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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88회>
씬 1 왕건의 집 사랑(밤)
왕건과 아지태, 태평, 임춘길들이 함께 해 있다. 유씨가 그들에게 차
를 따라 준다.
아지태 허허, 고맙소이다, 부인.
유씨가 물러가고, 아지태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연다.
아지태 지난 번에 나는 왕장군을 한 번 꼭 만나봐야겠다고 여기 의형
대에 있는 의형대령에게 말한 적이 있소이다.
왕건 말씀하시지요.
임춘길 아학사어른께서는 지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이 나라 정국
에 대해서 왕장군과 말씀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왕건 나는 군인일뿐이오. 전장터만 돌아다녔는지라, 정치에 대해서
는 아는 것이 없소이다.
임춘길 애써 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장
군께서는 이 나라에 영웅이십니다. 그야말로, 폐하 다음 자리
에 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태평 .......
아지태 이곳 철원으로 오기 전에 우리는 잠시 옥사에 함께 갇혀 있었
소이다. 나는 그때 장군께 한 말이 있소이다. 기억 나시오이
까?
왕건 하나도 모르겠소이다. 나는 그때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
문이오. 모든 것이 사악한 것들 투성이니까 말이오.
아지태 하하하,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기회를 잡지 못하면, 모두
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오.나는 오늘 그것을 깨우쳐 주려고 왔
소이다.
왕건 더 할 말이 있으면 계속하시구료.
아지태 나는 그때 옥사에서 말했소이다. 그날의 일을 꼭 기억하라고
말이오. 다시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했소이다. 그리
고, 권했소이다. 대권이 눈앞에 왔으니, 받으라고 말이오.
왕건 ........(노려 본다)
태평 ..........?
아지태 본래 옥좌는 하늘이 내리는 것인데, 그 주어진 것을 외면하면
화를 낸다고 했소이다. 그러나, 장군은 받지 않았고, 또 이렇
게 세월이 갔소이다. 그리고, 기회가 다시 왔소이다. 도선대
사가 예언한 그 기회 말이오.
왕건 닥치지 못할까? 지금 누구를 모함에 빠트리려고 그런 말을 하
는가?
아지태 하하하, 나는 누구보다도 왕장군 당신을 잘 압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언젠가는 옥좌에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허나, 그것
은 나 아지태의 도움 없이는 어려울 것이오.
태평 이 미련한 촌사람이 하나 묻겠습니다.
아지태 말씀하시게.
태평 무슨 저의를 갖고, 우리 주군께 그리 말씀을 하시는지요? 무
엇을 바라고 말이오이까?
아지태 바란다...... (잠시 생각하다가) 그렇지. 하하하... 바라는
게 없으면, 어찌 여기까지 왔겠는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
네. 황제의 면류관은 왕장군께서 쓰시고, 나는 그저 그 손발
이 되어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고 싶다고 말이네.
왕건 .........
아지태 말하자면, 왕건과 아지태가 손을 잡고 역사의 유례가 없는 대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런 기록 말일세.
태평 이미 아학사어른께서는 오래전부터 지금의 폐하를 만나시어,
역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아옵니다.
아지태 물론, 그랬지. 그때는 분명 지금의 폐하께서 진정한 미륵이셨
고, 백성들이 열망하는 주인이셨기 때문이지. 그러나, 지금은
달라. 나는 혼백을 잃어버린 미치광이와 일하고 싶지 않네 그
려.
모두들 .........?
아지태 지금의 폐하와는 함께 중원으로 갈 수 없게 되었어. 마차는
두 바퀴가 하나가 되어 굴러야 하는데, 그 하나가 절단이 나
버렸단 말이야.
왕건 (한참 보다가) 일의 결과보다는 어떻게 했느냐 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오. 세상은 그것을 신의라고 하오.
아지태 신의가 좋기는 하지만, 목적을 이루어주지는 않소이다.
왕건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을 간웅이라고 하는 것이오. 머리는 있
으되, 나눌 가슴이 없고. 학문은 가지고 있으되, 그 씀씀이가
모두 사악하니, 어찌 목숨을 나눌 수 있겠소이까? 돌아가시구
료.
아지태 분명, 말했소이다. 지난 번에 말이오. 기회는 다시 오기 어렵
다고. 나는 지금이 기회일 것 같아 장군께 온 것이외다.
왕건 그렇소. 분명, 폐하께서는 정상이 아니시오. 그리고, 지금이
기회일수도 있을 것이오. 허나, 나라와 폐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을 이끌어 준 그 분
을 버리려 하고 있소이다.
아지태 약하고 모자라면 버려지게 되어 있는 것이오. 그것이 세상 사
는 순리오. 왕장군도 약해지고 모자라지면, 나는 또 버릴 것
이오. 자, 잘 생각하고 답을 주시구료. 가급적, 빠른 시일 안
에 말이오. 나는 장군에게 옥좌를 드릴 수 있소이다. 아시겠
소이까? 옥좌 말이오.
왕건 장기를 다 둔 것 같소이다. 이제, 그만 판을 걷고 싶은데....
아지태 (미소) 오늘 밤 잘 생각하시구료. 옥좌를 잡을 것이냐, 버릴
것이냐, 이 나라를 구할 것이냐, 아니면 이름 없이 죽을 것이
냐? 하하하하... 자, 나도 이만 장기판을 접겠소이다.
아지태가 계속 껄껄 웃고 있다. 왕건은 냉담하게 아지태를 본다. 태평
은 생각에 잠겼고, 임춘길은 왕건과 태평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 그들의 표정에서 디졸브....
씬 2 저자거리
아지태와 임춘길이 가고 있다.
임춘길 아학사어른, 괜한 걸음을 하신 것 같사옵니다. 전혀 동요가
없지 않사옵니까?
아지태 황제가 미쳤다는 것은 세상도 알고, 저 왕장군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답은 뻔한 것이다.
임춘길 뻔한 것이라니요?
아지태 미친 사람이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
면, 누군가는 그리로 가서 새 주인이 될 것이다. 왕장군이 아
니 받으면, 다른 사람이 말이다.
임춘길 다른 사람이라고 하셨사옵니까?
아지태 허허허, 그래. 오늘 그래서 마지막 기회와 경고를 준 것이야.
