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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_배움
마음의 정원 | 2016.03.03 00:07
한국의 美_배움
배움. 그 의미를 새기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말은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게 아니라 가정과 사회, 국가와 세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소양과 도량을 갖추는 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등 옛 성현들이 강조한 교육 이념도 궁극적으로는 인성 중심이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GOLD&WISE>는 봄기운이 만물을 소생시키는 새봄을 맞는 3월, 선조의 삶에 깃든 참된 가르침으로 지혜롭게 시작해보겠습니다.
에 · 세 · 이
' …사 람'을 만나고 싶다
뉴욕의 ‘뉴요커’, 파리의 ‘파리지앵’은 귀에 익숙하다. 딱 부러지게는 아니어도 그때그때 내포되는 특별한 의미도 별다른 설명 없이 이해한다. 그런데 ‘서울사람’은 귀에 설어졌고, 어쩌다 들리는 경우에도 그저 지역적 의미만 느껴질 뿐이다.
며칠 전, 베이징에서 ‘베이징런(北京人: 북경인)’을 만났다. 베이징에 산다고 모두가 베이징런은 아니다. 집안 내력으로 치자면 최소 선대(先代) 몇 대부터 줄곧 베이징에서 살아와 그 역사와 전통에 해박하고 익숙해야 한다. 이를테면 ‘서울토박이’, 그중에서도 ‘북촌토박이’쯤 되는 셈이다.
아버지는 그리 높지 않은 계급의 직업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유치원 교사였다. 베이징 골목의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 중 한 사람인 셈이다. 그녀는 지금 중국 최고의 의상디자이너로 꼽힌다. 하지만 그녀를 특별히 거론하는 것은 명성 때문이 아니라 다른 저명 인사나 고위직, 또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부(富)로 부러움을 사는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 까닭이다. 그녀는 스쳐가는 질문에도 정성껏 답변하고, 짧은 순간에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매사에 차분하고 당당하며, ‘정직’이라는 단어로 진실이 느껴지게 한다.
또 헤어진 뒤에는 따스한 기운이 마음 속에 긴 여운으로 남는다. 쉬운 일 같아도 결코 거짓된 연기로는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맑은 꿈’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어릴 적 동화책이나 영화를 통해 꿈꾸었던 아름다움을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어렵고 엄혹했던 1986년부터 팔려 나가리라는 보장도 없는 드레스를 만들었다.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녀는 어려웠던 상황을, 고단했던 기억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매사가 재미있었고 앞으로도 즐겁게 가야 할 길을 걸을 뿐이란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내내 선구자의 길이었다. 한편으론 무모해 보이는 길이었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일을 해왔단다. 즉 ‘단순함’이 오늘 자신이 거둔 성공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장황했다. 전통이라는 말은 그 묵직함 때문인지 더럭 겁이 나고, 그래서 비난받기 일쑤고 외면당하기도 한다. 우리네 전통의 기본은 예(禮), 정직, 성실, 겸손, 나눔, 도리 등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나라에 대한 충(忠), 부모를 향한 효(孝), 이웃에 대한 사랑, 벗과의 우정, 생명 존중 등의 사상과 철학이 나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소중한 덕목 중에 어떤 것은 아예 입에 오르지도 않는다.
효를 말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낯간지럽다. 가장 흔하게 입에 담는 게 사랑인데 그마저도 솔직히 경박스럽기 그지없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인가.
내가 받은 정규 교육에 대한 기억은 지식의 습득이다. 그럼 이즈음은 어떨까? 아무래도 종합적인 지식의 습득에도 못 미치는 ‘편향된 집중’이거나, 속된 말로 ‘오만 데 껄떡거리다 겉만 핥고 마는’ 얼치기인 듯싶다.
그나마 내 세대는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꾸중이라도 듣고 컸다. ‘어른을 몰라보고’, ‘공손하지 못하고’,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등을 들으며 말이다.
고리타분하게 들렸지만 예와 겸허, 배려와 나눔 등이 내내 머리와 가슴에 각인되어 있었다.
