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트럭이 무섭게 질주하는 도로에 나팔꽃 한 송이가 피어있다.
언제 트럭의 무지막지한 바퀴가 지나갈지도 모른 채, 가녀린 가지를 드리우고 부시도록 아름답게 피어난 모습이 마치 우리 인생을 보는 듯 처연하기만 하다.
꽃잎들의 현란한 발아, 연록과 초록의 생명의 춤사위를 축제처럼 거치고 나서 여름이 되었다.
낮과 밤의 일교차를 지나, 더위로 치솟는 기온을 전자제품의 힘을 빌려 성급하게 조절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 일차적으로 체온을 조절하면서 변화하는 기온에 대응하고 싶다.
체온이 오르지 않도록 움직임의 속도를 늦추고 자세를 풀며, 차가운 대나무 자리와 베개로 견디어 보면 어떨까. 그러면 더위나 추위뿐만이 아니라 여건과 상황의 변화에도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는 내성(耐性)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현실의 어려움도 느슨하게 여유를 가지고 관조할 수 있다면, 그 속으로 침몰되지 않고 헤엄쳐 지나갈 수 있고, 자꾸만 얽히는 인간관계라도 넉넉하게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얽힌 줄을 서로 당기기만 한다면 매듭은 더욱 단단하게 옭아매 질 수밖에 없지만, 조금씩 다가가면서 여유를 가진다면 매듭을 풀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이다.
기도에도 이렇게 신축성 있는 자세로 임하면 어떨까. 내가 원하는 대로 정해 놓은 원칙에만 경직되지 않고, 그분의 때와 방법에 따라 우리의 기도를 맞추어 갈 때, 살아있는 기원이 될 것이다.
경직된 물건들은 상황에 따라 파괴되거나 무용지물이 되지만, 신축성 있는 나일론은 작은 것도 큰 것도 탓하지 않고 상대에 맞게 작아지고 커지면서 부드럽게 싸주는 역할을 넉넉하게 감당해 나가지 않는가.
외부의 여건을 내면에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가진 신축성으로 외부에 대처할 수 있음이 진정한 승리일 것이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가 힘이 있고 감동적인 이유는, 기도 전체가 온전히 자기 내면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는 이러한 내면의 진리로 마무리된다.
‘가위 바위 보’에서는 가위에 찢기는 부드럽고 약한 보자기가 가위도 사정없이 부숴 버리는 바위를 오히려 감싸안으며 이길 수 있다는 진리를 말해주지 않는가!
그렇다!
한 장의 보자기처럼 연약한 우리라 할지라도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바위를 이길 수가 있다. 단, 바위보다 넓고 부드러울 때만이....
나날이 기온은 높아지고 있지만 사막의 끝에는 물이 있듯이 이 더위가 끝나는 지점에 더위를 말끔히 씻어주는 바람이 예비 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 우리가 살아있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넉넉히 견딜 수 있는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