아니 받으면, 제 복을 발로 차는 것 뿐이야.
임춘길 이러다가 우리가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아지태 위험해지기 전에 또 좋은 길을 찾으면 될 게 아닌가? 하하하,
가세.
그들 그렇게 사잇길로 돌아서 사라져 가고...
씬 3 왕건의 집 사랑
왕건이 생각에 잠겨 있다. 태평이 눈치를 보다가 말한다.
태평 저 아지태라는 사람은 분명 예삿사람이 아니옵니다.
왕건 맞아, 그래서 간웅이라고들 하지. 똑똑하기는 한데, 사악하단
말이야.
태평 (미소)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똑똑하고 어진 것보다는
사악한 것이 낫사옵니다.
왕건 무슨 소린가?
태평 어진 사람은 좋은 줄 알면서도 큰 일을 뒤로 미루옵니다. 의
리와 신의 때문이지요. 하오나, 사악한 사람은 결단이 빠르옵
니다. 그 이익 때문이지요.
왕건 이익이 의리보다 앞서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태평 허나, 고금의 역사를 보면 혁명이 일어나거나 왕조가 바뀔 때
에는 의리 같은 것은 없었사옵니다. 기억하시오소서.
왕건 (화를 내듯) 자네답지 않은 말이네 그려.
태평 다 주군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이곳을 떠나시오소서.
아니면, 아지태와 손을 잡으셔야 하옵니다. 그것이 사실 길이
시옵니다.
왕건 이보게, 태평이?
태평 이 몸은 잘 아옵니다. 주군께서는 결코 불의를 저지르며, 대
업을 도모하실 분이 아니시옵니다. 아지태가 말한 것처럼 지
금이 분명 기회는 기회이옵니다. 하오나, 주군께서 이를 탐탁
치않아 하시니, 어찌하겠사옵니까? 이곳을 떠나시오소서. 빠
르면 빠를수록 좋사옵니다.
왕건 .......음....... (눈을 감는다)
씬 4 동 집 안채 방
세 여인이 모여 있다.
유씨 아지태라는 사람이 왜 왔을꼬?
오씨 장기를 두러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수인 그것이 무슨 장기일까요?
유씨 무슨 장기라니?
수인 어지러운 세상이옵니다. 중요한 국사를 논하러 오신 것이 아
니시겠습니까?
오씨 (한참 보다가) 난 자네만 보면 가끔씩 깜짝 깜짝 놀란다네.
겉으로는 자네만큼 얌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헌데, 생각
하는 것은 제갈공명보다 더 넓고 큰 것 같아.
수인 예? 아니, 형님.
오씨 호호호, 그렇다는 것일세. 그렇다고 너무 앞서지 말게. 생각
지 않는 재앙이 올 수도 있어.
수인 예?
오씨 .......(묘한 미소)
씬 5 황궁 외경(낮)
씬 6 동 내원
종간과 은부가 마주해 있다.
종간 아지태가 왕건의 집을 다녀갔다?
은부 예, 내원어른. 뭔가 있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종간 (생각하다가) 그들은 물과 기름이야. 크게 걱정할 것 있겠는
가?
은부 허지만.... 이건 의외가 아니옵니까?
종간 아무리 날뛰어도 그들은 우리 손바닥 안에 있어. 이 철원에
있는 한은 말이야. 허지만, 너무 안심을 해서도 안되지. 계속
감찰하도록 하게.
은부 예, 내원어른.
종간 (한숨) 그보다도 폐하께서는 날이 갈수록 환후가 더 깊
어지고 계시네. 이렇게 되면 아니되는데....
은부 소장도 걱정이 되기보다는 이제 겁이 나옵니다. 어떻게 한 둘
도 아니고, 백여명이 넘는 목숨들을 그렇게......
종간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해. 이대로는 얼마 더 못 가. 도대체,
누가 이 암담한 현실을 바로 잡아 줄 수가 있을꼬...? 우리는
이미 한계를 느꼈고..... 대책이 없네, 대책이...
은부 (생각하다가) 큰 효과야 없겠지만....
종간 말해보시게.
은부 폐하의 옆에 있는 그 신동 말이옵니다.
종간 최응이 말인가?
은부 예,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폐하의 은혜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
니옵니다. 그 어린아이가 학문도 박식하거니와 처세 또한 모
가 남이 없이 담담하다 하옵니다.
종간 폐하께서는 그 아이를 성인이라고까지 하셨다지?
은부 그러게 말이옵니다. 그런대로 그 최응이가 폐하를 잘 보좌해
올린다면.....
종간 (끄떡인다) 나쁠 것은 없지. 한번 만나 볼 필요가 있어. 내가
좀 보잔다고 조용히 선을 넣게나.
은부 알겠사옵니다, 내원어른.
종간 갈수록 산일세. 너무 암담해. 너무 어려워....
씬 7 대전 복도
씬 8 동 대전 안
궁예가 올려온 장계를 들쳐보다가 인상을 찌푸린다. 그 앞에 유천궁과
복지겸이 앉아 있고, 옆으로 저만큼 최응이 보인다.
궁예 이게 무슨 소리야? 나주가 위험하다고?
유천궁 예, 폐하. 오래전부터 견훤왕이 직접 그곳으로 나와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하옵니다.
궁예 견훤왕이 말인가?
복지겸 예, 폐하. 아무래도, 지난 번에 조령과 죽령을 잃은 이후에
전략을 바꾼 듯 하옵니다.
궁예 아, 나주에는 김언이라는 장수가 나가 있지 않은가?
복지겸 그렇기는 하오나..... 군사가 매우 적고, 형편이 열악하옵니
다.
궁예 왜?
복지겸 견훵왕이 그만큼 많은 군사를 동원하고 있고, 곳곳에 공격로
를 닦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신이 보고를 듣기로는, 이미 그
곳에 수많은 전함들이 바다와 강을 메우고 있고, 전 백제의
명장들이 모두 몰려들고 있다 하옵니다.
궁예 그래.....? 대체, 우리가 얼마만큼 불리한 것이야?
복지겸 말로 하기 어려울 만큼 힘이 든다 하옵니다. 전함들도 그쪽이
두 배는 많고, 군사들도 갑절이 많다 들었사옵니다.
