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산 秦丹山(1883~미상)】
"1919년 대한국민의회 참모부 산하 군보부 부장, 의군부 참모장
1883년 3월 7일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진학신(秦學新)·진학문(秦學文)이고, 한자를 달리한 진단산(秦檀山·陳柦山)을 썼다.
일찍이 의병으로 활동하며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항일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만주로 이주하였다. 1913년 8월 동녕현(東寧縣) 소수분(小綏芬) 토성촌에 민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호분학교(虎賁學校)에서 이봉조·김희철·김성규 등과 함께 교사로 활동하였다. 호분학교의 교과목은 국어·역사·지리·체육 등이며, 민족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호분학교에서의 교사생활은 1916년 말까지 이어졌다.
1919년 1월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한족회(韓族會) 중심의 대한임시정부(大韓臨時政府)가 수립되었다. 이후 재로한족중앙총회(在露韓族中央總會)가 임시정부 성격을 가진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개편되자, 간부로 참여하였다. 대한국민의회에서 군사실무를 담당한 사람들은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군비총감 비서 노백린(盧伯麟), 참모장 김하석(金夏錫)이었다. 이동휘 등은 대한국민의회의 지부를 건설하는데 관심을 기울였고, 이때 함께 훈춘현 탑도구(塔道溝)에 국민의회 지부가 건설되는 데 앞장섰다.
한편 대한국민의회 소속 독립군을 관할하는 기구로 참모부가 동녕현 삼차구(三岔口)에 설치되었다. 참모부 산하에는 군사통신을 담당하기 위한 기관으로 군보부(軍報部)가 설치되었다. 이때 군보부를 이끌어갈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군보부장으로서, 서울·평양·회령(會寧)·간도·훈춘에 지부를 설치하였고, 지린(吉林)·펑톈(奉天)·상하이(上海)·니콜리스크·파리·워싱턴에 통신연락소를 개설하였다. 이곳을 통해 독립군의 활동 상황에 대해 연락을 취하고 각 지역의 독립군을 지휘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독립군의 활동을 외국 신문에 홍보하는 활동을 펼쳤다.
동시에 국내에서 전개되었던 만세운동이 간도지역에서도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동녕현 삼차구에서 약 4,000명이 참석한 독립선언발표식을 주도하였다.
이후 훈춘현으로 가는 오주혁(吳周爀)·황병길(黃炳吉)과 만주 및 러시아 방면에 있는 의병 출신 인사들을 모아 훈춘 태평구에서 훈춘에 있던 독립군들과 합류한다는 내용을 논의하였다. 태평구에 모인 독립군들은 기회를 보아 국내로 진입한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것을 위해 3,000여 명의 장정을 모집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며, 모은 인원들을 대상으로 삼차구에서 훈련을 시작하고 군자금 및 무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동북 만주에 흩어져 있던 의병들을 모아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는 데 앞장섰다. 의군부의 목적은 흩어진 의병부대를 모아 항일 독립전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옌지현 명월구(明月溝)에서 창립되었으며, 이때 이범윤(李範允)·최우익(崔友翼)·김청봉(金淸鳳)·김현규(金鉉圭) 등과 함께 단체 설립을 주도하였다. 의군부의 조직은 본부와 중부로 나뉘었는데 참모장 역할을 맡아 총재 이범윤, 총사령 김현규, 총무부장 최우익, 군사부장 김청붕, 외교부장 신입(申立), 통신부장 지우강(池雨江) 등과 함께 본부를 이끌어가는 주요인물이 되었다. 의군부 참모장으로서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일제의 주요기관을 파괴하는 활동에 앞장섰다.
한편 1919년 5월 5일 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보고한 일제 측의 문서에 따르면 왕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서 충렬대(忠烈隊)가 조직되었는데, 이 단체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상관없이 결사적으로 일제에 반항하고 그 뜻을 관철하려고 하는 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이 단체의 근거지와 주도자로 훈춘현 탑두구(塔頭溝) 황병길과 함께 지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계된 활동도 전개하였다. 1920년 1월 니콜리스크에 임시정부 군정부 지부(支部)가 설치되었다. 상회사로 위장한 군정부 지부에서 지부장 강양오(姜良五)·김찬오(金燦五)·강국모(姜國模)·김진(金震)·이용(李鏞) 등과 함께 독립전쟁을 위한 무기를 구매하고 중개하는 데 앞장섰다.
그해 8월 봉오동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독립군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일제와 중국 군벌은 협의 하에 한국독립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군뿐만 아니라 중군 지방군대의 공격을 받게 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당시 의군부도 중국 지방군과 일본군와의 전투를 벌였고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과 중국 지방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의군부 대표들이 화룡현 삼도구에서 모여 회의를 가졌다. 이때 의군부의 대표로 지장회(池章會)와 함께 참여하였다. 이 자리에서 함경도 무산 방향에 있는 버들고개라고 불리는 유령(柳嶺) 부근을 담당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의군부 및 독립군들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1년 10월 영안현 고산둔(孤山屯)에서 일제가 심어놓은 밀정에 의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