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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제주도 유배를 떠나며
風吹飛雨過城頭(풍취비우과성두)-궂은 비바람은 성(城) 머리에 불고
瘴氣薰陰百尺樓(장기훈음백척루)-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가득한데
滄海怒濤來薄幕(창해노도래박막)-넓고 푸른 바다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해
碧山愁色帶淸秋(벽산수색대청추)-근심어린 기운이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
歸心厭見王孫草(귀심염견왕손초)-돌아가고 싶어 왕손초(王孫草)를 신물 나게 보았고
客夢頻驚帝子洲(객몽빈경제자주)-나그네의 꿈에는 제자주(서울)가 자주 보이네!
故國存亡消息斷(고국존망소식단)-고국(故國)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烟波江上臥孤舟(연파강상와고주)-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만 누웠구나!
광해군(光海君)
※위의 시는 광해군이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기면서 지은 시다.
376년을 인적 끊긴 숲 속에 버려진 한 많은 영혼 광해군 묘 !
그동안 벼르던 조선제15대왕 광해군(光海君) 묘(墓)를 답사하였다.
먼저 이 답사기를 쓰면서 조선왕조뿐만 아니고 현실정치를 보면서
인간이 만든 역사의 진실여부에 서글픈 마음이 든다.
광해군 묘 답사는 글 쓸 생각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묘를 가까이서 봐야 석물(石物)이나 주위 환경 등 느낌이 있을 것인데
철조망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니 안타까움뿐이다.
문화재청에서 2020년까지 묘를 정비한다는 안내판을 보니 3년 후에 다시
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518년(1392~1910)역사의 조선왕조 왕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 27명이고
추존(追尊)왕이 9명이다.
추존(追尊)왕이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조부, 증조부, 고조부, 4명을 왕으로 추존(追尊)하고,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군, 정조의 서장자 효장세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 등 5명은 장자이면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왕으로 추존(追尊) 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왕이라 칭호를 듣는 사람은 36중 34명이다.
그 중에서 안타깝게 연산군과 광해군은 반정(反正)으로 왕위를 파면 당했기 때문에
왕의 묘호(廟號)를 못 받고 “군(君)”으로 강등(降等)되어 왕자시절의 이름인
“군(君)”으로 불리고 있다.
군(君)은 왕(王)의 의미도 있지만 광해군(光海君)의 군(君)은 평민을 뜻한다.
광해군이 통치하던 시기의 기록도 “실록(實錄)”이 아닌 “일기(日記)”이름으로
역사에 전해지는데, 일기(日記)는 제왕(帝王)의 역사 기록이 아닌 모든
편년체(編年體연대 순서에 따라) 기록물에 두루 붙일 수 있는 일반적인 이름이다.
참고로 국내에 있는 조선왕조 왕족(王族)의 무덤은 모두 119기다.
(외국에 있는 조선왕족의 무덤은 자료를 조사중에 있다)
능(陵)이 42기, 원(園)이 13기, 묘(墓)가 64기다.
42기 능(陵) 가운데 40기는 남한에, 2기는 북한에 있다.
북한에 있는 2기는 개성시 판문점 부근에 있는데 아래와 같다.
(후릉(厚陵)-2대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 제릉(齊陵) 태조 이성계의 정비인 신의황후)
남한의 40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필자가 릉(陵) 40기 가운데 28기를 답사하였고 계속 답사 중이다
광해군 묘는 찾기가 힘들었다.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59번지”가 광해군 묘가 있는 주소다.
내비게이션 안내로 자동차로 갔는데
영락교회 공원묘지 안으로 들어간다.
자동차로 약 8분정도 산길을 가니까 오른쪽에 “광해군묘”안내판이 철조망 울타리에서있다.
1만7천여 평의 산에 광해군묘는 숲 속에 갇혀 있어 찾기가 매우 어려우며
376년이 지난 지금도 외로운 영혼에게는 찾아주는 사람도 없이 쓸쓸히 누워있다.
그리고 철조망 위리안치(圍籬安置)로 출입을 금지 하고 있으니 광해군의 죄가
376년이 지난 지금도 형기(刑期)가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철조망 밖에서 약 30m 전방에 광해군 묘가 보여
스마트폰 사진 줌을 끌어 당겨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광해군묘 오른편에는 부인 유(柳)씨 묘가 있는 쌍묘다.
광해군의 부인인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유(柳)씨는 광해군과 함께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1623년(인조1) 10월 8일 화병으로 사망하여
양주군 적성동에 묻혔다가, 광해군이 사망한 뒤 광해군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었다.
(인조실록에는 기록이 없다.)