궁예 (생각하다가) 그럼 어쩌자는 것이야?
유천궁 대비를 하셔야 하옵니다. 송악에 있는 전함들과 군사들을 이
동시켜 그곳으로 보내야 할 줄 아옵니다.
궁예 장수는 누가 가고?
복지겸 아무래도 다시 수전에 밝은 왕건 장군이 적임이라고 생각되옵
니다만은....
궁예 무슨 소리야? 아, 왕장군은 북벌의 총사를 맡기려고 하고 있
는데...
유천궁 백제의 왕까지 직접 나온 전선이옵니다. 우리가 세 또한 갑절
이나 불리하옵니다. 왕장군이 가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궁예 이런, 이런..... 이렇게 허약해가지고서야..... 왕건이라, 왕
건이라.....
궁예는 오랫동안 고민이 많다. 머리를 저으며, 갈등한다.
복지겸 중원을 정벌하는 북벌군의 총사는 지금의 환선길 장군으로 족
하옵니다. 만약에 이번에 견훤왕에게 나주를 내주게 되면, 폐
하의 위엄이 큰 상처를 입게 되시옵니다.
궁예 그건......그렇겠지.
유천궁 우선, 급한 불을 끄시고, 왕장군을 다시 부르시오소서. 북벌
의 총사를 맡기시는 것은 그 때 가서도 늦지 않사옵니다.
궁예 (안타깝다) 왜, 이렇게들 손발이 안 맞는 것이야? 왜....? 그
래, 결국 이번에도 또 왕건이란 말인가? 이래가지고서야 왕건
이 없는 전쟁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두사람 망극하옵니다.
궁예 답답하구먼, 답답해. (다시 장계 보다가 도리질) 그래, 이렇
게 전선이 화급하게 되었단 말인가? (사이) 왕장군을 좀 들라
고 하게.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왕장군을 들라고 전하여라.
최응 예, 폐하.
씬 9 동 황궁 황후전
연화가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겨 있다. 제조상궁과 슬이가 보고 있다.
연화 진내관이 직접 왕장군을 만나기 위해 기다린다고 하였느냐?
제조 예, 황후마마.
연화 조심해서 일을 처리해야 할 터인데....
제조 그리 할 것이옵니다. 다행히 방금 전 폐하께서 내군을 시켜
왕장군을 입궁하라고 하셨다 하옵니다.
연화 그래? 무엇 때문에?
제조 자세한 것은 모르오나, 광치나 유장자와 병부령 복지겸이 다
녀간 이후 그리 하셨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무슨 일이실꼬....? 폐하의 말씀만 나오면, 이렇게 가슴이 두
근거리니....
씬 10 왕건의 집 외경
씬 11 동 집 사랑
왕건이 생각에 잠겨 있다. 그 앞으로 세 가신과 태평, 왕신이 함께 해
있다.
유금필 아지태라는 사람에 관해 들었사옵니다. 주군, 소인들도 알 것
은 다 아옵니다.
왕건 무슨 소린가?
유금필 지금은 분명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사옵니다. 누군가가 현명
한 결단을 내려 나라를 구해야 하옵니다.
왕신 그렇사옵니다. 아지태까지도 도선대사의 예언을 알고 있사옵
니다.
능산 폐하는 망령이 드셨사옵니다. 회복하기도 어려울 것 같사옵니
다.
박술희 .......
왕신 세상이 모두 형님을 이 시대의 영웅으로 받들고 있사옵니다.
죽도록 충성해서 얻은 결과는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왕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게야? 왜 이리 정신 없는 말들을 하
고 있어? 그만들 하게.
태평 그렇사옵니다. 이미 주군께서는 전장터를 택하셨사옵니다.
모두들 .............?
태평 주군께서는 불의를 싫어하시옵니다. 또한, 아지태 같은 간악
한 무리에 의해 대업을 도모한다는 자체를 심한 굴욕으로 생
각하시옵니다. 모쪼록, 가신들께서 주군을 올바로 이끄시는데
힘들을 모아야 할 것이옵니다.
왕건 나라가 어려운 것을 기회로 하여 자신의 야망과 이득을 찾으
려 한다면, 누군가가 또 그러한 전철을 밟게 될 것이야. 나는
폐하께 충성할 것일세.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 결심은 변함
이 없어. 알겠는가?
모두들 .......... (대답이 없다)
왕건 아느냐고 물었어?
모두들 예, 주군.
왕건 다시는 그 불경스러운 말들을 입 밖에 내지 말게. 예언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들도 모두 잊어 버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장일 (E) 문을 여시오. 황궁에서 왔소이다.
씬 12 동 집 대문 앞
장수장이 문을 열면, 장일이 내군 두어명과 함께 와서 서 있다.
장일 내군에서 왔소이다. 황명이시오.
장수장 무슨 영을 뫼셔 오셨소이까?
장일 왕장군께서는 즉시 입궁하랍시는 황명이시오.
그때, 왕건이 가신들과 함께 나온다. 장일이 군례를 올리며, 다시 말
한다. 부인들도 보인다.
장일 장군, 폐하의 영을 뫼셔 왔사옵니다. 즉시 입궁하랍시는 황명
이시옵니다.
왕건 알겠네, 장부장. 입궁 차비를 하겠네. 이보시오, 부인.
유씨 예, 서방님.
왕건 입궁 차비를 차려주시구료.
유씨 예....
왕건 자네들도 병부에 회의가 있지 않는가? 함께 나가세.
그들 예.......
씬 13 황궁 내원
종간, 최응이 마주해 있다. 최응이 그 담담한 표정으로 조용히 차를
들고 있다.
종간 차 맛이 어떤가?
최응 아주 향이 그윽하옵니다. 좋은 것 같사옵니다.
종간 이 차가 신라 때부터 우리 나라에 보급되었다고 들었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늘 이 차와 함께 살지. 이것이 내
유일한 동무야.
최응 내원께서 차를 즐겨하신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사옵니다.
소인도 그러하옵니다. 차도 워낙 종류가 많은지라.....