꿈은 있어야 한다. 잊지 않아야 할 것은 그 꿈이 자신의 꿈이고, 그래서 행복하게 지켜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얕은 세속과 약삭빠름에 젖은 부모와 학교의 교육이 아이들의 개성을 빼앗고 참된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하고 있다. 나 아닌 이가 정해준 꿈이 어찌 진짜 꿈이 되겠는가.
청춘이 시들시들 말라가고 조화(造花)가 되는 까닭이다.
‘서울사람’에서는 단아한 기운을, ‘영남사람’에서는 올곧은 정신을, ‘호남사람’에서는 뭉클한 예술의 향취를, ‘충청사람’에서는 뭉근한 뚝심을 떠올릴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해본다. 학교가 지식 습득 장소로 전락했다면 지역 사회가 저마다의 전통을 바탕으로 전인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 김정현(소설가)
포토그래퍼 최충식 어시스턴트 박혜미 촬영장소 도산서원
선비들의 모임’(109.3×52.4cm,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 선현들은 일상생활에서도 글씨와 그림을 감상하며 배움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진정한 배움이란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닌 진심을 담아야 하며, 특히 머리로 익히고 행동으로 답하는 ‘체찰’을 강조했다.
봄, 그리고 배움
봄이다. 바람이 촉각보다 후각으로 먼저 느껴진다. 바람이 실어온 달큼한 봄 향기에 마음이 어지럽다.
특별히 어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계절의 창밖에서 재잘대는 어린아이들 소리를 들으면, 데려다 무릎에 앉혀놓고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진다. 봄엔 배움이 제격이다.
조선 최고의 학자에게 배우다
퇴계 이황의 공부하는 마음
요즘 인성 교육이 화두다. 옛말로 한다면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일 터, 교육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강조하는 전인 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성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이가 바로 퇴계 이황이며, 인성 교육을 퇴계의 어법으로 풀이하자면 ‘마음 공부’다.
이 마음 공부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한 책이 바로 <자성록>이다. <자성록>은 그가 후학들에 답한 편지를 말년에 추려 엮은 것인데, 공부하는 자세와 학문하는 길에 대한 깊은 사색, 그리고 겸손한 심성까지 들어있다.
무오년 단오 다음 날에 쓴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옛 성현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이 말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벗들과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일입니다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중략)…
하기야 이처럼 편지를 모아서 책을 만든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삶에 충실하지 못한 것을.
그가 말하는 공부하는 자세란 세상일을 등지고 책상물림이나 하는 선비의 그것과는 달랐다. 하고많은 날 글만 읽어 낯빛이 창백한 백면서생과도 물론 판이했다.
퇴계 이황이 말하는 가치 있는 공부란 몸으로 익히는 ‘체찰’이었다.
머리로만 익히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참된 공부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 집안일을 거드는 것도 모두 포함되었다. 공부에 대한 퇴계의 성찰은 후학들에게 답한 편지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의 편지 몇 구절을 은밀히 들여다보자.
먼저 퇴계보다 스물일곱 해 뒤에 태어난 후학 남시보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편지에서 공부를 처음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통인 “싹을 억지로 잡아당겨 성장을 도우려” 하는 기운을 부드럽게 꾸짖고 책 읽는 방법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있다.
책을 읽되 마음을 괴롭힐 정도로 심하게 읽지는 마세요. 무조건 많이 읽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마음 가는 대로 공부의 맛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치의 깨달음도 날마다의 평범한 생활속에서 분명히 간파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거기에 숙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즐거이 음미하도록 하세요.
퇴계는 본인 역시 공부하면서 ‘억지로 자라기를 바라는 병통’을 몸으로 겪었음을 고백하며 말의 뜻이 도움이 되기를 누차 바라고 있다.
다음은 퇴계의 제자이며 오늘날 장관급에 해당하는 대사간과 이조판서를 지낸 정자중(1533~1576)에게 답한 편지다. 퇴계는 남시보에게 그러했듯 정자중에게도, 공부를 하면서 너무 빨리 성취하기를 바라는 조급함에 대해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조급한 마음 때문에 작은 성취를 놓고 이리저리 재면서 언제나 초조해지고 걱정하게 됨을 우려한 탓이다.
