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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관세화란 외국과 쌀을 자유롭게 거래하는 대신 쌀 거래에 ‘관세’를 높게 책정해 자국의 쌀을 보호하는 제도다.
국가들은 자국의 농업이 무분별한 무역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는 여러 조치를 취한다. 여러 세계경제협의기구에서 국가간 자유무역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농업 보호 조치는 주요 쟁점이 되어왔다. 쌀 관세화 역시 이 과정에서 한 방편으로 채택된 것이다. 하지만 쌀 관세화는 전면자유무역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농업 보호 조치로는 효과가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쌀 관세화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에서 출발하는데, 당시 세계무역기구(WTO)가 회원국들의 농산물 시장 개방을 관장하기 시작하면서 농업 시장 개방이 본격화됐다.
UR 당시 개발도상국에 대해서는 쌀 의무수입량을 둬 쌀산업을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은 개발도상국 지위를 인정받아 쌀 관세화 도입 시점을 2004년까지 미뤘다. 1차 만기가 도래할 시점인 2003년 말에는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의무수입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쌀 관세화 시행 시점을 연기했다. 2014년 한국 정부는 쌀을 완전히 개방하고 관세를 높게 책정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우리나라의 쌀 자급률은 80% 초반 수준인 반면, 쌀 강국인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은 120~180% 수준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경우 식량생산을 위한 농지면적까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라, 수입쌀 물량 증가는 기존의 쌀 생산 토대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쌀 생산 토대가 무너진다는 건 결국 농촌이 죽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산수단이 없으면 공장이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쌀 산업은 현재도 제대로 정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20년 전인 1995년 우리나라의 1인당 밥쌀 소비량은 106.5kg이었으나 지난해에는 67.2kg으로 무려 37%나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쌀 생산량은 469만5000t에서 423만t으로 감소했다. 농가소득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18.3%에서 11.8%(2012년 기준)로, 쌀 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0.99%에서 0.38%로 급감했다. 쌀 생산력이 약화되면서 쌀 자급률도 낮아져 2000년대 초 100%를 웃돌다가 80%대로 떨어진 상황이다.
쌀 시장 개방은 곧 카길애그리퓨리나와 같은 다국적 곡물 기업들이 우리나라 곡물 시장의 마지막 보루인 ‘쌀’까지 눈독 들이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국농민회총연합과 농업 관련 연구소들은 전망하고 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가정의 경우 애완동물들에게 먹이는 사료들 중 국산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들 가정이 사용하는 사료는 뉴트리나 애견식품이나 퓨리나에서 생산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들 기업은 세계 최대 곡물기업인 카길애그리퓨리나의 자회사들이다. 카길애그리퓨리나는 1967년 한국 진출 이후 현재는 국내 곡물 및 사료시장에서 가장 많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쌀 관세화란 우리 쌀독이 우리집 마당에 있는 게 아니라 미국이나 중국에 가 있는 것”이라는 김영호 전농 의장의 말이 바로 이 같은 미래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쌀 전면개방은 유전자조작식품(GMO)도 자유롭게 유입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보인다. 1998년 1월 카길은 다국적 화학 회사인 몬산토와 손잡고 바이오 농산물 회사 ‘레네젠’을 설립했는데, 이 레네젠은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해 유전자 조작 곡물과 사료를 개발하고 있다.
쌀도 이런 흐름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 국내에 수입되는 쌀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품질 검사를 받은 뒤 유전자조작 쌀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첨부해야 유통할 수 있으나, 미국과 일본의 협상 과정을 보면 안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쌀 수입허가제를 폐지한 일본과 TPP 협상을 하면서 미국 쌀에 대한 유전자조작 검사제를 폐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의무수입물량이란 WTO에 가입한 국가가 농산물 시장 개방을 늦추는 대신 농산물 수출국으로부터 의무적으로 사야 하는 곡물량이다.
문제는 당장 쌀 시장을 개방하겠다고 관세화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의무수입물량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상식적으로는 의무수입물량이 관세화 유예에 따른 일종의 보상이기 때문에 관세화를 도입하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우루과이라운드 농업협정상 의무수입물량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UR 농업협정문 부속서5의 2항’은 “특별대우가 중단되면 그 시점에서 유효한 최소시장접근 기회를 유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특별대우’란 ‘관세화 유예’이며, ‘유효한 최소시장접근 기회’는 ‘의무수입물량’이다. 따라서 우리가 2015년부터 쌀 관세화를 시행하더라도 의무수입물량은 직전 연도인 2014년의 40만7천700톤으로 고정된다.
UR(우루과이라운드) 농업협정문 부속서5의 2항
이행기간 중 임의의 특정년도초에 회원국은 아래 6항(특별취급품목의 유예기간 종료에 따른 세율에 대한 규정)에 일치하여 선정된 해당품목에 대한 특별취급 적용을 중단할 수 있다. 그러할 경우 해당국은 그 기간까지 실제로 이행된 최소접근기회를 유지시켜야 하며, 잔여 이행기간 동안 최소접근기회를 매년 0.4%씩 증가시켜야 한다. 그 이후 이 공식으로부터 결과되는 최종년도의 최소접근기회 수준은 관련 회원국의 이행계획서에 유지되어야 한다.