종간 그렇다네. 이 세상에 많은 인간들의 종류가 있는 것처럼 차
또한 그러하이. 그 잎이 어리어 부드럽고 순한 차 맛이 있는
가 하면, 억세고 떫고 맛이 독한 것이 있고, 허허허.... 그렇
단 말일세.
최응 예, 내원어른.
종간 어떤가? 요즘도 폐하께서는 독주를 많이 드시는가?
최응 .......?
종간 많이 아프신가 그 말일세. 우리끼리 다 아는 얘기가 아닌가?
최응 (차 마시며) 아주 심각하신 것 같사옵니다.
종간 그래도, 자네가 옆에서 많이 챙겨주니, 고마운 일일세.
최응 소인이 아무리 잘 한들 내원어른만 하겠사옵니까?
종간 허허허, 그렇게 말해주니, 몸둘 바를 모르겠구먼. 그래, 자네
보기에 저 폐하의 환후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최응 무엇을 아시고 싶으시옵니까?
종간 (꿈틀한다) 어떻게 하면, 폐하의 저 병을 좀 더 자제하게 하
실 수 있을까, 답답해서 하는 말이네.
최응 그것보다는 지금의 이 나라를 더 먼저 걱정하셔야 하지 않겠
사옵니까?
종간 이 나라는 바로 폐하의 것이고, 폐하 자신이실세.
최응 폐하는 미륵이셨사옵니다. 하오나, 지금은 모두들 무서워 하
는 분으로 변하셨사옵니다. 병 때문이옵니다. 누구도 그 병을
다스리지 못하옵니다.
종간 그렇다네. 그게 마음이 아파. 얼마나 위대하고 크신 분이셨는
가?
최응 내원께서 이 나라를 구하시고, 폐하를 구하고자 하신다면 먼
저 그 충분한 준비를 하셔야 하옵니다.
종간 준비라니?
최응 무리한 북벌 준비를 중지하시고, 아직도 충성이 변치 않는 왕
건 장군과 손을 잡으셔야 하옵니다.
종간 왕건....? (사이) 아지태가 아니고 왕건인가?
최응 백성이 신뢰하고 폐하께서 신뢰하시고 실은 내원어른께서도
신뢰하시옵니다.
종간 ........최응 다만, 왕장군께서 과분하게 지나친 기대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걱정이 아니겠사옵니까?
종간 (신기하다) 비록, 신동이라고 하지만, 자네는 아직 어려. 헌
데, 어떻게 그렇게 세상을 훤히 꿰고 있는가?
최응 살 길은 그것 뿐이옵니다. 이 나라가 살고, 폐하께서 사시고,
또 내원어른과 왕장군이 함께 사는 길 말이옵니다. 길은 가까
운 곳에 있사옵니다.
종간은 찻잔을 든 채 눈을 감는다. 괴로운 것이다.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종간 그래, 일리 있는 말일세. 그러나, 이미 늦었어. 사람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지. 우리는 운명적으로 맞지가 않게 되어
있어. 운명적으로 말일세. (사이) 언젠가.... 누군가도 내게
그것을 권한 적이 있었어. 손을 잡아 보라고 말이야. 헌데,
안돼. 잡으려고 하면, 어느새 그는 나와 폐하의 위로 올라가
고 있단 말일세. 그러니, 어찌 손을 잡겠는가? 자네는 그것을
몰라.
최응 선택은 오로지 내원어른께서 하시는 것이옵니다. 소인이 드릴
말씀은 그것 뿐이옵니다.
종간 자, 차 드시게. 이런 이거 다 식었구먼 그래. 자네는 하늘이
낸 사람이야. 폐하께서도 자네를 성인이라 하신다지?
최응 과분한 말씀이시옵니다.
종간 자네는 듣자하니, 고기나 생선을 일절 먹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나물이나 죽만 먹고 산다지?
최응 하하하, 차도 많이 마시옵니다.
종간 고맙네. 우리 자주 좀 만나세나. 그리고, 폐하를 도와드리게.
부탁드리네.
최응 제가 어찌 누구를 도울 수 있겠사옵니까? 열심히 하겠사옵니
다.
종간 고맙네. 정말 고맙네.
씬 14 철원 저자 길
왕건이 가고 있다. 장수장과 그 휘하들, 그리고 태평이 보좌해 가고
있다. 왕건은 생각이 많다.
태평 주군, 날씨가 아주 차옵니다.
왕건 그런 것 같네.
태평 무얼 그리 생각하시옵니까?
왕건 사람 사는 것이 참으로 뜻대로 아니 되는 것 같아서 말이네.
태평 무엇이 말이옵니까?
왕건 내가 처음 폐하를 만나 뵈었을 때, 나는 결심한 것이 있었네.
이런 분이라면 얼마든지 내 인생과 목숨을 내드려도 좋다고
말일세.
태평 .......(미소)
왕건 그 옛날 도선대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모든 것은 하
늘이 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이, 한숨) 폐하를 살리실 길이 없을까? 안타까
우이.... 폐하는 결코 약하신 분이 아니신데.... 어찌하여 그
런 병에 걸리셨을꼬.......
태평 사람의 앞날을 누가 알겠사옵니까? 그보다도 주군을 부르신
이유가 있으실 것이옵니다. 십중팔구 전쟁이야기가 나올 것
같사옵니다.
왕건 그렇겠지.
태평 이번에 만약 나주를 가시게 된다면, 둘째 마님을 뫼시고 가시
오소서.
왕건 전장터에 말인가?
태평 소인이 알기로는 백제국의 전세가 워낙 강성하다 들었사옵니
다. 장인 되시는 다련군의 도움이 크게 필요할 것이옵니다.
왕건 .......?
태평 한 번 깊이 생각해주시오소서.
씬 15 황궁 병부
복지겸과 환선길, 이흔암, 배현경, 홍유, 유금필, 능산, 박술희, 김락
천부장, 왕식렴들이 모여 있다.
복지겸 이번에 광치나 어른과 더불어 대전에 갔었소이다. 물
론, 나주에 관한 일을 상주해 올리기 위해서 말씀입니다.
배현경 좋은 하교가 있으셨습니까?
복지겸 우리는 모두 왕건 장군을 다시 나주로 보내자 하였는데, 폐하
께서는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소이다.
이흔암 그러면, 허락을 아니하셨단 말이오이까?