사진으로 볼 수는 없지만 광해군 묘 위쪽으로 어머니 공빈 김씨 묘가 있다.
광해군은 2살 때 어머니를 잃고 외롭게 커서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제주도 유배지에서 사무치게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광해군의 마지막 소원이
어머니 무덤 옆에 묻히기를 유언하여 어머니 발아래에 묻히게 되었다.
광해군묘 뒤쪽으로는 광해군의 형 임해군(臨海君)의 묘도 있다.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인 이지(李祬) 부부는 위리안치된 강화도 유배지에서
가위와 인두로 땅굴을 26일간 무려 70자(약 21m)나 파서 울타리 너머로 탈출하려다
발각되어 사형을 당한다.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처럼---
광해군 묘를 멀리서 보아도 조선 왕릉에서 공통적으로 설치하는 난간석(欄干石)이나 동물 석상, 문무인석(文武人石) 등이 갖추지 못한 초라한 묘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선조(宣祖)와 정비(正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사이는 자식이 없었다.
선조는 의인왕후(懿仁王后) 사망후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고 후궁에서 13명의 왕자등 총 14명의 자식을
두었다.
선조의 후궁이었던 공빈김씨(1553~1577)는 장남인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광해군은 후궁의 자식인데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여기서 광해군의 비극이 싹튼다.
광해군은 14명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똑똑하였다고 한다.
선조의 후궁 장남이며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난폭하고 광기가 있어
세자의 자격에서 일찍 배제되었다.
광해군 어머니 공빈 김씨는 광해군이 2살 때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광해군을 키운 것은 정비인 마음씨 고운 의인왕후(懿仁王后)였다.
드라마 “허준”에서도 공빈 김씨가 죽으면서 허준에게 광해군을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 광해군이 폐군(廢君)이 될 정도로 죄가 컸을까?
전문 역사가들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우리 국민들은 학교 때 배운 역사교과서에서
“연산군 광해군”은 포악한 왕이라고 배워 “폭군”이라고 낙인이 찍혀 있다.
그러나 필자는 광해군에 대하여 역사적 시각을 달리하고 있다.
광해군은 연산군과는 달리 “당쟁(黨爭)의 희생자(犧牲者)”라고 말하고 싶다.
광해군을 쫒아낸 인조반정(仁祖反正) 세력들의 명분은 광해군이
두 가지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죄로서
즉,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과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선조의 계비(繼妃)인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廢母)했다는 죄명이다.
또 한 가지는 명(明)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명나라를 큰나라(大明事大)로 모시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사대주의(事大主義)다.
인목대비는 광해군보다 9살 어린 나이로 아버지 선조의 계비(繼妃)로 왕비가 되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절대 폐하지 않았다.
다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을 뿐이다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의 처형 주장에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광해군뿐이었다.
*1618년 1월부터~12월 23일까지 대신들이 인목대비 유폐(幽閉)를 광해군에게
상소하였으나 광해군이 계속 거부하다가
*1618년 12월 23일에 비답을 봉하여 내리다(광해군일기)
현재 있는 덕수궁 내의 유일한 2층 목조 건물인 “석어당(昔御堂)”은
인목대비가 광해군에 의해 10여 년간 유폐된 곳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에 대하여도 조선왕조실록 등 4가지의 틀린 이야기가
따로 전해오고 있다.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
*굶어 죽었다는 기록
*강화도에 유배하여 방에 불을 뜨겁게 때어 증살(蒸殺)하여 죽인 기록
*양잿물을 먹여 죽었다는 기록 등등---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이 광해군의 뜻이었을까?
역사는 진실을 알고 있으리---
필자는 광해군의 역시를 좀 더 자세히 알기위해서 조선왕조실록인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승정원일”등 광해군에 관련된
기록들을 읽어 보았다.
(내용이 방대하고 복잡하여 요점만 간추려 소개한다)
선조(宣祖)와 광해군 때의 당파(黨派)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파”와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파”로 분열되었다.
드라마 “허준”에서도 대북(大北) 소북(小北)의 권력다툼 장면이 나온다.
광해군이 왕이 된 뒤에 권력을 잡은 대북(大北)파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들은 소북(小北)파의 중심인 인목대비를 빨리 죽이고 생활비를 삭감하라는
상소를 1년간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았다(아래 광해군일기 참조)
또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죽이자는 대북(大北)파들의 상소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7개월 만에 대북(大北)파들의 상소에 못 이겨 강화에 유배하였다.
그런데 유배한 다음해에 강화 부사 정항이 마음대로 영창대군을 죽였다.