공부란 한 번 껑충 뛰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1~2년 만에 공부를 완성할 수 있다고 기약한 적이 있는데, 뜻을 그렇게 가졌다면 참으로 거칠고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부는 평생을 걸쳐 해야 하는 막중한 사업입니다.
퇴계는 또한 제자 정자중에게 집안일이 공부에 방해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제자의 편지에서 “집안일을 맡아 처리하다 보니 그것이 공부에 방해된다”는 문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옛사람들은 과연 공부의 근원을 어디에 두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이 질문에 퇴계는, 어버이를 비롯한 윗사람을 공경하고, 동료를 존중하는 동시에 원만한 관계를 이루며, 자신에게 충실하고 다른 사람을 신뢰하며 성실하게 대하는 일, 그다음에 세상의 여러 가지 일에 나아가 자신의 자질을 다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공부 안에 효도와 교우 관계, 성실성과 열정까지 다 담아야 그것이 진정한 공부라는, 그야말로 전인 교육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450년 세월을 뛰어넘은 평생 공부의 대가가 건네는 가르침은 인성 교육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요즘에도 여전히 배울 점이 가득하다.
다산 정약용이 말하는 공부의 모든 것
퇴계 이황보다 반오백 년 뒤에 세상에 난 다산 정약용. 다산이 천주학 사건으로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갔을 때 외로운 그의 마음을 봄볕처럼 감싸준 것이 있었다.
이웃에게 우연히 얻은 반쪽짜리 <퇴계집>이다.
다산은 어찌나 좋았는지 읽을 분량이 줄어드는 게 아쉬워 하루에 한 편씩만 아끼고 아껴 읽었다.
새벽에 한 편을 읽으면 오전 내내 흐뭇하게 이를 음미하다가 점심 먹고 나서 그 아래에 자신의 짧은 생각을 적어가는 식이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적어간 글 묶음이 바로 <도산사숙록>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둘은 ‘배움’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을 취하고 있다. 그 내용을 여명에 거울 보듯 가만히 들여다보자.
다산은 무엇보다 퇴계가 언급한 초학도의 자세에 깊이 공감했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을 꾸짖는 것에 더해 ‘섣부른 앎’에 대한 아집 또한 꾸짖었다.
세상의 문인과 학자가 혹 한 글자 한 구절을 남에게 지적당하면 속으로 그 잘못을 알아도 그럴싸하게 꾸며 굽히려 들지 않는다. 심할 경우, 얼굴이 벌게져서 사납게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마침내 해코지하고 보복하는 자마저 있다.
… (중략)…
진실로 잘못을 깨달았다면 마땅히 그 자리에서 생각을 바꿔 바르게 선을 좇아야 한다. 그래야만 형편없는 소인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초심자일수록 부족함을 아는 데서 공부가 시작되거늘, 이들의 법도는 세상의 이치와는 다른지 자꾸만 얕은 지식을 드러내고 자랑하려 한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다.
오류를 깨달아 인정함이 공부인 것을, 하물며 시간의 터널을 훌쩍 타고 넘어 현대를 사는 수험생조차 틀린 문제를 인정하고 꼼꼼히 되짚어보는 ‘오답 노트’가 합격의 비방인 것을 다 아는 세상이다.
그 쉬운 법도를 예나 지금이나 소인은 모르고 있다. 무릇,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음이 공부의 왕도다. 그저 고여만 있다면 그런 공부는 해서 무엇할까.
전라도 강진에서 오랜 유배 생활을 한 다산은 몸은 멀리 있어도 가족, 특히 두 아들에게 선비의 근본을 잊지 말 것을 편지를 통해 당부했다. 오죽하면 부인이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가 바래고 또 바래 노을빛이 되자 그것을 알맞게 재단해 거기에 글을 적어 보냈을까.
조선 후기 최고의 낭만파 선비였을지도 모를 그가 아들 ‘학유’에게 전한 글귀를 보자.
뛰어난 문장가가 되고 싶으면, “유향과 한유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고, 그와 꼭 같이 한다.
서법의 명가가 되려면 “왕희지와 왕헌지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고,
부자가 되고 싶거든 “도주공과 의돈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한다.
