 계용묵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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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遺稿)―
나는 존다. 내가 조는 것을,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수레를 타고 앉아, 어디로 가는지 가는 곳도 모르면서 졸고 있는 것을 나는 재작년 겨울 이십세기(二十世紀)에게 물어 본 바 있다. 그러나 우금껏 아무런 대답을 못 받고, 나는 그대로 존다.
이것이 나는 지금 이십세기에게 납치되어 가는 도중에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른다.
나는 내가 조는 것을 본다.
무시무시하게 큰 수레 안에 나는 내가 타고 앉아 조는 것을 본다.
소나 말이 끄는 것도 아니요, 엔진이 돌리는 운전도 아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서 가는지 거침도 없이 가는 수레는 허공에서 그냥 가기는 가도, 멀어지지도 않는 수레가 그만한 거리에서 그저 가고만 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가야 하는 것일까.
20세기는 나보다 세 살 위인 당연한 견수(肩遂)의 벗이건만, 이렇게도 나는 그를 모르고 그렇게도 그는 허교(許交)를 허(許)치 않는다.
세상이 새까맣게 어두워지며, 위(胃) 속이 텅 비이는 것 같게 메스꺼워서 게막질을 하는 사르트르를 나는 보았고, 신을 반역(反逆)하고 둥그런 무거운 돌을 굴리면서 숨도 쉬일 사이 없이 영원히 올라갈 수 없는 산 고갯길을 추어 오름으로 자아를 새로이 구성하는 카뮈를 나는 보았다.
인생이라는 것은 정말 한 알의 구토제(嘔吐劑)의 효력밖에 더 되는 것이 아닐까.
올라갈 수 없는 산 고갯길을 영원히 올라가지 않아서는 자아라는 존재를 정말 확보할 수 없는 것일까.
과거의 인생에 대한 이념으로는 오늘의 이 인생의 고뇌는 너무도 이해키 어렵다.
이 고뇌의 의식 속에 숨어 있는 영혼의 심연(深淵)을 비치어 보는 특제(特製) 망원경은 그래 없단 말인가.
나는 존다.
군(君), 군은 단정(斷定) 나와 허교(許交)를 하지 않겠는가.
1954. 11. 27.
나는 오늘도 내가 수레를 타고 앉아서 조는 것을 보고 또 20세기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을 생각하고 나는 정말 왜 졸며 어디로 가는지가 알고 싶어서 그리운 그리운 내 존재에 목이 말라, 침을 몰아 삼키며 팔굽으로 턱을 고이고 눈을 내려 감았다. 그리고 나는 내 존재를 고요히 찾아보려고 감은 새까만 눈앞에서, 내가 타고 앉아 어디론지 졸면서 가는 나를 나는 그냥 본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전부인 것만 같게 생각이 들어서 졸고 앉았는 나를 불쌍하게, 가엾게, 정말 어처구니없게 바라보다가 나는 또 눈을 떴다.
밖은 유난히 장그러운 볕이다. 활짝 열린 문으로 쏘아 드는 햇볕에 살이 닿으니 감기 기운이 육체를 엄습할 때 사타구니에 손을 넣는 맛보다 더 개완하다.
고양이는 블록 담 위에 모로 근더져서 꼭대기를 지지며 뒷다리를 들어 새끼들에게 젖을 내맡기고 졸고, 마루 위에서는 주인집 할머니가 흐트러진 하얀 머리를 그대로 손녀의 무릎 위에 내맡기고 이를 잡히며 존다. 그리고 마당에 널어 놓은 메주 멍석 귀에는 쥐 한 마리가 여차 붓하면 뺑소니를 치려고 뒷다리에 힘을 주고 제지바름이 서서 주위를 도록도록 살피다가는 떨어진 메주 부스러기를 살짝 한 개씩 실례를 하면서 고개를 까딱인다.
모두 존다. 봄볕은 무서운 힘이었다. 평화의 경지에까지 모든 생명을 이끌고 있었다.
바람이 담을 타고 나비와 같이 넘어온다. 담 안 장독대 모서리에 무데기로 핀 샛노란 개나리꽃이며, 진달래꽃이며를 가지마다 흔들어 놓는다. 고양이도, 할머니도, 쥐도 슬며시 눈을 뜬다. 봄의 향훈이 대기 속에 흩어져 그들의 코로 흘러들은 모양이다. 고양이는 피부가 늘어나는 데까지 마음껏 입을 벌려 하품을 한 번 하고, 수염 끝에 스치는 향훈마저 핥아 들이는 것처럼 혀를 내밀어 휘이 좌우 수염을 핥아 들이고, 할머니는 사지가 늘어나는 듯하게 기지개를 켜고 네 활개를 쭈욱 펴며 아주 나가 근더지고 쥐는 또 한 번 살짝 실례를 하고 무릎을 꿇고 나는 그저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고.
