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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관광(불회사 등)
* 나주읍성의 남쪽을 책임지던 곳, 남고문(나주읍성 남문) *
나주읍성(羅州邑城)의 남문(南門)으로 나주시 남내동에 복원되어 있다. 1920년 경 일제에 의해 약간의 석축만 남고 완전 철거되었다. 이후 1993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으며 그 후 추녀와 천장이 훼손되어 2005년에 보수하였다. 2층으로 된 문루(門樓)로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나주읍성에는 동쪽의 동점문, 서쪽 서성문, 남 남고문, 북의 북망문이 있는데 이중 남고문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 조선시대의 평산성, 나주읍성 *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이루고 있다. 전체 성벽의 크기를 복원해 보면 둘레가 3.679m 면적은 974.390㎡이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이 훼철되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성곽의 형태는 타원형이다. 현존하는 유구를 살펴보면, 먼저 서벽(西壁)의 경우는 교동일대에 남아 있는데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중 교동 67번지 부근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성돌 크기는 길이 19m, 높이 90~240cm로 성벽의 아랫부분을 1X1m 크기의 자연석을 겉면만 치석하여 ‘잔돌 끼움 방식’방식에 의해 쌓아 올렸다. 서문지에서 북벽까지는 잔존유구가 인되지 않는다. 북벽(北壁)의 잔존유구는 산정동 1-5번지 부근에 길이 15m의 석축열 일단과 성북동 33번지 앞에서 나주 중앙초등학교 뒤편까지 약 50m에 걸쳐 성돌이 흩어져 있다. 동벽은 중앙동 천변(128-12번지) 부근에 석축의 일부가 확인된다. 남벽의 경우 현재로는 남아 있는 유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며 다만 남문지(남외동 2-20번지)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남문(南顧門)을 1993년 성벽을 제외하고 복원하였으며, 동점문은 2005년에 복원하였다.
※ 나주읍성 사대문 명칭 - 동)동점문, 서)서성문, 남)남고문, 북)북망문
- 우리 지역 문화재 -
나주 관광
<나주 역사관광과>
황포돛배 나주시 등대길 80 332 - 1755
목사내아 목사내아 332 - 6565
역사갤러리 나주시 영산3길 17 331 - 1755
관광안내소(7곳)
나주읍성권, 서문주막 등 339 - 8592
나주목문화관 나주시 금성관길 15 332 - 5432
나주영상테마파크 나주시 공산면 덕음로 450 335 - 7008
정렬사 나주시 정렬사길 43 339 - 2537
나주향교 나주시 향교길 38 334 - 2369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나주시 죽림길 26 334 – 5393
문화예술과
백호문학관 나주시 다시면 회진길 8 335 - 5008
한국천연염색박물관 나주시 다시면 백호로 379 335 - 0091
문화예술회관 나주시 예향로 4137 332 - 8068
나주시민회관 나주시 남산길 23 339 - 2540
나빌레라문화센터 나주시 나주천1길 93 339 - 4632
마을미술 프로젝트 인포메이션 및 실내작품 전시실 나주시 금남동 일원
산림공원과
빛가람전망대 나주시 호수로 77 333 - 1501
금성산생태숲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370-1 336 – 8438
[출처] 나주시 관광지 정상 운영 안내입니다!|작성자 나주시
불회사와 인근의 산책로
불회사 = 석장승. 비자나무숲
운흥사 = 석장승. 금동여래입상.
망월사 = 만봉리 석조여래 입상
미륵사 = 칠천리 석불 입상
왕곡면 =송제리 고분군. 송제리5층석탑
세지면 부근의 벽류정
불회사 (佛會寺)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 1224-142 (다도면)
* 화려함보다는 호젓함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불회사 *
불회사는 백양사의 말사로, 운흥사터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덕룡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동진 태화 원년 (366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창건되었고 희연조사 2창, 조선 태종 2년(1402) 원진국사가 3창하고, 정조 22년(1789) 큰 화재로 건물이 대부분 불타버린 것을 1800년 중건하였다. 회사는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화려함은 없지만, 호젓한 분위기로 사람을 붙잡는다. 대웅전(국가 보물 1310호)과 명부전, 삼성각, 나한전, 요사채가 동백숲을 뒤에 두르고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특히 대웅전에 안치된 삼존불 중 비로자나불은 종이로 만든 지불로 유명하다. 계곡은 깊지 않아 산의 참맛은 덜 하나 절 주위의 전나무, 삼나무, 비나무 등의 숲은 아늑한 분위기를 이룬다. 단풍이 가장 늦게 드는 지역으로 그 빛깔이 인근에서 가장 아름답다. 절 입구에는 부정을 금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신상인 석장승 한쌍 (중요민속자료 제 11호)이 서 있다. 할아버지 장승은 툭 튀어 나온 퉁방울눈을 하고, 이맛살을 굵게 찌푸려 남도 특유의 해학적 표정을 짓고 있다. 할머니 장승은 절을 찾는 사람들을 반기는 듯 웃음을 머금은 표정이 다정다감한 할머니의 표정 그대로이다. 할아버지 장승의 키는 2.3미터, 할머니 장승은 1.7미터이다.