무릇 한 가지 바람이 있거든 문득 한 사람을 목표로 삼아 반드시 똑같아진 뒤에야 그만두기를 다짐해야 한다.
위 편지에서 다산은, “나는 반드시 저런 사람이 되겠다”라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 공부의 시작임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같은 말을 하자면 “인생의 멘토를 찾아라”라는 말과 일맥상통할 터.
조선 후기를 살았던 다산 역시 멘토의 중요성을 이미 꿰뚫어본 것이다. 그는 단순히 멘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똑같아지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말 것을 강조한다.
공부에 대해서만은 늘 열정을 다할 것을 주문한 아버지 다산은 또 다른 편지에서 아들 학유에게 독서의 요령에 대해서도 설파하고 있다. 다산 역시 언제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독서를 강조하며 새해마다 한 해치 독서 계획을 꼭 세운 인물이다. 그가 말하는 독서의 요령을 살펴보자.
무릇 독서란 매번 한 글자라도 뜻이 분명치 않은 곳과 만나면 모름지기 널리 고증하고 자세히 살펴 그 근원을 얻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차례차례 설명하여 글로 짓는 것을 날마다 일과로 삼아라.
이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어도 곁으로 백 종류의 책을 함께 들여다보게 될 뿐 아니라 본래 읽던 책의 의미도 분명하게 꿰뚫어 알 수가 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에 대해 깊이 연구해 지식을 넓히는 것이 바로 그가 말한 독서의 올바른 방법이다. 모르는 단어 하나를 만나더라도 끝까지 따져 살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얻은 지식은 다시 막히는 법 없이 평생을 간다.
먼 유배지에서도 두 아들에게 누차 강조한 그만의 독서법은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널리 배운다는 박학(博學), 자세히 묻는 심문(審問), 신중히 생각하는 신사(愼思), 명백하게 분변하는 명변(明辯),끝으로 성실하게 실천하는 독행(篤行)이 그것이다.
독서로 표현했지만 이는 곧 공부의 다섯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다산은 후에 실학으로 명명된 ‘오학론’에서 널리 배우는 것 한 가지 외에 남은 것이 없다며 개탄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성협 ‘풍속화’(33.2×33.4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요즈음은 하인이라는 신분이 없어졌지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 배려심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이덕무의 가르침은 현대에도 계승해야 할 것이다.
이덕무에게 배우는 선비의 작은 예절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에 버금가는 대문장가라고 할 수 있는 이덕무. 그는 그 시대에 도덕과 예절이 무너져 나라가 피폐해진 현실을 몹시 안타깝게 여겨, 선비의 작은 예절을 논한 <사소절>을 집필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작은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큰 덕을 허물게 될 것이다”라며, <서경>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했다. 이는 개인에게도 적용되지만 나라의 흥망성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이다. 그렇다면 <사소절>에서 배워야 할 작은 예절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먼저 배워야 할 부분은 성행, 즉 성품과 행실이다. 일생을 학자로서 공부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살았던 이덕무는 자칫 학문만 닦다 보면 마음을 가꾸는 데 소홀하기 쉽다며 늘 이를 경계했다. 마음 가꾸기에 소홀하다면 아무리 많은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덕무의 곧은 주관은 그가 소개한 원나라 유학자 허노재에 관한 일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어느 몹시 더운 여름날, 허노재가 하양 땅을 지날 때였다. 갈증이 심해 견딜 수가 없을 즈음 길가의 배나무가 눈에 띈다. 지나가는 사람 모두 앞다퉈 배를 따 먹는데 유독 한 사람, 허노재만은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배를 따 먹던 이들이 궁금해 그에게 묻는다.
“세상이 어지러워 이 배나무에는 임자가 없는데 그대는 왜 배를 드시지 않는가?”
허노재가 대답한다.
“배나무에 주인이 없다고 내 마음에까지 주인이 없을 리 있겠소?”
그의 꼿꼿한 양심 선언은 평소 마음 가꾸기에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나타난 행동임이 분명하다.
행실에서는 어떠할까. 이덕무는 “단점을 따라 장점을 보도록 하라”는 말로 인생 철학을 설파한다.
단점이 전면에 드러날 때 오히려 상대의 장점을 힘써 기억해내라는 뜻이다.
