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암스님은 점차적인 정화를 강조하셨고,
우선 삼보사찰을 정화해 인재를 양성하고, 대처승들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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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정화 이후 아만심(我慢心)만 탱천한 게 큰 문제입니다. 말로만 공심이고 대중이지 속으로는 대접받을 생각만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재가자의 종단 참여를 막은 것도 큰 병폐입니다. 신도들의 신앙심마저 좀먹고 있는 거지요. 종단 운영에 재가자도 책임성 있게 참여해야 합니다. 문화재관람료 문제도 재고해야 합니다... <사진=이현정, 월간 불교와문화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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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인과응보를 낳다
장로대담 첫머리에 수산스님을 찾아뵌 것은 고불총림의 진정한 사자(獅子)라 할 수 있는 만암스님의 유훈과 법맥을 계승하고 있다는 이유가 사실 가장 컸다. 근세고승의 법맥을 잇고 있는 원로스님이 어디 한두 분이겠으나, 21세기 한국불교의 현실과 수행의 지중함을 논함에 ‘만암스님의 실체를 결코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와 수행을 논함에 그 전환기적 시점을 광복 이후 1950년대, 이른바 ‘교단정화운동'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정설이다. 그런즉 당시 종정으로서 독신승 측의 '환부역조(換父易祖)'를 꾸짖고 백양사로 칩거하신 일 등 그야말로 만암스님은 한국불교현대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었던 선지식이었다. 허나, 역사는 외면했고 객관적 평가 또한 비켜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 만큼 만암스님과 한국불교의 현실은 미묘한 파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만암스님의 숨결을 간직한 수산스님을 찾아가는 길 내내 아직도 진행형인 당시의 교단정화와 만암스님의 역학관계를 쉬이 말해주실까 염려가 컸다. 민감한 얘기라 말을 빙빙 돌리지 않으실까, 아니면 아예 선문답만 하지 않으실까 이래저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때 만암스님 뜻대로만 했다면 이·사(理․事)가 분명히 가려졌고 싸움도 없었을 겁니다. 지금쯤이면 자체 정화가 되어 있지 않았겠어요?"
기우(杞憂)였다. 수산스님은 한국불교의 현실 분석에 너무도 냉철했고 애정 또한 깊었다. 필자가 ‘장로대담' 첫머리에 불갑사를 찾은 이유를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오늘날 수행이 무너진 가장 큰 원인을 당시에서 찾아주었다.
“만암스님께서 열반하실 즈음 말씀을 남기셨지요. 종단 일에 결코 관여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서옹스님 등을 불러놓고 한국불교는 영 썩었으니 내가 죽더라도 백양사 대중은 결코 종단 일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관여하면 다 죽는다고 했지요."
잘못된 정화의 인과응보를 만암스님은 보고 있었다. 허나, 서옹스님은 1974년 조계종 제5대 종정직을 수락하면서 종단정치에 휘말려 수난을 겪고 만다.
―만암스님께서 1951년 조선불교 3대 교정에 추대되고 조계종명을 복원한 1954년 다시 종정에 추대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배경을 설명해 주시지요.
“목포 정혜원에서 만암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는데, 고암(古庵)·비룡(飛龍)·경산(京山)스님 세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함께 올라가셨지요."
만암스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간 독신승 측은 선학원에서 교단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다시 종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만암스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만암스님께서 당시 정화 방안을 내놓으셨지요?
“선학원에서 (독신승 측을) 설득했다고 하시대요. △대처승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면서 점차적으로 정화하고 △대처승에게 상좌를 두지 못하게 하며 △이판·사판을 가리자고 말입니다. 당시 독신승은 비구니를 합쳐도 27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1,700개 사찰이 있었는데, 한 절에 한 명씩만 보낸다 해도 관리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단 말입니다. (만암스님은) 그래서 점차적인 정화를 강조하셨고, 우선 삼보사찰을 정화해 인재를 양성하고, 대처승들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지요. 헌데 사흘만인가, 청담스님이 '산모가 위급한데 수술을 안 하면 산모․아기 둘 다 죽는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고 합디다. 그런저런 끝에 만암스님은 백양사로 내려오셨지요."
