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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심복
빌레몬서 1:8-18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우리는 성탄을 기다린다.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는 사랑의 새로운 차원을 일러 주신 분이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아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고 만민이 찬양한다.
예수님은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를 가르치셨다. 그 본보기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주님은 서로 사랑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요 13:34) 하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종의 벽을 넘기 위해 애썼다.
당시 민족, 신분, 언어, 사회적 관습, 무엇보다 종교적 경험이 다른데, 그것도 박해의 상황에서 교회는 어떻게 일치를 이룰 수 있었을까? 다만 교리 이전에 ‘사랑’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당회를 앞둔 주일에는 사도 바울의 편지 중 한 구절을 읽는다. 신약성경에서 최초의 기록인 데살로니가전서 1장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3).
여기에서도 ‘사랑의 수고’를 강조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칭찬과 격려에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이상을 들려준다.
바울이 전한 사랑의 계명은 초대교회와 오늘 우리에게까지 모든 신앙공동체의 매뉴얼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그 선언문(매니페스토)과 같다.
해마다 맞이하는 성탄 즈음은 다시 사랑을 확인하고 실천하는 바로 사랑의 절기이다.
1)
초대교회는 여러 다양한 모습을 지녔지만, 궁극적으로 친밀한 신앙공동체를 지향하였다. 그중에서 빌레몬서는 가장 짧은 편지이지만 인간 사랑에 대한 숭고미가 절절하다.
바울이 쓴 13개의 서신은 신약성경에서 배열 원칙에 따라 순서를 정하고 있다. 그 결과 빌레몬서는 바울 편지 목록의 맨 뒤에 위치한다. 분량이 겨우 1장이고, 공동체가 아닌 개인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에 비중이 가장 낮게 평가된 것이다.
특별한 점은 개인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로서 유일하게 보존되었다. 이 편지의 수신인은 빌레몬이란 개인이다. 그는 골로새에 거주하는 유복한 사람으로 일찍이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한 개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바울의 동역자에 대한 사려 깊음, 한 노예에 대한 인정과 사랑 그리고 소박하나마 복음의 진수가 잘 드러난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다. 그곳에서 한 노예 신분의 죄수를 만났는데, 그는 주인에게 손해를 끼쳤고, 처벌이 두려워 도망친 사람이다. 나중에 바울은 그 노예의 주인이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골로새의 빌레몬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석방된 그를 주인 곁으로 돌려 보낸다. 목숨을 걸고 도망친 노예를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그 노예의 이름은 오네시모이다.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목적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변호해 주려는 것이다. 바울은 젊은 그리스도인인 빌레몬을 정중히 요청한다. 사도의 권위로 말할 수도 있지만, 격식을 갖추어 진지하게 부탁한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8-9).
바울과 빌레몬은 영적 멘토와 멘티처럼 스스럼없는 사이이다. 그럼에도 편지 속에 절절히 담긴 속마음을 보면 바울의 깊은 신앙과 따듯한 인격을 느낄 만하다.
일찍이 사람들은 묻는다. 그리스도교의 노예제도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 물론 바울이 노예해방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노예제에 기초한 사회여서, 그것은 만약 노예해방을 주장했다면 국가와 체제에 대한 반역 행위일 것이다.
노예해방사상은 19세기에나 주장될 만큼 혁신적이었다. 미국의 경우에도 1960년대까지 흑인 노예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지닌 인간에 대한 이해, 곧 인권에 대한 태도는 오히려 20세기보다 앞선다.
당시 노예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게다가 감옥에서 만난 노예라면 더군다나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함께 감옥에 갇힌 노예요 죄수인 오네시모를 아들로 대해 주었다.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9-10).
그는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아들이다. 이렇듯 바울은 노예해방의 사고를 가졌다. 노예를 아들로 삼는 것은 그 이상의 생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태도였다.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바울은 오네시모를 두둔한다. 그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이고, 또 손해를 끼친 죄인이다. 노예는 남의 재산에 불과한 존재이다. 주인은 노예를 죽이고 살릴 권한을 갖고 있다.
그 시대에 노예는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재산’일 뿐이다. 그럼에도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은 그런 노예를 아들처럼 여겨 아버지의 마음으로 대한다. 오네시모를 가리켜 ‘그가 전에는 무익한 자로 남에게 해를 끼쳤지만, 이제는 유익한 자가 되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변화된 오네시모는 이제 주인 빌레몬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 바울은 영적 아버지로서 오네시모를 보증해 주었다. 바울의 품이 얼마나 넓은가? 그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박해자였으나 용서받은 죄인이 되었다.
2)
심지어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그는 내 심복이라”(12)고 말한다. 난외 주를 보면 헬라어에서 심복을 또한 ‘심장’이라고도 번역한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심복이라고 한 것은 바로 자신의 심장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변호하면서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주인을 설득하지 않는다. 정말 새사람 된 오네시모가 주인에게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사역에서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다. 바울의 편지 13개를 보면 바울은 사람에 대해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녔다. 편지의 끝부분을 보면 바울은 공통적으로 늘 자기 동역자들의 안부를 전한다. 애정을 갖고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또 상대의 평안을 빈다.
빌레몬서 마지막에는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24)고 썼다. 단 한 장짜리 편지에서도 자기와 함께하는 젊은 동역자들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고 있다.
바울은 편지 수신인인 빌레몬과 편지를 보내는 자기들을 하나의 호칭으로 부른다. 그것은 ‘동역자’이다. 동역자(同役者)는 함께 어깨에 짐을 진 사람이란 뜻이다. 마치 한 겨리의 황소가 멍에를 같이 메고 밭을 갈 듯이, 괴로움과 수고,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심복이 된 사람들이다. 내 심장과 같은 사람이 함께 한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나는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가?