그 방법 또한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상대가 융통성 없이 고지식해 보인다면 그 단점대신 장점인 곧은 성품을 생각할 것이며,
남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을 보면 그의 순박한 성품을 기억할 것.
또 뭔가를 자주 빠뜨리는 실수를 하는 사람이라면 일을 민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장점이 있음을 떠올릴 것. 이른바 ‘용납의 도리’를 펼치라는 것이다.
성품과 행실을 제대로 가꿨다면 이제 말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을 배울 차례다. 말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지 않아야 할 때를 간파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이덕무는 말한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음란하고 문란한 말(음설)을 들을 때는 맞장구를 쳐서는 안 되며,
궤변으로 행패(패란)를 부릴 때는 대꾸할 가치도 없고,
거짓으로 허황하게 지어낸 말(탄망), 남을 비난하고 헐뜯는 말(기산), 상황에 따라 속이는 말(기사), 거짓말을 섞어 부풀린 말(과장), 원한으로 가득 찬말(원한지언)에도 절대 대답해서는 안 된다.
이에 더해 이덕무는 옆에 누가 있느냐를 살피며 할 말 안 할 말 가리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여름인데도 질병이나 다른 이유로 더위를 참아가며 두꺼운 솜옷을 입은 이웃이 옆에 있다면 비록 덥더라도 덥다고 말하지 말 것이며,
반대로 옷이 없어 홑옷을 입고 떨고 있는 이웃 옆에서는 비록 춥더라도 춥다고 유난을 떨지 말아야 하며,
양식이 없어 굶는 자가 옆에 있다면 반찬의 간이 맞지 않는다고 투덜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선비의 품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입고 먹는 것에도 당연히 예절이 있으니 이 또한 배워야 할 덕목이었다. 이덕무는 좋지 않은 옷을 입거나 질이 나쁜 음식을 먹더라도 염괴심, 즉 싫어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자신의 형편에 만족하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조선 시대 선비 정신이기도 했다. 이덕무는 자기가 주위를 둘러본 바로는 자신의 친척인 심계 심채진(1738~1808)만이 그런 자족의 도리를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심계는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전남 곡성을 중심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선비다. ‘마음계곡’을 뜻하는 호 ‘심계’ 처럼 마음이 어찌나 깊었는지 후에 그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아래와 같은 시문을 짓기도 했다.
늙은이 한평생 살 곳이 없어
10년을 주희(朱熹)의 글만 읽었네
돌아온 산 아래 삼간 집 있어
한가로이 시내에 앉아 고기 떼 굽어본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이덕무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천하영유불감식지곡(天下寧有不堪食之穀).”
세상에 먹지 못할 곡식이 어디 있겠느냐는 뜻이다.
이렇게 귀한 음식을 나눠 먹는 정신에 대해서도 이덕무는 몇 가지 지침을 내놓았다.
집에 때아닌 음식이 생기면 적은 음식이라도 귀천을 따지지 않고 나누어 먹으며, 남과 함께 대접받을 때는 혼자만 급급하지 말고 고르게 나누어 먹도록 하라.
또 주인이 먹는 것에 비해 떨어지는 음식을 손님에게 대접하지 말아야 하고, 억지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생활 모두가 마음 공부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덕무는 선비의 행동거지는 군자의 성품에서 우러나와야 함을 강조하며 몇 가지 배워야 할 성품을 들고 있다.
첫 번째 온아(溫雅), 온순하고 단아해야 하고,
두 번째 교결(皎潔), 성품이 맑고 깨끗해야 하며,
세 번째 정민(精敏), 정확하고 민첩해야 하고,
네 번째 관박(寬博), 너그럽고 큰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네 가지 성품을 소유한 군자라면 인의 도리를 체득한 자요, 천지만물을 배움에 부족함이 없는 자임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 가꾸기에 열정을 다해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이들은 또 누가 있을까.
성협 ‘노상풍정’(33.2×33.4cm,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람이 길을 가는 모습과 길을 가면서 하는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옛 선현들은 ‘도보로 큰길을 갈 때는 복판으로 걸어가지 말라’ 는 등의 노상 예절도 강조했다.