환선길 아, 왕장군은 이 사람과 함께 북벌 준비를 해야 하는데....그
리로 보내자하니 그러실 수 밖에요.
홍유 그러나 나주에는 견훤왕이 내려와서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다
하오이다. 병력이나 전력 면에서 우리가 형편없이 밀리고 있
다고 들었소이다. 당연히 왕장군이 가셔야 할 것이오이다.
김언 동감이올시다. 사실, 북벌은 급한 것이 아니고, 나주 전선이
더 화급한 것이 아니겠소이까?
복지겸 이보시오, 수단령.
왕식렴 예, 병부령 어른.
복지겸 누가 나주 방어군의 총사가 되든간에, 이번 전투는 해전이 될
것이오. 수군들의 싸움 말이오. 준비가 철저해야 할 것이오.
왕식렴 알고 있사옵니다.
복지겸 뭐, 바다와 물에 대해서는 수단령 만큼 아는 사람이 누가 있
겠소이까? 그러나, 백제군의 군세가 워낙 강성하다하니, 걱정
이 돼서 하는 말이오.
홍유 이번에 소장은 왕장군을 따라 종군하고 싶사옵니다. 가능하겠
사옵니까?
배현경 아, 소장도 가고 싶소이다.
김락 소장도 가고 싶소이다.
복지겸 하하하, 물론 전투에 따라 장수들은 적재적소에 배치가 되어
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도 장계를 통해 일단 올려놓았소이
다. 그리고, 참 유장군.
유금필 예.
복지겸 그동안 계속 왕장군을 수행해왔는데, 이번에는 좀 다른 전선
으로 가주셔야겠습니다. 박술희 장군도 마찬가지시고,
유금필 그렇사옵니까?
복지겸 폐하의 영이십니다. 좋은 장수들은 여러 전선을 경험해야 한
다는 영을 내리셨습니다.
두사람 ........?
복지겸 유장군은 충주 쪽으로 가시고, 박장군은 신라와의 경계로 가
주셨으면 합니다.
박술희 군령이라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복지겸 자, 일단 우리는 이쯤에서 폐하의 하교를 기다리십시다. 지금
쯤 아마 왕장군이 폐하를 알현하고 계실 것입니다.
씬 16 대전
궁예와 왕건이 마주 앉아 있다. 역시 찻상이 아닌, 주안상이 놓여 있
다. 최응이 여전히 저만큼 앉아 있다. 궁예가 술을 따른다.
궁예 자, 한잔 들게.
왕건 예, 폐하.
궁예 병부령하고 광치나가 말이야, 아우를 나주전투에 보내 달라는
구먼.
왕건 .......
궁예 나는 일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북벌을 준비해주기를 바라는
데.... 전선이 급하다는 게야. 견훤왕이 직접 나와 있다는구
먼.
왕건 이야기 들었사옵니다.
궁예 견훤왕도 어지간히 급한 사람이야. 아주 다혈질인 것 같아.
지난 번에는 조령 전선에 나오더니, 이번에는 또 나주로 왔다
는 게야. 그 사람도 가만히 두고 보니, 싸움께나 좋아한단 말
이야. (사이) 아, 들어. 뭐 하는가?
왕건 예, 폐하.
궁예 북벌이 급한데....... 정말 급한데........ (마시며) 자꾸 이
런 일들이 발목을 잡는단 말이야. 길은 바쁜데, 발목을 잡아.
왕건 (마시고 한참 말이 없다가) 신을 나주로 보내주시오소서. 어
찌하겠사옵니까? 그곳을 잃을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궁예 글세.....뭐, 가기는 가야겠지. 사람이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허지만, 말이야. 이런 군대 가지고 저 중원을 도모하려는 내
가 서글퍼. 황해를 지나 대 군단을 이끌고 막바로 당나라로
들어가는 것이야. 한편으로는 발해와 함께 손을 잡고, 거란을
밀어 부치고......
왕건 .......
궁예 서글퍼. 이러다가 정말 모든 게 꿈으로 끝나겠어. 나는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저 아율라보기가 한 번 보고 싶어. 틀림없
이 나와 비슷한 인물일 게야. 지금 내가 저 자를 밀어 부치지
않으면, 저 자는 언젠가 이리로 내려 올 것이야. 나는 그걸
막자는 것이야. 기선을 제압하자는 것이지. (마시며) 지금 내
얘기 듣고 있는가, 아우?
왕건 예, 폐하.
궁예 이렇게까지 말해도 내 마음을 이해 못하겠는가?
왕건 (한참보다) 폐하,
궁예 또, 왜?
왕건 신을 나주로 보내주시는 것이옵니까?
궁예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는가? 가야지, 뭐.
왕건 하오면,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신의 충정을 말씀드려도 되겠
사옵니까?
궁예 허허, 이보게 아우, 대체 무슨 말을 또 하려고 하는 게야?
왕건 폐하, 폐하께서는 지금 중한 환후를 앓고 계시옵 .
궁예 .....?
왕건 더 이상 숨기지 마시오소서. 내원어른을 믿으시오소서. 그 사
람은 비록 신과는 거리가 있사오나, 마지막 충신이옵니다.
궁예 ........ (노려본다) 무슨 소리야?
왕건 아지태를 멀리 하시고, 잠시 휴식을 취하시오소서. 북벌 준비
를 잠시 중단하시고, 조정 일에 대하여 관여치 마시오소서.
최응 .........(꿈틀하며 본다)
왕건 그리하시오소서, 폐하. 이 아우의 진심어린 충언이옵니다.
궁예 그만 하게. (참으며) 그만해. 지금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우
는 죽었어. 알겠는가? 죽었어.
왕건 형님!!!
궁예 .........?
왕건 (엎드려 절한다) 이 아우가 형님께 다시 말씀을 올리옵니다.
아직은 시간이 있사옵니다. 돌아오실 시간이 있사옵니다. 지
금이라도 잘 하실 수 있사옵니다. 돌아오시오소서.
궁예 ........(강하게 노려본다)
왕건 형님 폐하와 제가 어떻게 맺어진 형제이옵니까? 왜 백성들의
저 원성과 한숨 소리를 듣지 못하시옵니까?