빌레몬은 바울의 동역자였다. 빌레몬서 서문을 보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1-2)라고 썼다. 골로새 지역 초대교회의 일원으로서 빌레몬과 그의 아내가 당시 얼마나 귀한 일꾼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은 주인 빌레몬뿐만 아니라, 노예인 오네시모에게서도 그런 동역 관계를 발견하였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16).
바울은 오네시모는 예전의 불량한 노예가 아니며, 예전에 빌레몬처럼 그를 대신해 바울을 돕고 있다고 말한다. 얼마나 큰 변화인가? 오죽하면 노예인 오네시모를 가리켜 심복이요, 심장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을까? 심복 혹은 심장은 내 몸 안의 가장 중요한 장기로, 바울의 마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 곧 바울 자신과 같다. “오네시모는 나 자신이다”라는 의미다.
어쩌면 내 자녀들은 나의 심장 같은 존재가 아닌가? 내 아내와 내 남편은 심장과 같은 그런 존재일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 내 심장이라도 이식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킬 수 있다.
바울의 오네시모에 대한 태도는 참 감격스럽다. 어떻게 로마 시민인 바울은 노예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을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다.
모리츠 사리프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오로지 한 천사를 찾으면 사람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 안에서 오로지 한 사람을 찾으면 천사를 반드시 찾을 것이다.”
노예 오네시모는 한때 주인 빌레몬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런데 바울은 그를 돌려보내면서 당부한다. ‘너는 노예 오네시모를 잃었지만, 이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오네시모를 맞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영적 아들이 된 오네시모를 친절히 맞아달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렵게 대하는 바울의 편지는 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이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낡은 세계관을 바꾸어 나갔다. 한마디로 노예가 형제가 되는 사건이다. 복음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사랑’ 복음이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인 나를 의인으로 대접해 주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죄의 종, 물질의 종, 죽음의 종과 같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이것은 복음 중의 복음이다.
심지어 주인인 빌레몬에게 부탁하기를 그간 오네시모가 노예로서 행한 잘못과 불의까지 바울 자신의 몫으로 돌리라고 말한다. 자기가 책임을 지고, 배상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18).
예수님은 내 죄값을 대신 계산하신 분이다. 내가 부담해야 할 부채를 탕감하셨다. 용기를 내어 네 자리를 떠나라. ‘네 인생의 부채는 내가 다 갚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3)
오늘은 성서주일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그리스도교는 그 사랑을 닮고, 그 사랑을 전하는 신앙공동체이다.
유대인들은 토라(율법)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편지라고 이해하였다. 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날 낭독할 부분을 읽었는데,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을 특권으로 여겼다.
안셀름 그륀은 성경 66권을 해설하는 <안셀름 그륀의 성경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영혼에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파묻혀 있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의미를 파고드는데 서툴러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멀리 여행을 떠난 가족이 보낸 편지처럼 느껴진다. 지금 눈앞에는 없지만 전달된 편지를 통해 진심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음으로써 그의 사랑을 배울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의 간섭하심을 소망하며 말씀을 대해야 한다. 성경은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보낸 가장 긴 편지인 로마서는 물론 가장 짧은 책 빌레몬서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가 전한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종의 차별과 벽을 허무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오네시모란 한 사람의 노예를 아들로 여기는 그런 인류애적 사랑이다.
빌레몬서는 한 개인에게 보낸 단 한 장짜리 편지글일망정 위대한 성경 66권 중 한 권의 성서라는 당당한 명예를 갖게 되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문서로 된 것만이 아니었다. 변화된 종 오네시모는 편지를 들고 주인 빌레몬을 찾아갔다. 바울의 편지에 담긴 진심은 이제 변화된 인간 오네시모의 삶에 달려있다. 오네시모는 자기 주인에게 그런 변화된 새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 후 50년이 지났다. 유명한 순교자인 이그나티우스는 체포되어 안디옥에서 로마로 이송되었다. 그는 신변을 정리하면서 자기가 보관하고 있던 편지들을 소아시아 여러 교회로 보내어 맡겼다. 편지 중에는 그가 서머나에 머물며 에베소 교회로 보낸 편지도 있었다.
그 편지의 첫 장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의 감독에 대해 높이 평가하며 자랑한다. 놀랍게도 에베소 교회의 감독 이름은 오네시모였다.
그리스도교의 자랑은 무엇인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을 넘어서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며, 노예조차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그 사랑은 얼마나 혁명적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새로운 삶과 세계를 위해 거듭난 존재이다.
만약 오늘의 교회가 이 사랑을 잃었다면 그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교이고, 성경이 말씀하신 복음이다.
나는 색동교회가 더 다정하고, 친밀하며, 환대하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내 허물과 무자격에도 불구하고 나를 고객이나 손님이 아니라, 딸처럼, 아들처럼 대해 주셨다. “내 앞으로 계산하라”(18)고 말씀하셨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의 심복’으로, ‘교회의 심장’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친밀한 은혜와 넉넉하신 사랑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바울의 이 감동적인 편지는
바울이 회심 이후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을 따라서만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 같아요..
"예수님은 내 죄값을 대신 계산하신 분이다. 내가 부담해야 할 부채를 탕감하셨다. 용기를 내어 네 자리를 떠나라.'네 인생의 부채는 내가 다 갚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묵상할수록 은혜가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