옛이야기에서 슬기를 깨닫다
올곧은 청빈함 때문에 지명까지 바뀌게 한 조선 전기 문신으로 한계희가 있다.
그는 정승의 아들이자 당시 세도가인 부원군 한명회의 육촌형이다. 집안이 이쯤 되니 집안의 부귀영화인들 오죽했을까 싶지만, 그는 나라에서 받는 녹봉조차 친척 가운데 홀어미나 고아에게 나눠주고 근근이 살았다.
아침저녁을 나물에 검소한 음식으로 지낸 것도 과분하다 하여 그 양과 횟수를 줄일 정도였다는데, 문제는 함께 고생하는 그의 가솔이었다. 문중이 보기에 민망할 지경이었다.
결국 한명회를 비롯한 집안의 친척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현재의 동대문 밖 고암(鼓岩)에 있는 논 열
섬지기를 주기로 한 것이다. 반복되는 거절에도 자리를 뜨지 않으며 너무 곡진하게 호소함에 어쩔수 없이 논을 받은 한계희. 그러나 이듬해부터 그 논에서 거두어들인 곡식은 절대로 한계희의 집담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고암 둘레에 사는 병든 자나 과부, 고아에게 골고루 나눠준 것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고암이란 이름에서 ‘고’자를 편안할 안(安)자로 바꿔 ‘안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의 고려대가 있는 안암동이 바로 이곳이다.
청백의 대명사로 조선 전기 문신 보백당 김계행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열일곱에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관직에 연연하지 않은 탓에 쉰한 살의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간 그는 17년의 관직 생활을 마치고 고향 안동에 만휴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만년에 휴식을 취한다”는 뜻으로 마치 신선이 쉬었다 갈 것 같은 이 정자에 오르면 김계행의 청렴함을 알 수 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나의 집에는 보물이 없네 /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 뿐이네.”
그의 호인 ‘보백당’은 바로 여기에서 ‘보백’ 두 글자를 따온 것이다.
죽기 직전 자손에게도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돈독한 우애와 독실한 효심을 유지하도록 하라.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말라”고 당부한 보백 선생이었다.
조선 중기의 무장으로 법도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는 청백리로 살았던 전림 역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가슴 뜨끔한 가르침을 준다. 왕자 회산군의 집 짓는 곳을 지나다 그 규모가 너무 큰 것을 보고 공사감독을 불러 야단을 친 결과, 회산군의 집은 ‘납작집’이라고 할 만큼 볼품이 없어졌으며, 당시 세도가인 홍윤성의 하인들이 그 세도를 믿고 장안에서 횡포를 부리자 법이 우선이라며 그들을 모두 잡아들인 일화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보여준다. 서슬 퍼런 기강은 아들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아들이 횡포를 부리자 죽임으로 죄를 다스린 것이다.
요즈음의 공직자와 견줘보면 추상 같은 의지만큼은 배워야 할 덕목이라 하겠다.
마음 가꾸기에 일가견이 있는 이로 우리나라 최고 명필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도 언급하지 않을 수없다.
윤상도 옥사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 했던 추사.
좁은 방 안에 거미와 지네가 기어다니는 험한 집은 양반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에겐 견디기 힘든 환경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콧속에 난 혹은 숨 쉬는 것을 방해했고, 혀에 난 종기 때문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던 어느 날,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까지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도 붓을 들었다. 화가 날 때도 외로울 때도 서러움이 복받칠 때도 한결같이 붓을 들면서 비로소 한 가지 배운 것은 바로, 인생을 긍정하는 법이었다.
고통의 시간이 그에게 인생을 버틸 수 있는 큰 깨달음을 선사한 것이다. 이 유배지에서 바로 김정희의 추사체가 탄생했다. 이 봄에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이야기들이다.
글 전희영(방송작가)
자료협조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도서 <함양과 체찰>(신창호 엮고지음, 미다스북스 펴냄), <다산어록청상>(정민 지음, 푸르메 펴냄), <양반가문의 쓴소리>(조성기 지음, 김영사 펴냄), <키질하던 어머니는 어디 계실까?>(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www.koya.kr)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옛 성현의 마음 공부법,
바른 품성을 심어주다
서원에 깃든 예의 가르침
서원은 단순히 공부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나를 만족시키기 전에 타인을 배려하고 남
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연마하는 배움의 공간이었다.
