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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과 모국론(謀國論) -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
글쓴이 최윤오 / 등록일 2025-10-08
17세기 동아시아 국가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택하게 되었다. 중국의 명청 교체와 일본의 에도막부 성립이 그 결과이다. 조선 역시 체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성리학적 유교국가를 재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중심에는 주자[朱熹, 1130~1200] 절대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주자학 독점의 학문권력 편중과 극단화
이같은 집권 지배층의 주자학 이데올로기는 양명학 등의 학문 지식체계를 사문난적이라는 굴레를 씌워 탄압하는 가운데 17세기 조선의 학문권력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후 주자학은 더욱 배타적인 학문권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개방적인 사유체계가 금기시되었다. 정부 차원의 『주자대전』,『주자어류』 발간을 통해 주자학의 교의와 주석을 더욱 공고하게 했으며, 그로 인해 지식의 다양성과 사유의 융통성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국가의 주자학 절대주의의 공고화는 당시 세계관의 확대에 따라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학 천주교를 박해하고 탄압했던 상황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17세기 이후의 국가 재조 개혁의 논리는 권력의 편중과 학문지식의 독점에서 출발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해체하고 개혁적이고 혁신적인 국가질서를 만들어 가는가에 따라 각각의 세계관이 나뉘게 되었다.
17~19세기는 이같은 주자 절대주의의 학문권력이 독점하는 질서 속에서, 실학적 개혁론이 사회 저변에서부터 확대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명분론은 제반 농본정책의 기본원리로 작동했으나, 오직 납세 의무를 진 농민들에게 균부균세 차원의 미봉책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농민들은 ‘항산(恒産)’을 마련할 수 없었고, 나아가 농촌사회 해체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게다가 농민에게 항산을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정전제 시행에 대해서는 불가능하다는 주자의 난행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종성헌에 따라 재조(再造)하는 현실보수적인 주자학 추종 논리가 더욱 배타적인 형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백성을 중시하는 국가 재조의 개혁론
반면,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노비제 혁파 외에도 공전제(公田制) 토지개혁을 통해 중민근국(重民勤國)하는 국가를 지향하였다. 구암 한백겸은 정전제(井田制)를 조선에서 시행할 수 있다는 단서를 평양 기전론(箕田論)의 전자형(田字形) 정전 형태를 통해 찾았다.
이같은 논리는 조선국가의 붕괴를 막고 새로운 질서를 재건하는 방안으로서 국가를 근본적으로 재조해야 한다는 개혁적 지식의 출발점이 되고 있었다. 이는 기득권층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개량 논리에 대해, 개혁적이고 탐구적인 개혁 논리로 나타났다.
또한 새로운 우주관이 수용되면서 중국 중심의 질서를 벗어날 수 있는 탈중국적 세계관이 더욱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은 세계관의 출현은 학문지식체계의 다양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각 분야로 확산되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호남농민층의 분화형태를 지주 5, 자경 25, 작인농민 70의 비율로 인식하고 있었다. 5%의 지주층과 70%의 소빈농이 불평등하게 결합된 농민의 양극화 형태가 호남 농민층의 실정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정부 지배층의 균부균세 정책의 결과였고, 나아가 농민을 위해 대책을 강구하던 실학적 지식인을 더욱 각성시키게 되었다. 다산의 실학적 개혁론이 국가 차원의 개혁안으로 주목받게 된 것도 이같은 다산의 세계관 때문이었다.
위기의식 속에 현실을 직시한 개혁론
17세기 이후 유교국가론의 성격은 왕도정치를 배경으로 하는 도학 질서의 재건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그 방향은 덕치에 기반을 둔 경학이 더욱 강조되게 되었고, 그와 같은 경학적 학문지식체계는 다시 주자 절대주의를 강화하는 유교국가론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양란 후 전개된 국가 위기에 대한 대책으로서 농촌 현실을 직시하는 일군의 지식인들은 성리학의 이기론, 붕당론, 군자소인론, 인물성 동이론 등 현학적인 경학 논쟁을 비판하는 한편, 국가 사회 전반의 개혁 대책을 고민하는 경세론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개혁적 지식인들의 경세론은 경학의 경계를 넘어 사회국가 전반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형이상학적 경학 논쟁이 아니라 그들이 접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구상하는 방법이다. 『목민심서』나 『경세유표』에서 논증된 조선 국가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과 탐구 방식이 그러한 현실인식의 절정을 보여준다.
