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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수많은 왜군을 사로잡아 가두어 두었던 왜군포로수용소 터가
해남 삼산면 평활리, 양촌저수지 아래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양촌저수지 공사 때 현장사무실과 식당이 들어서면서 남아있던 석축 대부분을 훼손시켜버려
그 흔적을 찾기란 힘들다. 해남군의 문화유적 보존정책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곳에 왜군 포로수용소터가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 桐生市에 거주하는
야쓰하다 다로(1983년 당시 83세, 일제때 해남경찰서 근무)씨가 일본사료에서 찾아내
해남문화원에 통보해 줌으로서 밝혀졌다. 야쓰하다씨는 일본사료 ‘文祿慶長의 役’에서 임란당시 소서행장 예하의 일본수군들이 조선군의 포로로 잡혀 대둔사 근처에 수용됐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들 왜군포로가 수용소 근처 마을의 논밭을 개간하고 관개사업에도 참여했음이
드러났다는 사실도 알려왔다.
또 왜군 포로들이 시공했다는 관개시설이 삼산면 소재지와 원진리 일대에서 최근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삼산 평활리에는 1920년대까지도 양촌저수지 아래등성이에 신분이 뚜렷하지 않는 4∼5가구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왜군 포로 후손으로 짐작되는 이들은 마을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의무적으로 나무 한짐씩을 해왔었고 마을 앞을 곧장 지나다니지도 못하고 마을 뒷산으로 돌아서 다녔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정유재란의 일본군 북진 작전이 명량해전에서 실패되어 남원에 있던 소서행장 부대가 해남을 거쳐 순천으로 퇴각한 점으로 미뤄 이곳에 왜군포로수용소터가 있었던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임란왜란 시 제1군의 장수로 1만8700명의 지휘관이 되어 참전해 부산진성과 다대포진성을 함락시키고, 가장 먼저 도성에 입성한 자다. 곧이어 평양성까지 수중에 넣었던 일본군의 선봉장 역할을 했고 명량해전 대패 후 남원에서 순천으로 퇴각해 순천왜성을 축조한다. 1597년 1월 15만명의 일본군이 침입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일본은 수도인 한양으로 입성했던 1차 침략때와는 달리 수군을 포함한 우군, 좌군 전병력을 전라도로 향하게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선의 8도 전부를 정복할 만큼 맹위를 떨쳤지만
결국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한 이유를 곡창지대이자, 군량공급지인 전라도를 장악하지 못했다는데서 원인을 찾는다.
이에 풍신수길은 수군과 육군의 주력부대를 전라도로 배치하고 이로인해 전라도는 철저히 유린되고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무자비한 살육이 자행된다. 또 일본군은 조선인의 귀를 베었던 1차 때와는 달리 더욱 참혹하게 코를 베기 시작한다. 왜장의 전공을 나타내는 코 영수증. 전북 김제지역 한 군데에만 삼천 백여개,
당시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진 수만개의 코가 당시의 참상을 말해준다. 육지에서 남원과 전주를 점령한 왜군은 우군만이 북상하고 모든 병력은 다시 남하를 시작한다. 그러나 전주 점령한달 뒤, 서해안으로 가는 그 길목에서 대접전이 일어나니 명량해전이다. 일본군의 대패로 막을 내린 명량해전은 수륙병진작전을 펴려던 왜군의 계획을 수포로 돌려 버린다.
그리고 1차 전쟁 때의 악몽인 육지에서의 고립을 염려한 일본군은 일제히 분산해서 남하를 시작한다. 이때 고니시도 순천으로 퇴각해 왜성을 쌓고 11개월간 그곳에서 주둔한다.
이때 고니시가 남원에서 순천으로 퇴각하는 길목의 하나가 해남이었다.
고니시의 예하 부대가 어디에서 전투를 벌려 그 부하들이
해남에 있는 왜군 포로수용소터에 수용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순천으로 퇴각하던 고니시가 해남지역을 경유했을 것으로 보여 이곳의 유적이 고니시와 관련이 높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 해남에 왜군포로 수용소가 있다면 조선수군이 운영했을 것이다.
첫번째 이유는 그 지역이 조선수군이 관할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왜군포로 수용소에 잡혀 있는 왜군이 나중에 고니시군에 합류한 왜수군 출신들이기 때문에
이들 왜군수군과 싸운 존재들이 누구겠는가! 조선수군 밖에 없다.
*칠천도 해전 이후 명랑해전 하기 까지 조선 수군이 보유했던 판옥선은 12~13척 밖에 없었다.
명랑해전 이후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반격을 피하고자 또는 조선수군을 재건하고자
여러 지역으로 기지를 옮겨 다녔다.
칠천도 해전 이후 죽었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장수들이 이순신 휘하로 모여 들었고,
그에 따라 병사들과 함선들이 덩달아
모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고자 조선수군을 따라다니는 피난민 일행들이 많기 때문에
거기서도 병사의
징발이 쉬었다.
병사과 장수들이 가면 갈수록 많아졌지만, 그들이 태울 수 있는 함선의 숫자는
크게 부족한 관계로 이순신 장군께서는
일부 수군을 육전에 참가시켰다. 배를 갖지 못한 장수들이 적지 않는 수군들을 이끌고
전라도 땅에서 육전을벌였다.
앞서 말한 해남과 장성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국지전이 벌어 졌다는 기록이 있듯이
조선수군이 실제로 육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후부터 조선수군은 왜군이 철수할때 까지 전라도 땅에서 육전과 수전을 번갈아 하면서 싸웠는데,
그 조선수군이 싸운 이들이 누구였을까? 단 노량해전 싸움 빼고는
대부분이 바로 전라도 순천에 주둔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들이고,
이들을 보좌했던 일본 수군들이었다.
아마도 이런 수많은 전투 중에 조선수군에 잡혀 왜군들이 포로 수용소 생활을 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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