궁예 닥쳐! 그만 닥치란 말이야. 닥쳐!! (가슴을 부여잡는다, 아프
다 독주를 마신다) 닥치라고 하였어.
왕건 이 나라 백성들에게는 하늘 같은 어버이시고, 소신에게는 형
님이시옵니다. 형님 폐하, 아우의 부탁을 들어주시오소서. 그
환후를 다스리셔야 하옵니다. 하실 수 있사옵니다. 형님이라
면 하실 수 있사옵니다.
궁예 아우야, 그만 하라고 하지 않느냐? (술상을 집어 던져 버린
다)
씬 17 대전 밖
내관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모두 놀라서 어쩔줄 모른다.
궁예 (E) 닥치라고 하였어.
씬 18 동 대전 안
궁예 그래, 나는 아프다. 그러나, 할 일을 못하지는 않아. 너는 내
유일한 아우야. 나는 너의 형이고. 그래 나는 아프다. 허나,
나는 아프기 때문에 갈 길이 더 바빠. 날 보고 이 모든 것을
놓으라고? 어떻게? 어떻게 놓아? 누구를 믿고 놓아?
왕건 형님, 믿으시오소서. 돌아보시면, 형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자들은 아직도 많사옵니다.
궁예 없어. 봉사에게 눈 먼 소를 맡겨봐. 어디로 가겠는가? 밭은
갈지 못하고, 강물로 들어가. 알겠는가?
왕건 왜 이리 되셨사옵니까? 형님께서 왜 이리 되셨사옵니까? 왜
그렇게 사람들을 믿지 못하시옵니까?
궁예 더 이상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말게. 내가 관심법을 시작하
면, 그때부터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더 말하지 말아.
왕건 형님 폐하...... (운다)
궁예 나는 좋게 술이나 한 잔 하려고 하였는데..... 흥이 다 깨져
버렸어. 지금 즉시 병부로 가서 관인을 받게. 그리고, 나주로
가.
왕건 형님 폐하..... (계속 흐느낀다)
궁예 그곳을 다녀오면 북벌이야. 모든 준비는 아우가 맡는 것이야.
가라. 어서, 가란 말이야! 어서가!!
눈물을 흘리는 표정에서 디졸브.....
씬 19 황궁 마당
담벼락으로 노을이 지고 있다. 바람이 황궁 마당을 쓸어 가고 있다.
왕건이 대전쪽에서 나와 전각 하나를 돌아 문쪽으로 막 가고 있는데,
어느 전각에서 숨어 있던 진내관이 급히 왕건을 잡아 끈다.
왕건 아니, 진내관이 아닌가?
진내관 예, 장군.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오랜만이옵니다.
왕건 여기서 무얼 하는가?
진내관 소인이 좋은 차를 하나 구하였길래, 한 잔 올리고 싶어서 기
다리고 있었사옵니다. 함께 가시겠사옵니까?
왕건 허허, 글세.....
진내관 따라 오시오소서. 소인이 뫼시겠사옵니다.
왕건 허, 이런.......
왕건은 마지못해 진내관을 따라 간다. 진내관은 눈치를 살피며, 다시
어느 전각 사이를 돌아 그렇게 사라지고..... 그들이 사라지면, 내군
하나가 묘한 시선으로 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씬 20황후전 복도(밤)
진내관과 제조상궁이 서로 눈치를 보며 서있다.
씬 21 동 황후전 안
왕건과 연화가 보고 있다. 슬이가 조심스럽게 이들을 보며, 차를 내놓
는다.
왕건 참으로 오랜만에 황후마마를 뵙는 것 같사옵니다.
연화 저도 그렇습니다.
왕건 그동안 별고 없으셨사옵니까?
슬이 ......
연화 그렇습니다. 저야 궁안에만 묻혀 있는 몸입니다. 별일이야 있
겠습니까? 왕장군께서는 여러가지로 나라에 많은 공을 세우시
고, 또한 집안에도 경사가 있었다 들었습니다.
왕건 예?
연화 세번째 부인을 맞으셨다구요? 미처 인사도 할 경황이 없었습
니다. 감축드립니다.
왕건 황공하옵니다, 황후마마.
연화 그래야지요. 아무쪼록 왕장군께서 만사가 다 형통하셔야지요.
늘 그렇게 소원해왔답니다.
왕건 망극하옵니다.
연화 (한숨) 사실 그동안.... 의논 드릴 일이 많았습니다. 세상도
많이 변하였고, 사람들도 변했습니다.
왕건 ........
연화 특히나, 폐하께서는 너무도 많이 변하셨습니다. 알고 계십니
까?
왕건 .....
연화 하긴, 지금도 대전에서 나오시는 길이 아닙니까?
왕건 그러하옵니다.
연화 나라는 궁핍하고, 백성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
쟁은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고, 힘에 겨운 북벌까지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인네가 궁중에서 무얼 알겠습니까만은 두렵습니
다.
왕건 황후마마, 폐하께서 잘 하실 것이옵니다.
연화 그렇지가 않습니다. 죄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도 무더기로 죽
어가고 있습니다. 고승 대덕들도 죽이시고, 신료들도 죽이시
고, 또 신라의 포로들도, 백성들도 마구 죽이시는 폐하이십니
다.
왕건 .......(한숨)
연화 신료들은 모두 입을 다문 지 오래되었습니다. 폐하를 가장 가
까이 모시는 내원도 그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장군을 뵙고자
한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왕건 신이 무슨 도움이 되겠사옵니까? 신 또한 폐하의 충직한 신하
일 뿐이옵니다.
연화 진정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충신이라면, 이 어려운 현실을 못
본 채 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장군께서 도와주시어요.
왕건 무얼 말이옵니까?
연화 이 조정에 남으시어, 폐하를 바로 잡아 주십시오. 오직 장군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왕건 신은 이미 나주 전장터로 가라는 영을 받았사옵니다.
연화 전장이 급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직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
다. 폐하께서는 정신을 놓으셨고, 망령이 드셨습니다.
왕건 황후마마?
연화 결국은 백성들과 신료들에 이어 나도 우리 태자들도 아니, 이
황궁 사람들도 다 죽을 것입니다.
왕건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황후마마?