다산 정약용의 농촌 인식은 당시 실학적 지식인들이 가졌던 위기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산의 출발은 이같은 농촌 현실을 국가의 위기로 진단하고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통해 새로운 학문지식체계를 창안해 내기에 이른다. 이같은 개혁적 실학 논리의 확대는 세계관의 확대를 배경으로 사회 저변으로부터 더욱 확산되어 가고 있었고, 나아가 개혁적 학문 지식체계로 집대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국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이 아니면 안 된다고 보았으며 그 귀결은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었다.
농민과 함께하는 공적 성격의 학문체계
주자적 질서를 넘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한 지식인들의 개혁론은 경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새로운 진리, 즉 농민대중을 위한 학문 지식에서 출발하게 된다. 정전제의 유제로서 기전론, 공전론 등의 조선적 토지개혁론을 창안했던 지식인들의 학문체계도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이며, 조선 실학의 태동을 보여준 학문지식체계라고 할 수 있다.
실학자들의 경세학은 당시 국가 사회 전반에 걸쳐 함께 더불어 세울 수 있는 국가 사회질서의 핵심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적 지식인들의 학문 지식은 주자 절대주의에 기반을 둔 학문독점이 아니라 가장 하층의 농민과도 더불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공공적 학문체계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공공적 학문지식체계의 출현은, 서양의 종교개혁이 마녀사냥을 일삼던 기독교 질서를 비판하고 계몽주의가 이성적 판단을 강조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주자학 교조화에 대한 비판적 실학사상의 출현과 그것의 공공적 성격은 농업 분야 외에도 상공업, 과학, 천문학 등의 학문 분야에서 출현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성호사설』,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의 백과사전류 등장을 통해 광범위하게 확산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지식체계는 실학적 지식인들의 냉철한 현실인식을 통해 경세치용, 이용후생과 실사구시 차원의 학문영역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와 반대로 주자 중심적 세계관과 그것을 고수하던 벌열(閥閱) 세력들의 학문지식체계는 다양하고 개방적인 학문영역을 개척하지 못한 채 위정척사적인 명분론에 몰두하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외래의 문명개화론 수용에 급급하여 조선의 내적 동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외세에 의존하면서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된다. 다산이 그토록 강조했던 “조선국가의 개혁 없이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예측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기에 다산을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변혁기에 다시 호출하는 다산의 모국론
『목민심서』나 『경세유표』는 토지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강력한 조선 국가를 만들기 위해 집대성된 경세서였다. 그의 모국론(謀國論)은 19세기 세계체제의 확산 과정에서 제시된 국가개혁론이며, 서양과의 접촉과정을 통해 자주적으로 건설되어야 하는 조선 국가의 모델이었다. 실학적 지식인들이 가졌던 전문적이며 실험적, 탐구적 지식체계와 이전에 본 적이 없던 학문지식의 상대화 과정을 통해 건설되어야 할 조선 국가이기도 했다. 그것은 탈중국, 탈중심적 세계관을 통해 확보될 수 있는 세계체제하의 조선 국가론이었다.
다산의 국가건설 방법론은 국왕의 결단이나 개혁적 지식인의 선도를 통해, 혹은 다산의 뜻을 아는 혁명적 지식인과 농민들의 기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문맥 속에 숨겨 놓은 채 독자로 하여금 찾아가게 만든다. 모국론은 결국 역사 변혁기를 맞아 각자의 현실인식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국가론이었다. 다산은 『경세유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남겼고, 1894년 농민전쟁과 1930년대 조선학운동에 의해 호출될 때까지 우리의 모국론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 이후의 남북한 농지개혁과 토지개혁을 통해 다시 호출되게 된다. 다산의 국가론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을까?
■ 글쓴이 : 최 윤 오 (연세대 국학연구원)
- 연세대 국학연구원
- (전)연세대 교수
[주요 저서]
『대한제국의 토지제도와 근대』(혜안, 2010)
『韓國實學思想硏究 2 - 政治經濟學篇』(혜안, 2006)
『조선후기 토지소유권의 발달과 지주제』(혜안, 2006)
『한국토지용어사전』(혜안, 2016)
『조선후기 양전사업과 토지개혁론』(혜안, 2023)
『다산 경세학 연구』(다산학술총서 3, 다산학술문화재단 사암, 202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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