만암스님이 백양사로 내려온 사이 서울에서는 독신승과 경찰병력 등이 동원돼 태고사 현판을 내리고 조계사 현판을 거는 일이 있었다. 독신승 측에서 다시 만암스님을 찾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만암스님은 태고사 현판을 떼어내 불살랐다는 얘기를 듣고 진노했다. 태고사는 종조 태고보우국사를 상징해 명명한 것인데, 이를 내리고 조계사 현판을 올린 것은 종조를 갈아친거나 진배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현대불교사 속에서 배운 ‘환부역조(換父易祖)'의 진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암스님은 종정직을 사임했고, 교단 상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폭력으로 더더욱 얼룩졌다. 수행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필자는 의문이 일었다. 당시 상황을 전혀 모르진 않았을 터인데, 만암스님께서 왜 종정직을 수락했는가였다. 대답은 극히 간단했다.
“도반인 고암스님이 와서 사정사정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합디다."
“정화 이후 아만심만 탱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본질적인 수행에 대해 여쭸다.
―최근 들어 불교수행에 일반대중의 관심이 한층 높아져 불교의 대중화 또는 생활화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들마저도 정작 출가교단을 바라보는 시각은 곱지 않습니다. 큰스님의 근심만큼이나 한국불교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수행을 찾기 힘든 게 사실인 게지요. 한국불교 교단이 출가 본연의 의미를 되살려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결집하고 수행 풍토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요?
큰스님께서 호흡을 길게 하시더니, 자조(自嘲)하듯 내뱉었다.
“어렵지, 어렵지…. 대웅전 기둥뿌리가 빠져야 정신 차릴까.”
청정 승풍을 회복하고 서로 화합하며 욕심을 버리고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어렵다는 큰스님의 절망이었다. “중노릇 잘하면 불사는 저절로 이뤄진다"는 만암스님의 꾸짖음이 새록새록하다는 말씀도 애써 강조했다.
―타종교의 영향 때문인지 요즘엔 직업적 성격의 ‘성직(聖職)'이란 말이 보편화되어 어느새 불교집안에도 수행의 개념보다 성직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출가승려 스스로 자신과 교단을 성역(聖域)으로 한정짓고 대중과의 차별을 당연시하는 일들을 너무도 자연스레 자행하고 있다는 지적이지요. 불교에는 수행자만 존재할 뿐 성직자의 개념은 없을 터인데 말입니다.
“사실, 정화 이후 아만심(我慢心)만 탱천한 게 큰 문제입니다. 말로만 공심이고 대중이지 속으로는 대접받을 생각만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재가자의 종단 참여를 막은 것도 큰 병폐입니다. 신도들의 신앙심마저 좀먹고 있는 거지요. 종단운영에 재가자도 책임성 있게 참여해야 합니다. 문화재관람료 문제도 재고해야 합니다. 초창기 30본산 주지들이 염출해 태고사(조계사)를 건립하고 총무원을 세운 것은 태고사 수입으로 종단을 운영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종정 내지 총무원장을 당연직 주지로 삼은 까닭이지요. 그때는 본산주지들이 총무원을 감사했었습니다."
작금의 승려 자질이나 종단 운영 실태가 ‘부처님 불교'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요, 수행 풍토를 회복할 수 있는 근원적인 대안이었다. 다시 현실적 문제를 들고 나서니 현실을 바라보는 냉철한, 그러면서도 애종(愛宗)이 담긴 말씀을 잊지 않았다.
“스님네 자신부터 탐진치 삼독을 버려야 합니다. 오장육부 다 꺼내 놓고 어떻게 신도들에게만 삼독을 버리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불교는 화합승단이 근간입니다. 헌데, 지금은 모두 각방결사하면서 시시비비를 따집니다. 정당한 비판을 고맙게 받아야 하는데 대접 못 받으면 불평불만만 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요. 대중생활과 자자 포살(自恣布薩)이 살아나야 합니다. 나 하나 잘못하면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투철한 신심이 있습니까? 진정한 정화는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아집(我執) 탱천! 이걸 버려야 합니다."