*1613년 7월 26일 영창대군을 폐서인하여 강화에 유배하였다(광해군일기)
*1614년 2월 10일 강화 부사 정항이 영창 대군 이의를 살해하다(광해군일기)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27명의 조선왕 중에서 임진왜란의 큰
전란을 겪은 왕이다.
드라마에서도 나타나지만 선조는 성격이 매우 요상스러운 왕이었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로부터 견제를 많이 받았다.
선조는 인간성이 별로 안 좋고 비급한 왕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한양 궁궐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을 간다.
백성들은 도망간 선조에 분노를 터트리고 궁궐을 불태웠다.
임진왜란 중에 선조는 조정을 둘로 나누어 광해군에게는 전쟁하는 조정을 마끼고
선조가 맡은 조정은 피난 가는데 이용하였다.
임진왜란시 광해군의 분조(分朝)활동의 성과는 예상 이상으로 컸다.
광해군은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사이에서 실리적인 외교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백성을 위해 세금을 공평하게 하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다.
광해군은 정말 폭군이었나?
조선왕조의 사관(史官)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 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시키려고 조작 왜곡한 측면이 매우 강하다.
오히려 광해군은 명(明)나라를 대국으로 숭배하는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명(明)과 청(淸)나라의 실리적 외교정책을 완전히 꽃 피우지 못하고 밀려난
불행한 왕이었다.
그것은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킨 인조가 친명(親明) 반청(反淸) 외교정책으로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청(淸)나라에 항복한 치욕의 병자호란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반정을 일으킨 인조(仁祖)는 입이 열 개라도 광해군을 욕할 수 없다.
조선을 청(淸)에 바쳤으니까---
광해군처럼 명(明)과 청(淸)에 “등거리 외교”를 하였으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역사적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조반정파들은 광해군을 폭정(暴政)이라고 하였다.
폭정(暴政)이란 뜻은 민생(民生)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폭정이라 함이 옳다.
그러나 광해군은 오히려 민생을 위하여 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그는 백성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 적이 한 번도 없다.
조선의 명군(名君), 성군(聖君)이라고 말을 듣는 조선왕들이나 민주주의 시대의
현대 정치인들도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일에는 조금의 인정도 보이지 않았다.
진실보다 권력이 더 중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오히려 인목대비를 살려 내었다.
“광해군일기”에 보면 대북파들이 인목대비를 죽이자고 계속 광해군에게 상소를 하지만 광해군은 허락을 하지 않고 결국에 유폐로 결정한다.
광해군은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권력욕에 눈 먼
사대부들에게 당한 불행한 왕이었다.
광해군은 문화정책에 공이 크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서적간행에 업적이 크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다시 편찬하였다.
임진(壬辰), 병자(丙子) 두 전쟁으로 소실된 네 곳의 조선왕조실록 사고(四庫)를
대신하기 위해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실록전(實錄殿)을 재건하였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등도 광해군 때에 간행된 책이다.
춘추역사(春秋歷史)는 잊혀져가는 이들 모자의 영혼을 그나마 어루만지면서
인생이 부질없이 흘리는 회한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으리라.
박정희 5.16 혁명
전두환 5.18 사태
김대중 햇빛정책
박근혜 탄핵 파면
문재인 대통령 당선 등등등---
올림픽 금메달처럼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에 의하여 정당화 되고 있다.
히틀러도 제2차대전에 승리하였으면 “진실한 영웅”이라 할 것이다.
Justice is only for victors !
정당(正當)함은 승리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
아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광해군에 관한 기록을 연대순으로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광해군 출생
*1575년 4월 26 광해군 출생일로 되어 있지만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에 없음)
▲광해군 어머니 공빈김씨 사망
*1577년 5월 27일 공빈 김씨가 사망하다 졸기(卒記)(선조실록)
광해군이 2살되던 해다
▲임진왜란 일어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간 내용
*1591년 1월 13일 통신사가 일본에서의 행적을 보고하다(선조실록)
*1591년 10월 24일 일본이 명(明)을 정벌하기 위해 길을 내달라고 요구한 일로
주청사 한응인 등을 명나라에 보내다(선조실록)
*1592년 4월 13일 왜구가 쳐들어 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선조실록)
*1592년 4월 29일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다(선조실록)
*1592년 4월 30일 임진왜란을 피하여 선조 새벽에 서울을 떠나다(선조실록)
▲선조가 승하(昇遐사망)하다 조선왕조실록 내용
*1608년 2월 1일 선조가 갑자기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해지다(광해군일기)
*1608년 2월 1일 선조가 승하하다(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선조가 정릉동 행궁 정전에서 승하하니 광해군 세자가 즉위하다(선조수정실록)
▲광해군 왕위에 오르다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이 선왕의 유교를 받고 왕위에 오르다(광해군일기)
*1608년 2월 14일 임해군을 진도에 유배하다(광해군일기)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를 유폐(流弊)시키다
인목대비 1618년부터 5년 동안 서궁에 유폐(幽閉)되었다
1618년 1월부터 12월 23일까지 대신들이 인목대비 유폐(幽閉)를 광해군에게 상소하였으나
광해군이 계속 거부하다가 1618년 12월 23일에 비답을 봉하여 내리다(광해군일기)
서궁에 5년 덕수궁 석어당(德壽宮昔御堂)에 5년 총 10년을 유폐(幽閉) 당한다
▲영창대군 유배 사망
*1613년 1월부터 12월까지 대신들이 영창대군 처벌을 요구했으나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았다.(광군일기)
*1613년 7월 26일 영창대군을 폐서인하여 강화에 유배하였다(광군일기)
*1614년 2월 10일 강화 부사 정항이 영창 대군 이의를 살해하다(광군일기)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이 영창 대군 이의(永昌大君李㼁)를 살해하였다.