나는 냄새를 통 맡을 줄 모른다. 축농증이 아주 심하다. 졸음까지 깨울 수 있는 봄의 향훈, 그 향훈도 나와는 인연이 멀었다. 나는 얼마나 봄의 향훈에 살이 지고 싶은 것일까, 살이 지고 싶은 것일까. 축농증 수술을 몇 번이나 받았지마는 헛일이었다. 현대 의학은 숱한 박사를 내었으나 그 근치법은 모른다. 그들의 말과는 달라서, 내 육체를 그 이상 더 아프게나 하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한 현명한 일임을 나는 알았다. 어떤 친구의 딸이 적령기에 있어 혼담이 일어나자 축농증 수술을 받았다가 벗겼던 이틀 윗가죽이 잘못 붙어 입이 비뚤어져서 여성미를 온통 잃고 혼담이 깨어져 나가던 것을 보고 나는 그것이 무서웠다. 나는 축농증 수술을 아주 단념하고 봄을 모른다. 그들의 졸음과 나의 졸음에는 이렇게 현격한 거리가 있었다. 나의 졸음은 그들과 같이 봄의 향훈에 자아를 잊는 졸음이 아니었다.
나는 현재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과거에 있어서도 봄뜻에 마음이 살져 본 기억이 없다. 과거란 나에게 있어 거의 없다고 하여도 좋다. 다만 과거가 있다면 오직 한 가지 휘파람 소리, 그 휘파람 소리다. 새끼손가락을 까부라쳐 입 안에다 한 번쯤 넣고 김을 내불면 묘한 소리가 그 입으로 흘러나오던 그 광대의 휘파람 소리다. 이렇게 휘파람을 한 번 불고 훌쩍훌쩍 세 번이고 네 번이고 펴 놓은 멍석 끝이 다하기까지 사판뜀을 넘고 나서는 우뚝 서서 또 한 번 아까 모양으로 새끼손가락을 까부라쳐서 입 안에다 반쯤 넣고 조금도 틀림없는 꼭 같은 묘한 소리를 내던 그 휘파람 소리를 나는 어머니의 등에서 업혀서 토방 위 느리운 발 틈으로 내다보며 듣던 기억이다.
그것이 증조모님의 환갑 때라는 것을 나는 그 후에 어머니에게서 듣고 안다. 내 종아리에는 그림에 그린 달 같은 조그만 하얀 허물이 하나 있다. 닭의 다리를 달라고 샛문 고래에 매달려 칭얼거리며 졸다가 샛문 돌쩌귀가 빠져서 샛문이 떨어지는 바람에 몸이 쏠려 한참 펄펄 끓는 솥뚜껑의 손잡이에 종아리가 닿아 익어 가지고 달포나 신고를 하다가 그런 허물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또한 어머니에게서 듣고 그 허물의 유래를 알았다. 그것이 역시 증조모님의 환갑날 일로, 내가 낮에 휘파람 소리를 듣던 바로 그날 저녁밥 때였다는 것을 또한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여섯 살 때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같은 여섯 살 때이면서 허물을 남기게까지 고생을 한 기억은 없고, 그저 그 광대의 휘파람 소리, 그 휘파람 소리만이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 휘파람 소리가 얼마나 나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그러면서 근 오십 년을 나와 함께 살아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 휘파람 소리에 살이 졌음을 알 수 있다.
휘파람 소리, 이 휘파람 소리에 구성이 된 내 자아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 휘파람 소리에 목이 말라서 졸리는지 모른다. 냄새에 둔감한 바랜 내 마음은 이 휘파람 소리에만 살고 싶은가 보다. 휘파람 소리, 이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자아가 구성이 된 잃어진 그날의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나는 지금 내 눈앞에서 졸면서 타고 어디론지 가는 수레를 나는 바라보면서 휘파람 소리에 내 마음은 돌아간다. 나라는 내 존재의 모두가 돌아가는 것을 이 시각에 나는 느낀다. 분명히 기억하여야 한다. 나는 이 소리에 살았던 것을, 또 살고 싶은 것을.
그러나 내 나이 오십, 그 광대는 이미 죽었을 사람. 영원히 들을 수 없는 휘파람 소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휘파람 소리는 아주 흘러가고 말았을 것일까.
나는 휘파람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 휘파람 소리를 듣고도 내가 수레를 타고 졸면서 어디론지 가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하겠다. 나는 나를 구제할 의무가 있다. 내가 무엇인지 모르는 나를 내가 아는 나로 구제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나대로 구제할 힘이 없다. 사지를 옮겨 놓는 데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마음의 행사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분명 무엇에 붙들리어, 그것의 조종대로 거역을 못하고 노예를 사는가 보다. 따져 보면 살아온 생이라는 것이 어느 것 하나 내 본의인 것이 없다. 사람 사는 극히 사소한 일인 차 한 잔을 사는 데도 마음대로는 안 된다. 불과 오십 환이면 족할 차 한 잔도 사기 싫은 미운 사람이 있다. 그러나 차를 사고 싶은 손님과 마주 앉았을 때 짓궂게 옆에 와 앉아서 떠나지 않을 때는 하는 수가 없다. 또 차래도 한 잔 나누고 싶은 친구를 만나 차를 사려고 하면 엉뚱한 친구가 사이에 끼어 그 찻값을 치른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은 신의 완상용 공원인지 모른다. 그리하여 공간의 만물은 신의 향락을 위한 제물인지 모른다. 그리하여 신의 비위에 맞도록 모든 것이 조종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지 않고야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못 할 법이 어디 있으랴. 지금도 나는 싫은 일을 또 해야 할 시각에 다다랐다. 윤군을 관에다 집어넣어야 한다. 죽은 사람을 보는 일이란 싫은 일이다. 하물며 송장을 만지게까지 일은 되어 있으니…….
이것이 다 무언가.
윤군은 병원에서 죽었다.
〔발표지〕《현대문학》통권 88호 (1962. 4.)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