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따돌림을 받으며 학교 생활을 하고..
현재는 대학교에 진학하여 휴학 후 입대해서 군생활을 하고 있는 한 청년입니다.
글 내용상 경어는 생략하오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
언제부터인가.. 그랬다.
유치원때는 아무 거리낌 없이.. 상도 많이 받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었다.
문제는 초등학교부터였다.
설레는 학교 입학..
설레임 속에서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1년은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냈다.
문제는.. 2학년 때부터였다..
사소한 문제였다. 사소한 문제로 친구와 다투게 되었고..
그 친구는 돈을 물쓰듯 뿌리고 다니던 친구였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들을 동원하여 나를 따돌리기 시작했었다. 또래에 비해 체격이 월등했던 나를 힘으로 누르지 못하자 친구들을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들과 마찰이 잦아지면서, 나는 서서히 변해갔고 비뚤어졌다.
나아가 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도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한번은 그 녀석들이 몰려와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괜히 물건을 뺏어서 집어던지고.. 머리를 툭툭 치고..
더 이상 참을 것도 없었다. 곧바로 일어나서 녀석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그 동안 쌓인 감정들.. 인정사정 없이 걸상을 들어 두들겨 패고, 발로 차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이없게도..
내가 아닌,, 우리 어머니께 돌아갔다.
선생님과 그 학부모들 앞에서 머리숙여 사죄하는 어머니..
'애들을 팬건 난데... 먼저 날 건드린 애들은 쟤들인데..
왜 우리 어머니가 저래야 하는건가..'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 녀석과 함께 놀던 아이들은..
소위 '있는 집 자제분들' 이었다.
그 녀석들은 이미 교사들과의 로비를 통해 든든한 백을 갖추었던 것이다.
하핫.. 어이가 없었다.
우리집도... 나 어렸을땐 꽤나 잘 살았다.
동네에 딱 1대 있는... 3000cc 짜리 배기량의 각 그랜저..
정원에 주차장과 연못이 딸린 2층짜리 주택.. 그때 당시 90년도... 2층 전세 가격이 5500만원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다 보니 가세가 기울어서 그렇게 없는 집 자식이 된 거다..
아무말 안하셨지만 그 장면은 내게 충격이었다.
다시는 어머니께 누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뒤로, 누가 때리건, 건드리건 간에 말로서만 일관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손은 쓰지 않았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해가고... 난 아이들 사이에서 일명 왕따가 되어 있었다.
그래.. 중학교에서 잘 생활해 보자..!!!!!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같은 중학교로 진학한 아이들이 워낙에 많았던 것.. 그 아이들의 입소문으로 나는 또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쉬는시간만 되면 와서 건드리고..
잠깐 화장실 갔다오면 필통이 없어져 있고..
의자에 침을 뱉고..
책상을 엎어놓고..
여름에 더워 죽겠는데 음악실에 교복마이 두벌 겹쳐입게하고..
책상 아래에 침핀을 박아놓고..
도시락을 창 밖으로던져버리고..(당시 우리 중학교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던 시기였다.
더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난 고생하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딴것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렇게 버텨냈다.
그렇게 3년...
난 이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똑같은 일상... 같은학교로 오는 아이들은 왜 이렇게도 많던지..
자살도 생각해봤다. 자퇴도 생각해봤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끝없이 생각해왔다. 시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자식 의지하며 살아가는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내 목숨하나 쉽게 버리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또다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또다시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나도 사람이다..!!!! 내가 왜 이렇게 죽어지내야 하는지 인정할수 없었다.
모든 일을 잊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방황만하는 것보다는..
일을 해서 집안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주식을 배웠던 나는... 일을 해서 번 돈을 모두 주식에 투자했다.
2002년... 그러던 어느날..
사건이 터졌다. 내가 미친듯이 투자했던 OO콤 이라는 회사..
T-180이라는 신모델이 인기리에 판매되면서 주가는 엄청나게 뛰었다.
하핫.. 그 동안의 고통에 대한 보상인가..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았다.
그 돈들로 계속 재테크를 돌리며 난 원동기 시험을 치고.. 125cc 오토바이 한대를 구입했다.
그 오토바이로 배달을 시작했고..
쉬는 날엔 마음껏 한계속도까지 올려가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한참 뉴스에 떠들어 대던 폭주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2학년이 되었고..
그동안의 나에 대한 이미지를 지우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항상 밝은 모습으로.. 한편으로는 약간 노는 이미지로..
2학년부터 서서히 걷혀가기 시작했다.
나에게 시비를 거는 녀석들은.. 가차없이 제거해버렸다.
후환이 남지 않게.. 얼굴처럼 드러나는 부분은 피하고.. 부모님께 알리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나처럼 왕따를 당하던 친구들을 끌어모았다.
'우리는 하나다.. 이제 그 누구도 우릴 건드릴수 없게 만들자..'
그 친구들과 모여 남는 시간마다 체육관을 다니며 운동을 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그들또한 우리편으로 만들었다.
폭력써클에 대항하는 하나의 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덕분에.. 3학년 생활은 수월했다.
그 누구도.. 교사를 빽으로 둔 녀석들도 우릴 건드릴 순 없었으니까..
더 이상.. 나와 같은 아이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난 이미 모범생에서는 멀어져 버렸고..
교사들은 날 포기했고..
그들은 날 학생으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난 자연히 학교와 멀어져 갔고 일탈을 꿈꿔왔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한 여자..
오토바이에 단단히 미쳐있던 난, 2종소형 면허를 준비하기 위해 미리 600cc급의 오토바이를 구입하고 길가에서 천천히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정류장에서의 갑작스런 날치기..
한 여성이 손목을 감싸며 쓰러져 울고있고, 빠른속도로 멀어져 가는 오토바이 1대가 보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잽싸게 휠스핀으로 180도 꺾어 추격했다...