* 불회사 창건시기에 대한 두 가지 설화 *
불회사의 창건 시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하는데, 하나는 384년(침류왕 1)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창건하고 681년(신문왕 1)에 왕명으로 중창되었다고도 하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367년(근초고왕 22)에 희연이 창건하고 713년에 연기가 중창했다는 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의 이름이 불호사로 기록되어 있어 창건 때는 불호사였다가 1808년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절의 중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원진국사는 한때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호랑이의 도움으로 경상도 안동 땅에서 시주를 얻어 대웅전을 중건하게 되었다. 공사가 이루어지자 원진은 좋은 날을 택하여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어느새 해가 저물고 말았다. 이에 원진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 지는 해를 붙잡아두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쳤다는 것이다. 이때 원진이 기도하던 자리가 바로 일봉암이라고 한다.
* 나주 불회사석장승 *
불회사 석장생은 사찰 입구 300m 지점 오솔길 좌우에 2기가 있다. 장승의 앞면에는 ‘당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당(唐)자 주(周)자 글씨는 길(道)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자는 사당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 주자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 2기 중 우측이 남장생이고 좌측이 여장생인데 여장생은 하반신이 지면에 매몰되어 있다. 남장생(하원당장)은 얼굴 조각 선이 깊고 인상적이며 입 좌우에 치아가 각 1본씩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수염을 상징한 굵은 양각 선이 턱 아래에서 좌측으로 40cm쯤 내려와 있다. 얼굴이 남자상으로 선이 뚜렷하고 머리에서 중앙을 솟아오르게 하여 옛날 상투를 뜻한 것으로 보인다. 각자는 원래 「하」인데 후세에 누구인지 장난삼아「정」자로 판 것 같다. 좌측 여장생(주장군)은 남장생에 비해 얼굴이 여성적으로 온화하며 웃는 인상이고 부드럽고 평면적이다. 장생은 마을 수호신으로서의 장생과 이정표로서의 장생, 경계를 표시하는 장생이 있는데, 세워진 장소는 주로 사찰 입구, 마을, 성문 밖, 경계 길가 등이다.
* 장생과 불회사 석장승 *
「장생」이란 문자가 문헌상으로 나타난 가장 오래인 것은 신라 경덕왕 18년(759년)으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에 「이때가 건원 2년인데 특별히 교지를 내려 장생표주를 세우게 했는데 지금도 볼 수 있다.(是以乾元二年 特敎植 長生標柱 至今存焉)」이란 기록이 보인다. 불회사 석장생의 제작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불회사의 인근에 있는 운흥사 석장생(하원당장군)의 조각 형태와 그 수법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운흥사 석장생이 만들어진 강희 58년(1719년)을 전후하여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운흥사 (雲興寺)
운흥사는 덕룡산 기슭에 있는 고찰이었다. 1775년 정문(鄭文)이 쓴 진여문4중창기(眞如門四重創記)에 의하면 당 희종년간(846∼887)에 도선국사가 이곳의 지세가 좋아 흥덕으로부터 와서 이곳 도성암(道成庵)에서 첫 강회를 열고 터전을 닦은 후 신라 효공왕 년간(897∼911)에 이곳에 웅점(熊岾)에 웅치사(熊峙寺) 창건하였다. 그후 언제인가 운흥사로 바꾸었다. 1775년 당시에는 대웅전 침계루 등 380여칸의 규모를 갖춘 사찰로 확인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빈약한 사찰이다. 나주 운흥사 석장승(중요민속자료 제12호)은 사찰입구 길가에 있는데 우측이 여장생, 좌측이 남장생으로 되어 있다. 여장생은 하원당 장군(下元唐將軍)이라 음각된 얇고 넓은 돌 장승인데 불회사의 여장생처럼 온화한 맛이 없는 원시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한 인상을 하고 있다.
좌측의 남장생은 거대해서 위엄이 있으나 안면이 온화하고 인자한 노인 특유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 또 큰 치아 두 개가 입의 좌우에 노출되어 있고 수염이 턱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불회사 장생과 운흥사 장생이 다른 점은 불회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 남상이고 좌측이 주장군으로 여상인데 반해서 운흥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으로 여상이고 좌측이 주장군(周將軍)으로 남상이 되어 위치와 새긴 글씨가 서로 뒤바꿔져 있다. 그러나 그 조각법과 원형의 눈동자 등 형태가 거의 흡사한데다 여상인 하원당장군의 뒷면에 강희 58년(1719년)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서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민속자료이다. 한편 여인들이 치성을 드린 흔적인 수혈이 많이 남아 있는 바위가 있어 민간신앙의 단면을 볼 수 있다.