연화 도와주시오, 장군.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고 또한 백성과 신료
들이 모두 존경하고 받드는 장군이십니다. 장군만이 폐하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이 조정에 남으시어, 폐하를 보좌해
주세요.
왕건 신은 이미 영을 받아 뫼셨다 말씀드렸사옵니다. 황후마마, 아
마도 지금의 이 혼란과 우려는 그리 길지 않을 것이옵니다.
참고 기다리시오소서. 좋은 날이 오지 않겠사옵니까?
연화 좋은날....... 지금 좋은 날이라고 하셨습니까? 장군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옛날에도 한 여인에게 그
리 말씀하셨지요. 현실에 따라야 한다고. 그것을 거절해서는
아니된다고....
왕건 .........?
슬이 .........
연화 그래서 따랐습니다. 그 옛날의 그 공자께서는 대장군이 되셨
고, 한 여인은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행복해졌습
니까? 현실의 운명을 따른 결과가 지금은 어찌 되었습니까?
왕건 황후마마, 신은 옛일은 다 잊었사옵니다.
연화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옛날의 그 여인이 빌고 있습니
다. 장군, 이 혼탁한 조정과 망령드신 폐하를 잡아주실 분은
장군 뿐이십니다. 조정에 있어주십시오. 의지할 곳이 없답니
다. 장군....
왕건 황후마마, 신 또한 안타깝사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성심이 굳으시고 영명하신 분이시옵니다. 반드시
옛날의 총명을 되찾으실 것이옵니다. 기다리시오소서.
연화 (격하게)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장군은. 옛날과 똑같
은 말씀만 하십니다. 기다려라, 기다려라.....결국은 그러다
가 다 죽을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다 죽을 것이라고 하였
습니다. 다 죽을 것이라구요!
왕건 황후마마........
연화 (눈물) 무섭습니다. 두려운 것 뿐입니다. 그래서, 장군을 찾
았는데 다른 말씀만 하십니다. (체념처럼) 그렇겠지요. 나의
운명이 장군의 운명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돌아가시어요.
왕건 황후마마......
연화 돌아가시라고 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는 연화의 표정과 그저 답답한 왕건의 표정에서
디졸브......
씬 22 대전
궁예는 생각이 많다. 혼자 술을 마신다. 최응이 그저 보고 있다.
궁예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나는 왕건 장군의 형이니라. 너도 보았지? 우리 형제가 형님,
아우 하는 것을?
최응 예, 폐하.
궁예 허허허, 그래. 아우는 아우야. 내가 관심법을 쓰면 어찌되는
지 뻔히 알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했어.
최응 ..........
궁예 내가 왜 그 아우의 뜻을 모르겠느냐?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가
않아. (마시고) 잘 해야 할텐데. 이번 나주는 상황이 아주 어
렵다고 들었어. 별 일 없이 잘하고 와야 할텐데... 그래야 나
랑 북으로 가지. 암, 북으로 가야하고 말고.......
씬 23 전주 황궁 외경
씬 24 동 황궁 황주전
박씨와 고비, 어린 금강(8살 정도), 신검, 그리고 박영규, 능환을 보
고 있다.
박씨 이찬께서 황도를 지키러 와 계시니 참으로 든든합니다.
능환 망극하옵니다, 황후마마. 여기 사위분도 함께 왔습니다.
박씨 사위도 왔고, 태자도 황궁에 있어요.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
습니다.
고비 신첩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처음에는 이 황도를 모두 비워두
고 싸움터에 다 나가시는가 하고 불안했사옵니다.
박영규 그럴리가 있사옵니까? 그래도 이곳은 황도이옵니다. 태자마마
가 계시고 황후마마도 계시옵니다. 신을 특별히 이곳에 보내
신 것도 황실을 중히 지키라는 뜻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능환 하하하, 왜 아니 그렇겠소이까? 폐하께서 성정은 급하시지만
생각하시는 것은 아주 깊으시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태자
마마?
신검 그렇습니. 아무쪼록 이번 전투가 참으로 잘 되어야 할 것인
데....
능환 그렇게 될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직접 나가신 전투치고 실패
한 적이 있었사옵니까? 게다가 파진찬도 가 있고, 수달과 여
러 맹장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사옵니다. 반드시 이길 것이옵
니다.
박씨 아휴, 그 전쟁이야기 하고는....언제나 좋은 세상이 올꼬....
씬 25 금성(나주) 그 해안가
금성과 연이어진 압해도 해안이다. 끝도 없는 전함들이 해안 가득히
떠있다. 그곳을 돌아보는 견훤과 최승우, 수달, 그리고 방장군, 공직,
능애, 신덕, 애술들의 모습이 보인다.
수달 보시오소서. 올 수 있는 배는 모두 끌어 모아 전함으로써 배
치시켜 놓았사옵니다.
견훤 대단하구먼. 대단해.
최승우 저만한 함대라면 제아무리 왕건이라 해도 맥을 추지 못할 것
이옵니다. 어차피 이번 해전은 누가 더 센가 하는 힘의 싸움
이옵니다.
견훤 그렇고 말고. 허지만, 늘 그랬듯이 왕건이라는 장수는 마땅히
경계를 해야 할 자야. 그 지략이 워낙 깊어서 알 수가 있어야
지?
수달 하오나 이번만은 다를 것이옵니다. 단단히 버릇을 고쳐 놓겠
사옵니다.
방장군 그럴 것이옵니다. 내려 온다면 반드시 소장이 사로 잡겠사옵
니다.
공직 그러하옵니다. 이번만은 형편이 크게 다르옵니다. 폐하께서
함께 하시는 전투이옵니다. 금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으로 보
옵니다.
신덕 그러나 전쟁이란 꼭 그 끝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아니 되
옵니다. 적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충분히 생각하여야 할 것
이옵니다.
능애 하하하, 신장군. 뭐, 생각하고 말고가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는 이미 마진국의 해군력을 다 알아 보았어. 그리고, 저들이
내려올 길목을 지키고 있네. 그래서 군사도 저들의 갑절로 늘
려 놓았고.....
신덕 그렇다 하더라도 저들이 무얼 생각하는지 어떤 전략을 쓸 것
인지를 충분히 검토해야 할 것이옵니다.