600cc라 그런지 비교도 안되게 날아가더군..
불과 1분만에 따라잡았다.. 그리고는 가차없이 보도블럭으로 밀어붙였다.
그렇게 핸드백을 찾아준 것이 계기가 되어.. 얼마간 흐른 뒤에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2살이 많았던.. 대학생..
그녀 덕에..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나갔고..
대학진학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수능 100일 남은 상황.. 공부라고는 전혀 관심도 없었고, 방정식이 들어간 문제조차 제대로 풀지 못하는 나에게는 무모한 시도였다.
친구들과 함께 미친듯이 시작했다.
100일 남기고 미친듯이 공부해서.. 결국 우리는 전원 4년제 대학에 합격했다.
교사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 어리버리하고 멍청하던 녀석이 4년제 대학을 가다니..
오랜 기간의 왕따는 내 스스로 극복했지만
새로운 갱생의 삶은 그녀의 덕분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학교에서는 내가 진학한 대학의 그 학과에 진학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좋아..!!!!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길이 열렸다. 난 일도 열심히 하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해 나갔다.
입학시부터 장학금을 받아서 전액은 아니지만, 조금씩이라도 장학금은 전부 받아먹었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리터급의 오토바이와 2700cc 배기량의 스포츠차량을 구입했다.
아예 처음부터 밀고 나갈생각이었다. 조금도 얕잡히고 싶지 않았다.
성공했다. 그 누구도 나에게 함부로 하질 못했다.
모두들 먼저 와서 친해지길 원했고, 기회를 얻어 창업동아리를 개설하자, 모두들 와서 창업에 대해 상담하고 술자리를 가졌다.
이미 과거의 나는 없었다.
여기서도 나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대학엔 폭력단체가 거의 없지만서도 꼭 혼자 돌아다니는 아이들 있지 않은가..
그런 아이들에게 먼저 접근해서 친해졌다.
그렇게 나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여자친구는 어느날 내 곁을 떠났고..
서울에서 공부하다 만난 선배와 결혼을 하겠다는 거였다.
더더욱 비참하게 만드는건 청첩장까지 보낸 것..
모든것을 잃은 것 같았다.
지금의 나는 그녀가 이끌어 준 덕분에 존재하는 건데..
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결혼식 당일.. 난 그곳에 갈 계획이 전혀 없었다.
한참 고속도로를 달리던 도중.. 차량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휴게소로 들어갔다.
청주에 있는 휴게소.. 긴급정비를 받기 위해서였다.
진입하는 순간..
엔진에서 폭발음이 들리며 차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결국.. 렉커를 불러 견인하고..
난 본의 아니게 결혼식 장으로 향했다.
참.. 신부가 된 그녀의 모습은 천사더라..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난 뒤돌아서 뛰쳐나왔다.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는데.. 도착한 문자 메시지.. "밥먹고 가지..."
그녀였다.. 그녀는 끝까지 잔인했다.
한참동안 폐인으로 살았다.
충격이 좀 커서..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다시 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 힘든 생활들 어떻게 이겨냈는데 이따위에 질까보냐..ㅎ
열심히 살려고.. 과외를 시작했다. 열심히 돈벌려고.. 잊으려고..
그러다가 제자로 만난 그 여고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연인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잊을 수 있겠구나... 잊으라고 다른 사람을 보내준 거구나..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잘해줬다.
그 집에서도 나를 아들처럼 여겨주었고..
그녀를 대학에 진학시키고.. 면허를 따자 운전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그놈의 운전때문에...
그녀의 오빠가 입대를 한 관계로.. 그녀에겐 차가 있었고..
나에게 운전을 배우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것이 또다른 시작이었다.
2007년 1월 2일... 새벽 1시..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신호대기를 하던 그녀는..
만취한 무쏘 운전자가 신호를 위반하며 중앙선을 넘어 그녀의 차를 충격했고..
그녀는 과다출혈, 그리고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실했다.
난 공황상태에 빠져.. 연기할 생각도 못한채 그해 2월.. 입대를 하게 되었고..
그녀는 긴 사투를 벌이다..
07년 12월.. 1차 정기 휴가때 세상을 떠났다.
보직의 특성상 휴가 나가기가 어려운 나로서는..
가끔.. 아주 가끔 분향소를 찾아 주는 것밖에는..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나도 어느새 병장이 되었다.
죽을것만 같았던.. 소설같은 시간을 보내고..
현재의 자리에 서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제 전역하면..
일도 다시 열심히 하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훗날 내가 결혼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나 하나 믿고 따라와준 한 여자 고생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해서..
멋진 사회의 정상으로 서야겠다는 생각이다..
주제를 벗어났네요..^^
술한잔 하고 쓰다보니 괜히 복받쳐서..
악플은 자제해 주세요.^^
카페 게시글
나, 할말있어!
나도 학창시절 왕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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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8.22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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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좋은 글 인거 같네요^^저는 초등학교1학년때부터 지금 중학교를 다니는 현재까지 계속 왕따를 당하고있는 데..ㅠㅠ죽고 싶을 때는 있어도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데...ㅠㅠ정말 힘든상황속에서 해낼수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 같네요..정말 힘내서 열심히 살아야겠어요~!ㅋ
와 완전 소설같은 이야기네요. 제자랑 사랑도..생소하지만 아름다웠을것 같고, 왕따를 이겨낸 님도 대단한것 같고.. 진짜 마치 한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아요. 마음 아픈거는 얼른 잊으시고,, 군생활도 멋지게 훌륭하게 마쳤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파란만장하게 사신듯....읽으면서 속으로 몇번 놀랐어요
와우 소설같은이야기네요 ㅎ 군생활훌륭하게마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