정항은 고을에 도착하여 영창대군의 위리(圍籬) 주변에 사람을 엄중히 금하고,
음식물을 넣어주지 않았다. 침상에 불을 뜨겁게 때서 눕지 못하게 하였는데,
영창대군이 창살을 부여잡고 서서 밤낮으로 울부짖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영창대군은 사람됨이 영리하였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어머니 인목대비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염려하여 괴로움을 말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상복을
입지도 않았다. 그의 죽음을 듣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광군일기)
▲인조반정으로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다
*1623년 3월 13일 인조가 의병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즉위하다(인조실록)
*1623년 3월 14일 광해를 폐하여 군으로 봉하다(인조실록)
대왕대비(인목대비)가 왕을 폐하여 광해군으로 삼고 금상(인조)으로 왕위
계승케 하다(광해군일기)
대왕대비가 교지를 내려 광해의 죄목 36조항을 말하다(광해군일기)
대비가 광해를 외지에 안치시키도록 수차 교지를 내리다(광해군일기)
*1623년 3월 14일 인조가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는 경운궁(덕수궁)에 있다 (인조실록)
자전(慈殿왕의 어머니 자리)에 진하할 것을 누차 청하여 자전이 허락하다
인조가 먼저 백관을 거느리고 자전(慈殿인목대비)에게 진하한 뒤 백관의 진하를
받을 것을 청하자, 자전이 언서(諺書한글)로 폐군(廢君)의 열 가지 죄목을 들고
이어 하교하기를,
“종묘에 고유하는 의식을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부모의 원수를
또한 처형하지 못했다. 어찌 백의로 진하를 받을 수 있겠는가. 진하하지 말라.”
하였다. 인조가 청하기를,
“자전(慈殿)께서 오랫동안 유폐 중에 계시다가 이와 같은 대경(大慶)을
만났으니, 마땅히 속히 진하하여 위로는 하늘에 계시는 조종의 영령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군민 사서(軍民士庶)들의 기대에 보답해야 합니다.
이처럼 굳이 사양하심은 부당합니다.”
하였으나, 자전은 그래도 따르지 않았으나 누차 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인조실록)
▲광해군이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다
*1623년 3월 20일 폐주 등을 강화에 위리안치하라는 전지를 받들었다(승정원일기)
*1623년 3월 23일 광해 및 아들 이지를 강화도에 옮겨 안치시키다(광해군일기)
*1623년 5월 22일 폐세자(광해 장남) 이지가 땅굴을 파고 도망치다 붙잡히고,
폐빈은 자결하다(인조실록)
*1623년 6월 25일 폐세자(광해 장남) 이지에게 죽음을 내리다(인조실록)
*1623년 10월 16일 폐비(광해군 비)의 상여가 서울을 지날 적에 치제토록 하교하다(인조실록)
광해군 바 문성군 유씨가 강화에서 화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이 없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다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再登極)을 염려하여
광해군을 충청도 태안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이괄의 난(李括의 亂)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江華島)로 옮겨 왔다(인조실록 승정원일기에는 기록이 없다)
*1624년 1월 17일 이괄 이 반란을 일으키다(인조실록)
*1624년 3월 15일 이괄 난의 평정을 축하에 대한 답서(인조실록)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광해군을 제주도로 유배 보낸다
1636 년 청나라가 침입하여 광해군(光海君)의 원수(怨讐)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인조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강화도 교동 (江華島 喬洞)으로 유배지를 옮긴다.
이 때 집권세력은 경기수사에게 광해군을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오히려 광해군을 보호한다.