스승은 이곳에서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지식을 쌓는 법보다 자신을 먼저 세우고 백성에게 다가가는 법을,
또 상대방에게 내 뜻을 강요함이 아니라 상대방으로 인해 내가 변화하는 능력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타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가르침이 밖으로 드러나 표현되면 곧 사람의 인품과 됨됨이를 이루며, 기본에 충실하고 예의를 근본으로 삼는 바른 사회가 된다고 믿었다.
서원 건축의 백미로 불리는 병산서원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몸가짐과 정신 자세를 다독이는 글귀를 보노라면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발길 닿는 곳마다 마음을 바로잡고 행동을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이 녹아 있는 공간, 사람에 대한 예의에서 배움과 학문에 임하는 예의까지, 바로 예가 집약된 공간이 서원이다.
서예로 다스리는 마음 수양
“글씨 모양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글씨를 쓰는 것이 바로 마음을 닦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북송의 성리학자인 정명도는 마음을 수양하는 공부를 학문의 본질이라 했고, 옛 학자들은 아름다움을 알고 즐기며, 또 정신을 고요히 집중시키면 마음이 저절로 윤택해지고 편안케 되는 글씨 공부를 마음 수양의 수단으로 여겼다. 역사상 이름난 대학자나 명재상들이 모두 서예를 중시한 것도 정신을 수양하고 큰 일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는 기초를 닦고, 나아가 천지 자연의 이치를 깨우치기 위해서였다.
벼루에 맑은 물을 붓고 은은한 묵향에 젖어 마음을 갈고 하얀 화선지 위에 먹색을 수놓는 작업은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어떤 글자라도 정성스레 쓰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짐을 느낄 것이다.
배려의 미덕을 배우는 밥상머리 교육
예부터 우리 선조는 식사 예절을 통한 인성 교육을 중요시했다.
이는 조선 시대 대표 명문가로 꼽히던 서애 류성룡 집안의 밥상머리 교육에서도 엿볼 수 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앞에 두고 참고 절제하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 어른이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리게 했고, 어른에 대한 예의와 남을 배려하는 인성을 키우기 위해 모든 가족이 모여 먹도록 했다.
또 조선 시대 가정백과 사전 <규합총서>에는 사대부의 식시오관(食時五觀), 즉 사대부가 음식을 먹을 때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헤아리라 일렀다.
먼저 이 음식에 들어간 정성을 헤아리고,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음식을 탐하지 말며, 음식이 약이 되도록 골고루 먹고, 인성을 갖춘 사람만 밥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선조는 밥상머리에서 비롯한 습관이 아이의 인성 전반을 규정한다고 믿었다.
음악을 통해 성취하는 인의예지
공자는 음악으로 도를 완성해 군자의 학문을 마무리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음악이 마음 수양에 주는 의미는 매우 크다. 옛 고전 <사기>의 ‘악서’에는 “음악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면, 마음을 원만하고 곧고 자애롭고 참되게 만들 뿐 아니라 즐거움에 이르게 하여 마음에 평안함을 주며, 더 나아가서는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했고,
“궁(宮)은 비장을 움직여 성심(聖心)을 조화롭고 바르게 만들며, 상(商)은 폐를 움직여 의(義)를, 각(角)은 간을 움직여 인(仁)을, 치(緻)는 심장을 움직여 예(禮)를, 우(羽)는 신장을 움직여 지(智)를 조화롭고 바르게 만든다”고 했다.
이 말에서 본다면, 동양의 음계인 궁상각치우의 오음이 오장육부를 운동시켜 활기를 주며, 동시에 사람의 성정도 조화롭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에디터 조민진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승헌 스타일리스트 양은숙어시스턴트 김소혜, 이영주 붓글씨 원승상
참고도서 <공자, 마음의 병을 치유하다><한국인의 문화유전자>(안명희) 지음, 한국국학진흥원 엮음, 아모르문디 펴냄), 소품협찬 가야금(인간문화재 고흥곤국악기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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