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김동리(金東里)
새벽달보다는 초승달이 나에게는 한결 친할 수 있다. 개나리, 복숭아, 살구꽃, 벚꽃들이 어우러질 무렵의 초승달이나
으스름달이란, 그 연연하고 맑은 봄밤의 혼령(魂靈)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소식(蘇軾)의 ‘봄 저녁 한 시각은 천 냥에
값하나니, 꽃에는 맑은 향기, 달에는 그늘(春宵一刻値千金 花有淸香月有陰)’이라고 한 시구(詩句) 그대로다. 어느 것이
달빛인지 어느 것이 꽃빛인지 분간할
수도 없이 서로 어리고 서려 있는 봄밤의 정취란 참으로 흘러가는 생명의 한스러움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단들
초승달 보름달을 겨룰 수 있으랴. 그것은 안 되리라. 마침 어우러져 피어 있는 개나리, 복숭아, 벚꽃들이 아니라면, 그 연한
빛깔과 맑은 향기가 아니라면, 그 보드라운 숨결 같은 미풍이 아니라면, 초승달 혼자서야 무슨 그리 위력을 나타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이미 여건(與件)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초승달이 아닌가.
보름달은 이와 달라 벚꽃, 살구꽃이 어우러진 봄밤이나, 녹음과 물로 덮인 여름밤이나, 만산에 수를 놓은 가을밤이나, 천지가
눈에 싸인 겨울밤이나, 그 어느 때고 그 어디서고 거의 여건을 타지 않는다. 아무것도 따로 마련된 것이 없어도 된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물이면 물, 수풀이면 수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족하다. 산도 물도 수풀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라도
좋다. 머리 위에 보름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황홀하고 슬프고 유감(有感)한 것이다.
보름달은 온밤 있어 또한 좋다. 초승달은 저녁에만, 그믐달은 새벽에만 잠깐씩 비치다 말지만, 보름달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우리로 하여금 온밤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보름달은 온밤을 꽉 차게 지켜줄 뿐 아니라, 제 자신 한쪽 귀도 떨어지지 않고,
한쪽 모서리도 이울지 않은 꽉 찬 얼굴인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을까. 보름달같이 꽉 차고 온전히 둥근 눈동자의
소유자를 나는 좋아한다. 보름달같이 맑고 둥근 눈동자가 눈 한가운데 그득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 나는 좋다. 시선이
옆으로 비껴가지 않고, 아무런 사기(邪氣)도 없이 정면을 지그시 바라보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기발하기 보다 정대(正大)한
사람 나는 이러한 사람을 깊이 믿으며 존경하는 것이다.
보름달은 지금 바야흐로 하늘 가운데 있다. 천상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시간은 더욱 길며 여유 있게 느껴지는 것이 또한
보름달의 미덕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다릿목 정자까지 더 거닐며 많은 시간을 보름달과 사귀고자 한다.
첫댓글
보름달의 미덕을 주신
청송 님
오랜만에 귀한 글 마중을 드립니다
이제 한가위에 모름달을 기다려 봅니다
양떼 님! 올 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이 가을은 더욱 건강과 복된 가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무척 더웠습니다
청송 님
가끔 함께 해 주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