2004년 우리나라가 쌀시장 개방을 10년 더 미룰 때 그해 전체 의무수입량 20만5228t을 과거(2001∼2003년) 수입실적에 따라 미국(5만76t), 중국(11만6159t), 태국(2만9963t), 호주(9030t)에 배분(국별쿼터)하고, 이후에 늘어나는 물량은 국별 제한을 두지 않는 총량 쿼터로 설정했다. 우리나라가 쌀 관세화를 단행하면 4개국에 배분된 국별 쿼터가 사라지고 의무수입량 전체가 총량 쿼터가 된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국민들에게 ‘의무수입량의 추가 증량 부담이 없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관세화를 홍보해왔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관세화가 되면 의무수입을 안 해도 된다’라고 오해하고 있다.
정부는 필리핀이 쌀 관세화를 유예하는 대신 의무수입량을 두배 이상 늘려 가혹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그에 버금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필리핀은 관세화 유예 기간을 늘리는 대신 의무수입량을 기존보다 2.3배 많은 80만5천톤으로 늘렸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필리핀에게 치명적인지 여부를 판단하려면 필리핀의 협상 경위와 협상 결과가 필리핀 쌀 산업에 미치게 될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필리핀은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에서 우리나라처럼 개발도상국 지위를 인정받아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간 관세화를 유예했다. 그리고 한국처럼 관세화 유예를 연장하는 협상을 해 2005년 7월부터 2012년 6월까지 7년 간 추가로 관세화를 유예했다. 이후 필리핀은 관세화를 선택할 경우 자국 쌀 농업이 심각한 타격을 받아 자급률이 급격히 하락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 관세화로 전면 개방하지 않고 관세화 유예를 지속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협상 대표단에 농민단체 대표도 포함시켜 다각도로 방안을 논의했고, 그 결과 나온 방안으로 의무면제(웨이버. waiver) 조항에 따라 2017년까지 5년 동안 관세화 의무를 면제시켜 줄 것을 WTO에 요청해 2014년 6월까지 이해 당사국과 협상을 벌인 결과 관세화를 추가로 유예하는 대신 의무수입량을 늘렸다.
이 결과는 필리핀에 치명적인 수준이 아니다. 필리핀은 최근 10년간 쌀 생산 및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현재 쌀 자급률은 85~9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쌀 자급률에 미치지 못하는 만큼의 쌀 200만톤 가량을 매년 수입해왔다. 즉, 이번에 합의한 의무수입량 80만5천톤은 기존에 수입하던 200만톤에 비해 턱없이 못 미치는 것이다. 이는 곧 일반수입물량을 의무수입물량으로 바꿔서 수입하는 것에 불과하고, 전체 쌀 수입량이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의무면제 기간인 5년 동안에 늘어난 의무수입물량은 한시적으로만 적용하기로 합의해 관세화로 전환할 경우에 적용되는 의무수입물량은 종전과 똑같이 유지하게 된다.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은 “필리핀 입장에서 쌀만을 대상으로 협상 결과를 평가하자면 필리핀은 별다른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관세화 전면 개방을 5년 더 미뤘다고 할 수 있다”며 “마치 필리핀이 가혹한 대가를 치룬 것처럼 평가하는 한국 정부의 해석은 교묘하게 실체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쌀 관세화 이후 우리나라가 협상 상대국에 쌀은 협상 대상에서 제외해달라는 양허안을 제출하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앞서 설명했듯 관세율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역 협상에서는 양허안과 함께 상대국에 ‘이 품목은 꼭 협상 대상에 넣어달라’는 양허요구안도 제출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나라가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도 우리에게 동등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서로 제출한 양허안과 양허요구안을 두고 양국은 협상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가 양허안에 ‘쌀’을 포함시킨다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 ‘쌀’이라는 것을 아는 상대국은 양허요구안에 ‘쌀’을 포함시킬 것이고, 결국 이와 관련한 추가 협상에 들어가야 한다.
FTA 협상의 궁극적 목표는 자유 무역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관세 없이 무역하는 것이 목표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500% 관세율을 적용시켜놓는다 하더라도 협상이 반복되면서 FTA 협상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 초기 관세율은 무용지물이 된다.
참고로 지난 WTO 각료회의 선언문 초안의 핵심은 관세 인하, 의무 수입 물량 확대, 수출 보조금 폐지, 추곡 수매제와 같은 농업보조금 제도 감축이었다.
TPP까지 가면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미국이 주도하는 TPP는 모든 상품의 관세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TPP 가입 자체가 과제인 우리나라의 경우 예비협상에서 쌀이 의제화되더라도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다.
이밖에 현재 답보상태에 있는 DDA(도하개발아젠다) 협상도 변수가 될 수 있다. 이 협상에서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 지위를 부여받게 될 경우 쌀을 ‘특볇품목’으로 분류할 수 있기 때문에 관세 감축 예외가 적용돼 WTO에 신고한 관세율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선진국 지위를 부여받게 될 경우 WTO 신고 관세를 대폭 내려야 하고, 의무수입량도 현재보다 20만톤 가량 더 늘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