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16주일설교 요한복음2:1-12
본문: 요한복음2:1-12
제목: 풍성한 잔치를 베풀러 오신 예수님
오늘은 요한복음2:1-12의 말씀을 가지고
“풍성한 잔치를 베풀러 오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풍성한 잔치를 베풀러 오신 예수님”
우리는 삶에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마침 일어납니다.
마침은 알맞다는 말도 되고,
그 무엇을 끝낸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마침맞은 일의 연속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도
생각지 않은 일이 일어나도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저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마침 만나는 일 일니다.
그것을 마침으로 맞이하지 않고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화가 나고 속상하고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물론 마침이라고 생각해도
당연히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침이라고 생각하며 그 일을 대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길이 열리게 되고
그 일에 주관자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1.혼례식
우리의 가정은 혼례로부터 시작됩니다.
혼례가 있었기에 가정이 생겼고
우리가 태어나고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혼례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30년을 따로 산 남녀가 만나는 혼례
다른 가정과 다른 환경과 다른 지역에서 살던 자가 만나
하나가 되는 한 몸이 되는 한 식구가 되는 혼례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신비한 일입니다.
나는 자녀나 손자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자녀나 손자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런 아빠나 그런 엄마가 아니었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아빠와 엄마를 통해서
마침 그런 자녀가 태어나고 자라게 됩니다.
그러니 내 자식 내 손자가 어찌 예쁘지 않겠으며
귀하지 않겠으며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사랑해서 하는 혼례라면 참으로 귀중합니다.
물론 사랑하지 못했어도 중매를 통해
사랑하기로 약속하고 하는 혼례도 귀중합니다.
바르게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합니다.
그것을 똑바로 하지 못하니
상대방의 의중을 몰라
어떻게 처신할 줄 모르니 바르게 행동하지 못하니
가정이 안정이 안되고 혼란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은 가르쳐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판단해서 가르치려 들고
내가 주관하려고 하다 보면
그 가정은 파국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요즘은 스몰웨딩-작은 결혼식이라고 해서
직계가족들만 모여서 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들끼리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혼례는 가정과 가문이 만나고
각자 누렸던 사회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례식 때는 다 모입니다.
친척이란 친척이 다 모이고
친구란 친구가 다 모이고
사돈과 이웃들까지도 다 모이게 됩니다.
그래서 멀리서 가까이에서
자주 못 보던 사람까지도 혼례식을 통해 모입니다.
그래서 잔치는 풍성해야 하고
많은 음식과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유대에서 혼인 잔치는 일주일 동안이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혼인 잔치에 참여해서 혼인식을 참석하고
식사까지 한다고 해도 2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저도 그런 때가 있기는 하지만
혼주만 만나고 식사하고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잔치는 아마도 예수님과 잘 아는
아니면 예수님의 가족 특히 어머니 마리아와 잘 아는
그런 집의 혼인 잔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어머니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초청을 받아서 그 잔치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지금은 잔치 집에 갈 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갑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잔치가 있다고 하면
잔뜩 기대를 하고 갑니다.
왜냐하면 마음껏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마음껏 흥겹게 지낼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혼인 잔치 자리는 그런 자리였고
그렇게 하는 것이 미덕이고 바람직한 모습이었습니다.
2.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다!
그러한 잔치에 마침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지금처럼 마트에 가서 사오면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사서 해결 일도 아니었고
그렇게 해서 해결될 수도 없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상황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혼인 잔치가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의 잔치와 우리의 잔치는 다릅니다.
우리도 술 없는 잔치를 잔치라고 할 수 없지만
술 없이도 우리는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없듯이
포도주는 그들에게 음료였고
더 나가 잔치의 흥을 돋구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그들의 잔치가 더 이상 잔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흥겨움의 잔치가 아닌 생명력이 없는
슬픔의 잔치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에 그런 일이 생깁니다.
잔치가 끝나 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더 이상 기뻐할 수 없고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더 이상 평안이 없는 경우가 생깁니다.
기쁨 없이 사는 삶
기대 없이 사는 삶
참으로 막막하고 힘겹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의 삶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며
죄는 우리에게 소망 없는 삶으로 이끌게 됩니다.