견훤 옳은 말이야. 전쟁의 실패는 항상 사소한 것에서 나온단 말이
야. 우리가 아무리 저들보다 나은 입장에 있더라도 따질 것은
꼼꼼히들 따지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번에는 우리의 위신
을 되찾아야 해. 알겠는가?
모두들 예, 폐하.
견훤 서두를 것도 없고, 또 자만해서도 아니 돼. 이번 전장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아. 왕건이가 끌고 올 마진국의 해군
력을 초토화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저 금성 산성을 되찾고 영
산강 일대를 다시 확보해야 할 것이야. 그렇다면 이 압해도
일대가 적을 궤멸시킬 가장 좋은 장소야. 좀 더 세심한 전략
을 세우도록 하게.
모두들 예, 폐하.
씬 26 나주 관아 외경
씬 27 동 관아 안
오다련과 김언이 마주해 있다. 지형도를 보고 있다. 그들은 모두 근심
스러운 표정이다.
오다련 저들의 군사가 갈수록 불어나고 있다지요?
김언 그렇습니다. 견훤왕이 거느린 친위군만 오천이 넘는다 하옵니
다.
오다련 오, 오천?
김언 전함도 새로 건조한 것과 징발한 것들을 합쳐 수백척이 된다
하옵니다.
오다련 이 일을 철원의 조정에서는 알고 있습니까?
김언 첩보가 수집되는 대로 즉시 즉시 전해 올렸습니다. 하지만 아
무런 대책을 내려보내주지 않으니 걱정입니다.
오다련 뭐, 언제까지 모른 척만 하겠습니까? 분명 지금쯤 대책을 세
웠을 것입니다. 아, 이 나주가 어떻게 해서 생긴 곳입니까?
절대로 조정에서는 이곳을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암요...
씬 28 왕건의 집 외경
씬29 동 집 사랑
가솔들이 모두 모여 있다. 왕건을 중심으로 하여, 태평, 유금필, 능
산, 박술희, 왕식렴, 왕신이있다.
왕건 폐하께서 나에게 나주로 가라는 영을 내리셨네. 그러나 병부
에서 건네준 장계를 보니 나주의 사정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심각해. 함선도 많을 뿐더러 군사도 우리보다 많
아.
모두들 .......
왕건 우리 군사는 다 합쳐서 삼천인데 적은 오천이 넘어. 또, 우리
함대는 다 합쳐서 백여척인데, 백제는 이백여척에 가까워. 힘
겨운 전쟁이야. 그리고 답답한 것은, 우리는 적의 전략에 대
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야.
태평 그렇사옵니다. 군사의 규모로 보아 백제는 이번 전쟁에 국가
적인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대책 없이 밀고
나가다가는 십중팔구 낭패를 볼 공산이 크옵니다.
왕건 어쩌면 좋겠는가? 하필 이럴 때에 금필 아우와 술희 아우가
각기 다른 전선으로 간다하니 더 답답해.
두사람 ........
왕건 어찌한다...? 지금으로써는 우리가 너무 불리하지 않는가?
태평 확실한 방안을 찾을 때까지는 함대를 움직여서는 아니 되옵니
다.
왕식렴 그렇다고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이까?
왕건 그건 그러하이. 나주에서는 하루가 급하다고 발을 구르고 있
어.
능산 그러나 태평 군사의 말처럼 대책이 없이는 갈 수 없는 노릇
아니옵니까?
왕건 이보게 태평이. 좋은 계책이 없겠는가?
태평 글세올습니다. (지형도를 가리키며) 저들의 주력군인 수군은
압해도 일대에 모여 있고, 보군과 기병은 그 해안과 또 한 곳
금성 산성 쪽에 배치되어 있다 들었사옵니다. 이것은 무얼 말
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상륙해야 할 지점을 막으면서 보병
과 기병을 동원하여 금성산성을 치고 넘어와 영산강 일대를
지나고, 나주 전체를 도모하겠다 하는 것이옵니다.
왕건 ....... 그것을 뚫을 방도가 없는가 하는 것이야?
태평 (도리질 하며) 겨울에는 북에서 찬공기가 남으로 내려와 북서
풍을 불게 하옵니다. 즉,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바람이 부는
것이옵니다. 저들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
고 있는 것이옵니다. 즉, 우리 함대가 밀려오면 화공을 써서
우리 배를 태워 없애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상륙하게 하여 매
복군으로 하여금 전멸을 시킨다는 계획일 것이옵니다.
왕건 틀림없이 그럴 것이야. 그럼 어찌한단 말인가?
태평 이대로는 들어가서는 아니되옵니다. 들어갈 수 없사옵니다.
모두들 .....
태평 아마도 지금까지 주군께서 맡아오신 전쟁 중에서 가장 어려운
전쟁이 될 것 같사옵니다.
유금필 그렇게까지 힘이 든단 말이오?
태평 그렇소이다. 수없이 검토해 보았는데 이번 전쟁은 어렵겠소이
다. 잘 못하면 백척의 함선과 수천 군사들이 모두 바다 속에
수장될 그런 전쟁이옵니다.
왕건 태평이 자네라면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이 아닌가?
태평 (도리질).... 아무튼 지금으로써는 군사를 움직여서는 아니
되옵니다. 백제군은 완벽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사옵니다. 저
들에게 말려들면 결코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너무도
어려운 전쟁이옵니다, 주군. 정말로 어렵사옵니다.
왕건 어렵다, 어렵다............?
태평 어렵다기 보다는 불가능한 전쟁이옵니다.
왕건 불가능해?
태평 그렇사옵니다, 주군. 한가지 길이 있다면 있사오나,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옵니다.
왕건 그게 무엇인가?
태평 그런 길이 있사옵니다. 남동풍이옵니다.
왕건 남동풍? 남동풍.....?
태평 그렇사옵니다. 이번 전쟁은 바람의 전쟁이옵니다. 남동풍이옵
니다. 그것이 주군께 필요하옵니다.
왕건 남동풍??
해설 남동풍! 지금 태평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후삼국 전
쟁 중 가장 큰 해전이었던 나주전투, 그리고 지금 태평이 말
하고 있는 이 기적의 남동풍! 시청자 여러분, 그 남동풍을 기
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 88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