* 민간신앙이 단면을 볼 수 있는 장승, 운흥사석장승 *
중요민속자료 12호(1968년 12월 12일 지정)운흥사 석장생은 사찰입구 길가에 있는데 우측이 여장생, 좌측이 남장생으로 되어 있다. 제작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17∼18세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여장생은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음각된 얇고 넓은 돌장승인데 불회사의 여장생처럼 온화한 맛이 없는 원시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한 인상을 하고 있다. 좌측의 남장생은 거대해서 위엄이 있으나 안면이 온화하고 인자한 노인 특유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 또 큰 치아 두 개가 입의 좌우에 노출되어 있고 수염이 턱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불회사 장생과 운흥사 장생이 다른 점은 불회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 남상이고 좌측이 주장군으로 여상인데 반해서 운흥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으로 여상이고 좌측이 주장군(周將軍)으로 남상이 되어 위치와 새긴 글씨가 서로 뒤바꿔져 있다. 그러나 그 조각법과 원형의 눈동자 등 형태가 거의 흡사한데다 여상인 하원당장군의 뒷면에 강희 58년(1719년)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서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민속자료이다. 한편 여인들이 치성을 드린 흔적인 수혈이 많이 남아 있는 바위가 있어 민간신앙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나주운흥사지금동여래입상羅州雲興寺址金銅如來立像
[개설]
2001년 9월 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 시행한 운흥사지 발굴조사 때 출토되었다.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대의(大衣)의 처리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인 8∼9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2003년 5월 27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높이는 11.2㎝이며, 광배와 불상 및 대좌를 같이 주조하였다. 육계는 비교적 높게 솟아 있고, 자세히 보면 나발의 흔적이 보인다. 둥근 얼굴에 굽고 예리한 눈썹과 일자형 눈이 음각으로 표현되었다. 코와 입은 훼손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고, 양쪽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무릎까지 U자형의 옷 주름이 늘어져 있다. 다리는 약간 벌려 서 있고, 수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취하여 삼국시대 불상의 자세를 따르고 있다. 대좌는 상·하대로 이루어져 있고, 하대는 2단으로 단순한 8엽의 복련이 조각되어 있으며, 상대 역시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상단의 끝머리가 약간 구부려져 있는데, 보존처리 때 훼손이 염려되어 그대로 존치했다고 한다. 광배의 바깥쪽은 화염문을 가득 새기고, 안쪽으로 외곽 형태와 같은 두광과 거신광이 겹친 타원형을 그렸으며, 2줄의 음각 선을 돌려 구분하였다. 내부의 두광과 거신광에는 연화문이 장식되었지만,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처리되었다. 광배의 뒷면은 상·하로 구멍이 뚫려 있어 봉안시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의의와 평가]
이 금동여래입상은 광배와 불상, 대좌를 함께 주조한 특이한 예이며, 삼국시대 금동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인과 대좌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전체적인 형태와 대의의 처리 등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몇 안 되는 작품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세부 문양기법이나 주형의 거신광 등 예술적 측면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나주운흥사 석장승 羅州雲興寺石─
시대 : 조선
문화재 지정 : 중요민속문화재 제12호
건립시기 : 1719년
성격 : 석장승
유형 : 유적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암정리
분야 : 종교·철학/민간신앙
요약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암정리에 있는 석장승.
내용 : 2기(基). 중요민속자료 제12호. 암정리 운흥마을에서 운흥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좌우측에 세워져 있다. 전형적인 사찰장승으로서 남장승은 ‘上元周將軍(상원주장군)’, 여장승은 ‘下元唐將軍(하원당장군)’이라는 명문이 각각 전면에 음각되어 있다.
상원주장군은 높이가 2.7m에 달하는 대형 자연석을 다듬지 않은 채 얼굴부위만을 조각하였다. 얼굴에는 툭 튀어나온 왕방울 눈망울에 뭉툭한 주먹코, 그리고 두 갈래의 수염 등이 이 장승의 외형상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와 마주하는 하원당장군은 얇고 넓은 판석형의 화강석을 이용하였다.
조각수법 면에서 남장승보다 섬세하며, 높이가 2.1m, 두께 35㎝, 너비 73㎝ 정도이다. 머리에 다른 장식은 없으며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한 듯 머리 한쪽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불상의 백호(白毫:흰눈썹)처럼 양눈썹 사이에 X자를 음각하고 미간과 콧등에 주름을 새겼으며, 둥근 눈망울 주위에는 2개의 띠를 둘렀다. 대체적인 인상은 미소를 머금은 익살과 해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원당장군의 뒷면에는 ‘化主僧卞學康熙五十八年二月日木行別座金老□伊(화주승변학강희58년2월일목행별좌김노□이)’라는 내용이 음각이 되어 있어 화주승 변학과 신도들이 1719년(숙종 45)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여타 장승의 연혁이 불분명한 점에 비추어볼 때 이 장승은 명문의 내용으로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어, 장승연구뿐만 아니라 민속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운흥사장승은 조각기법면에서 같은 면내에 있는 불회사장승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명문에서 불회사장승은 남장승이 하원당장군, 여장승이 주장군으로 되어 있는 점이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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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사 (나주시 만봉리 석조여래입상)
소 재 지 ; 전남 나주시 봉황면 만봉리 361
나주 만봉리 석조여래입상 시도유형문화재64호(나주시)
첫댓글 고향인데도 고향을 잘 모르고 살아왔다오.
사는게 바빴다는 건 핑게일거고요.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세월 낙향하 살고지고 보고지고 -
고맙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