누가 우리를 이런 사망의 골짜기에서 구하며
이런 암흑에서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까?
3.우리는 찾아 오신 예수님
그때 마침 누가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제 삼일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들에게 포도주는 떨어지고
남아 있는 것은 결례를 위한
빈 항아리 뿐이었습니다.
그곳에 온 사람들이 다 결례를 행하였습니다.
결례를 유대인의 종교 율법에서
아주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결례를 위한 여섯 개 돌 항아리는
그들에게 그들의 잔치에 즐거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2:11절은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을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망한 잔치를
흥겨움의 잔치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가나 혼인 잔치 표적이 진정으로 뜻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종말의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구원은 잔치입니다.
시편 23편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악의 세력에게 쫓기다가
얻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내 원수들이 지켜보는 데서
내게 상-잔칫상을 배설하시어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23:5)
다른 곳에서는 메시아 시대의 구원을
시온에서 베푼 큰 잔치로 비유했습니다. (사25:6)
잔치는 풍요로움입니다.
배부름과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배불리 먹고 만족함이 있어야 잔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에 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상징하기에 적당합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삶을 결핍하게 합니다.
지혜를 모자라게 하고, 능력이 없게 하며.
사랑이 없어서 미워하고 싫어하게 하고 싸우게 만들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자유가 없도록 살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4에 말씀하십니다.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고 아픈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면
예수를 믿고 살게 된다면 그런 구원을 얻게 됩니다.
죄인인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지 못하지만
죄인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함으로
사탄의 나라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을 받아
하늘의 풍성한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져 파장이 된
그래서 전혀 기대할 것 없는 절망적인 상황의
그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장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어
가장 흥겨운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보통은 잔치에서 처음에 맛있는 것을 내 놓고
나중은 좋은 것을 내 놓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신 잔치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때보다 최고의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잔치는
우리가 이전 그 어떤 잔치에서도 맛보지 못한
최고의 것을 주님은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누리게 될 천국의 잔치는
이 땅에서 누리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잔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 잔치를 소망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나의 잔치 마당에 있던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결례를 위해 물을 담는 용기였습니다.
결례란 하나님의 백성이 몸을 씻어
성전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준비한 예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정마다 그러한 항아리를 두어
늘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항아리들은
유대교의 성전 체제를 상징합니다.
유대교는 성전 중심의 종교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원하던 잔치는 파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애써보았지만
더 이상 기쁨의 잔치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항아리들이 그들을 씻겨 주었지만
그들의 잔치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흥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상징하는 유대교 성전 자체가
진정한 잔치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유대교는 마치 포도주가 떨어져
파장한 잔치와 같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기쁨도 생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첫 번째 표적은
유대교를 완성하여 하나님 나라의 구원 잔치를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표적을 보여준 날은 제 삼일이었습니다.
제 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날을 말씀합니다.
이날에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예수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고후5:17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11절은 이 일이 가나에서 이루어졌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건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가나라는 동네는 큰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시던
가버나움보다 적은 동네였습니다.
왜 예루살렘도 아니고 큰 도시도 아니고
작은 동네에서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 그것도
작은 동네 가나에서 첫 표적을 행하셨을까요?
이렇게 행하심은 이사야9:1-2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시고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에게
빛을 비추인다”는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첫 표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능을 나타냄으로써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낸 표적입니다.
그것을 보고 제자들은 믿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처음으로 제자들의 믿음을 언급합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제자들은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그 성령님을 통해서
제자들은 완전한 믿음으로 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잔치를 베풀러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
기쁨을 누리고 평강을 누리고
만족함을 얻게 되는 것은
지금 그런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여기서 누리는 것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저 맛보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시고 주님이 베푸신 혼인 잔치에
우리가 신부로 참여하게 되면 그때는
전혀 상상치 못할 하늘 잔치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소망을 가지는 것이고
그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 위해 예수님이 오셔야 하고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고
영접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따르는 종들이 있었기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통해
망한 잔치가 흥겹고 풍성한 잔치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예수님과 순종하는 종들을 통해
우리의 삶은 다 끝나버린 삶에서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풍성한 잔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풍성한 잔치를 베풀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풍성한 잔치를 누리시는 성도님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