큰스님의 회한은 봇물 쏟아지듯 했다. 아니, 그는 절망과 기대를 곱씹는 듯했다. 침묵이 무겁게 흘렀다. 그래서다. 이쯤에서 대담을 갈무리하기로 하고 화제를 돌렸다. 큰스님의 행장을 듣고 싶어서였다.
수산스님은 1922년 4월 21일(음 3. 2)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서 강릉 유(劉)씨 집안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속명은 평열(平烈). 부친의 함자는 병학(秉學), 모친은 고흥 마(馬)씨 옥이(玉伊)다.
집안에서는 맏형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는데, 동네사람들이 사위 삼겠다고 샘을 많이 냈다. 그런 까닭에 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나이 열일곱에 혼인했는데, 그만 열아홉에 요절하고 말았다. 맏이를 잃은 슬픔에 아버지는 술로 지샜고, 평열은 막내자식 잘못 낳아 집안이 기울고 있다는 가족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으며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결국 나이 열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어머니마저 세상을 하직했지요. 다시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막내자식 잘못 낳아 집안이 몰락했다'며 나를 무척 싫어한 부모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곤 '다시 태어나는 일은 이생에서 끝내자'고 결심했어요.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후 근처 백양사를 찾아 출가의 뜻을 비쳤습니다."
그렇게 부모의 겹삼년상을 끝내고 백양사를 찾은 때가 1940년, 세납 열아홉이었다(기존의 모든 기사는 1938년으로 잘못 기록했다). 절에 들어와 보니 세속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내 탓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자신과 부모를 향한 원망을 접고 오직 정진에만 힘썼다. 이듬해 사미계를 수지하고 법안스님의 위패상좌가 되었다(기존의 기사는 ‘법안스님을 은사로'만 기록하고 있다). 큰절 부전을 보면서 강원을 이수하고 1943년 만암스님께 비구계를 수지했다. 수산은 이때까지 큰절에서 만암스님을 시봉했다.
구족계를 수지한 수산은 덕숭산 정혜사 만공회상에 들어가 동안거를 마쳤다. 광복을 맞이한 해가 이때다. 나주 다보사선원에 방부(榜付)를 들여 3년을 지낸 후 목포 정혜원으로 수행처를 옮겨 선원을 개설하고 이때부터 7년간 만암스님을 다시 시봉했다. 수산은 만암스님의 아난존자가 되었고, 만암스님은 수산의 일편지(一片地)를 보고 전법게를 하사했다.
이후 신도들의 요청을 받아 1957년 완도 신흥사 주지와 불갑사포교당인 영광 원각사 주지를 지냈다. 이때(1957.1.10) 만암스님이 세납 81세 법랍 71세로 백양사에서 입적했다. 수산은 사흘 전 “만암스님과 연등보살이 만나는" 꿈을 꾸었다.
다시 1959년부터 10년간 부안 개암사 주지를 지내고, 1969년~1981년 백양사 주지를 세 번(1차:1969.11.26~1971.3.19/2차:1973.5.24~1975.1.9/3차:1980.11.28~1981.4.28) 역임했다. 목포 반야사에 선원을 개설하고, 1975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영광 불갑사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 1992년에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소재한 학교법인 정광학원 제8대 이사장을 역임했다(정확히 1992.9.5~1995.4.24 在任했다. 기존의 자료는 재임연도가 제각각이며, 심지어 ‘설립자' 또는 '초대이사장'으로 잘못 기록한 기사도 있다. 정광학원은 1946.10.10. 만암스님이 설립한 종립학원으로 산하에 정광중·고등학교를 두고 있다).
1986년 조계종 원로의원과 2004년 3월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에 추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 큰스님의 몸놀림은 84세의 노구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다. 차를 차답게 마시는 일은 선다일미(禪茶一味)를 말함이었다. 큰스님이 선다의 대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 없다. 출가본분을 잃지 않았으나, 대중과 하도 친밀해 그저 고향 할아버지 같은 분이다.
우리 시대 선지식은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