1637년 조선이 청나라에 완전히 굴복하고 인조(仁祖)는 광해군의 복위(復位)에
위험을 느끼게 되어 광해군을 다시 제주도(濟州島)로 유배지를 옮긴다.
(인조실록에는 기록이 없다)
*1636년 2월 16일 청나라가 조선을 침범 병자호란이 시작되다
용골대 마부대 등이 서달의 차인을 거느리고 오다(인조실록)
*1636년 광해군 유배지를 강화 교동도로 옮겼다(조선왕조실록 기록 없음)
*1636년 12월 14일 적병이 송도를 지나자 파천을 논의,
인조가 남한산성에 도착,강화도로 가기로 결정하다(인조실록)
*1636년 12월 15일 인조가 강도로 떠났다가 되돌아오다.(인조실록)
*1636년 12월 16일부터~1637년 1월 1일까지 인조가 남한 산성에 있다(인조실록)
*1637년 1월 3일 청나라 한이 탄천에 진을 쳤다고 하다(인조실록)
*1637년 1월 19일 오랑캐가 남한산성 안에 대포를 쏘다(인조실록)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 나가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청나라에 항복).
인조는 항복후 창경궁으로 들어가다(인조실록)
▲광해군을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긴다
청(淸)나라에 의해 광해군이 복원이 될까 염려하여 유배지를 제주도로 옮긴다
*1637년 6월 6일,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조선왕조실록 기록 없음)
▲광해군 제주도에서 죽다
*1641년 7월 10일 광해군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죽었다.(인조실록)
1641년 9월 8일 광해군의 상여가 경기도 양주로 올라 오는데 약 2달간의
공백에 관해서 1641년~1644년까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없다
제주도에도 묘를 썼다는 기록도 없다.
*1641년 7월 10일 7월 2일 제주 목사등이 서목에서 광해가 숨이 끊어진지
오래되었으므로 위리안치된 곳의 여인들이 염습한 일을 보고하였다(승정원일기)
예조가 광해가 죽었으므로 오늘부터 12일까지 정조시하겠다는 계를 올렸다
(승정원일기)
*1641년 9월 8일 광해의 상구(喪柩)가 소초원(所草院)을 지나 진위(振威옛평택)로
향하였다는 일을 보고하는 서목을 경기 감사가 6일 올 렸다(승정원일기)
▲광해군의 장례 절차에 관한 내용
*1641년 8월 29일 사람을 보내 광해군에게 치제(致祭제사지냄)하게 하다(인조실록)
*1641년 9월 7일 광해군의 관(棺)을 바꾸는 일에 대해 대신에게 의정하게 할 것을
청하는 예조의 계목(승정원일기)
*1641년 9월 10일 광해의 상구(喪柩 장사 지낼때의 관)가 산소에 도착한 뒤 그대로
올라가겠다는 일을 보고하는 서목을 예조 참의가 9일 올렸다
(승정원일기)
*1641년 9월 11일 광해의 관을 바꾸는 일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한 결과를 보고하는
예조의 계목 (승정원일기)
*1641년 9월 13일 광해의 관은 바꾸고 관디(冠帶관복)를 입히라는 명은 거둘 것 등을 청하는 연양군 이시백의 차자 (승정원일기)
광해의 상에 대렴하는 의금은 문성군부인의 예대로 마련하여
보낼 것을 청하는 예조의 (승정원일기)
광해의 상구 가운데 명정 등을 다시 마련하여 보낼 것을 청하는
예조의 계 (승정원일기)
광해를 영장(永葬장사)하는 날 등을 당겨 정할 수 없는지를 묻는
전교(승정원일기)
*1641년 9월 15일 광해의 딸에게 식량과 반찬을 넉넉하게 주라는 비망기(승정원일기)
*1641년 9월 17일 광해의 관을 바꾸는 날 등을 정하여 거행할 것을 청하는 예조의 계에
대해, 아뢴 대로 시행하라는 계하 (승정원일기)
*1641년 9월 18일 광해의 관을 바꿀 때 장생전의 관판을 사급하라는 전교 (승정원일기)
*1641년 10월 2일 도승지 한형길을 보내 광해군에게 치제(致祭)하다(인조실록)
*1641년 11월 7일 광해군과 문성군부인의 묘에 제사를 지내는 일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탈할 것을 청하는 예조의 계(승정원일기)
▲광해군 양주 현재의 묘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 기록이 없다
*1643년 10월에 지금의 양주 묘소로 천장(遷葬)하였다
*1643년 1월~12월까지 천장(遷葬묘를 옮김) 내용 없음(승정원일기)
끝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