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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화요일. - 어디로 갈거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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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디로 갈거나
부활 6주 화요일-2021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늘은 주제와 좀 동떨어진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제자들을 나무라는 오늘 말씀인데
제자들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이유가
자기들도 거기로 따라가야 하는데 그러기 싫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도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오늘은 어디로 갈 건지를 일부러 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옛날에 ‘어디로 갈거나’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나.
이 강을 건너도 내 쉴 곳은 아니오. 저 산을 넘어도 머물 곳은 없어라.’
그때는 이 노래가 우리의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과도 어울려서,
그리고 꽤 철학적인 가사가 마음에 들어 가끔 흥얼거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저 감상에 젖어 흥얼거린 것이고,
어디로 가는지를 지금처럼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요.
어디로 가는 것과 관련하여 옛날의 저는 이 세상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 세상을 넘어 어디로 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게 되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복음의
주님처럼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히 말하지만, 어느 정도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고,
초월하였기에 죽음에 초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너무 지나친 얘기라면 한 발은 이미 저 세상에 있고
다른 한 발은 아직 이 세상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양다리 걸치기인데, 보통 양다리 걸치기는 안 좋은 뜻이지만
지금 저의 경우는 이 세상을 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한 발 딛고 있지만, 심정적으로 발을 확실히 담그고 있는 곳은
언젠가 가야 할 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몇 주 전 한 형제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일 저일 벌이기보다는
하나라도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것이 후배들에게 이롭지 않겠냐는
충고를 들었는데 저를 콕 찌르는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제겐 오래전부터 그것에 동의할 수 없는 지론이 있는데,
그것이 저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늘 경계했던 것이 제가 시작한 일 제가 끝까지 붙잡고 있으려
하거나 제가 시작한 일이 성공적이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안주란 편안함에 대한 안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일에 안주하는 것도 있고
남자에게는 일에의 안주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젊었을 때도 제가 시작하고 하던 일을
즉시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더욱
그러해야 할 때이고,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제게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떠나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죽는 것은 두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선종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닥치면 떠나길 두려워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를 늘 물으며 살아야 하고,
간다면 골로 가지 않고 아버지께 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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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 받아 오셨다는 것과 보내신 분의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고 하시니, 이는 무슨 말씀일까?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서만 아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합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오로가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판단으로 알아보지 않으렵니다.”(2코린 5,16)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함께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입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이며, 삼위일체 사랑의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랑은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아닌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주님!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영을 보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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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떠나 보면 알거야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 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낯섦을 동반합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성령께서 오시어 모든 그릇된 생각들을 바로잡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편협함에 갇혀 하느님까지 거부하는 죄의 속성을 바로잡아 주실 성령은 어쩌면 우리에게 힘겨운 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존 습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을 수 있는 변혁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바꾸어 새로움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감히 포기하지 못하는 기존의 삶을 부둥켜안은 채 철저히 성령과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살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박병규).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성령이 오시어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야기(루카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자신의 주제를 안 것이고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의 사랑과 품이 얼마나 큰지를, 아니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 보면 알게 됩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보십시오.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 중심의 편협한 삶에 갇혀 나 자신을, 이웃을, 하느님을 거부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죄로 말미암은 관계의 단절이 있다면 지금 서둘러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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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이슬람은 라마단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월절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절이 지나고 부활 축제기간 중이었습니다. 요르단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려고 이스라엘로 많이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이라서 국경에 직원들이 평소보다 적었습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많이 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것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1시간이면 충분했는데 이번에는 3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여러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상황이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짜증을 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짜증을 낸다고 상황이 바뀔 리는 없었습니다. 새치기 하는 분들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새치기한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분도 보았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요르단에 왔으니 요르단의 법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새치기 하는 분들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나는 성지순례를 왔지만 저분들은 생존의 문제가 달린 것이니 기꺼이 자리를 양보한다고 하였습니다. 맞았습니다. 우리는 늦게 이스라엘에 도착해도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분들에게는 기다리는 버스가 없었습니다. 저도 성지순례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짜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면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나가면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다리면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마침 강의 내용이 ‘도마복음’이었습니다. 평소에 듣고 싶었는데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2시간 동안 기다리면서 강의를 들으니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이 제게는 기쁨이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이 사자와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이 사자에게 먹히면 불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가 인간에게 먹히면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는 육체의 욕망이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욕망에게 사로잡히면 불행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물이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명예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권력이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었습니다. 재물이라는 사자는 가난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명예라는 사자는 비움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권력이라는 사자는 겸손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요르단에서 넘어오는 이스라엘 국경에서 저는 사자와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이 많았던 분들은 사자에게 물어뜯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감사와 기쁨이 많았던 분들은 사자를 온순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자를 가난과 비움 그리고 겸손으로 따듯하게 받아들이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욕망, 명예, 권력에 젖어있던 간수는 사도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난, 비움, 겸손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사자의 우리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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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화가 중 하나로 뽑힙니다. 대상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전통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빛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대상의 색과 형태를 포착하여 그리는 인상주의로 당대 미술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년에 화가에게 치명적인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 악화로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을까요? 만약 포기했다면,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수련’ 연작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누구나 어떤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이때가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봐야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좌절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새로움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을 만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에 절망과 포기의 연속이었지만, 주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이라는 새로움은 그들에게 새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에 근심이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없는 새로움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성령을 통해 또 다른 삶, 새로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신다고 하셨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많은 은사와 열매를 받은 제자들은 새롭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기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 좌절과 절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을 봐야 할 때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실라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바로 믿음만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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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잘못이다(알렉산드르 푸시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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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삶
-보호자 성령과 함께 하는 삶-
참으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영적승리의 삶을 소망할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영적승리의 삶도 선택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선택의 은총입니다. 선택의 은총이요 선택의 행복입니다. 참으로 보호자 성령과 함께 살아갈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예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잠깨어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고 나가면 맨먼저 보는 밤하늘 하늘이요 다음엔 늘 거기 그 자리의 영원한 도반 불암산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살라고 눈들면 별들이요, 땅의 꽃처럼 살라고 내려다 보면 무수한 꽃들입니다. 요즘의 한국은 어디나 신록에 꽃들 만발한 천국같습니다. 아무리 나눠도 새롭고 좋은 다음 시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앞뜰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애기똥풀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이들이야 말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요 제 주변에는 이런 영적도반들이 많습니다.
어제 파코미오 원장 수사의 영명축일이 마치 내 영명축일인 듯 기쁘게 지낸 영적승리의 하루였습니다. 어제의 강론을 축일 선물로 드렸고, 다음 내용이 축일 선물로 보낸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성모님’을 ‘장모님’으로 보낸 오타 덕분이었으니 전화위복입니다.
“왜관 피정집 장모님께서도 기뻐 축일 축하드립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 난감했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니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이 장모님이라면 ‘성모님의 사위’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성모님의 사랑은 없을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유쾌하고 좋은 축일 선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 강론을 축일 선물로 보낸 것이지요. 바로 이런 유우머의 덕담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불가의 성철 대선사가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다섯가지 수행지침이 생각납니다.
1.많이 먹지 마라.
2.많이 말하지 마라.
3.많이 자지 마라.
4.간식하지 마라.
5.많이 책보지 마라.
영적승리의 삶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구체적 수행 지침들에 공감했습니다. 얼마전 의사분의 충고도 잊지 못합니다. “당뇨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간식하지 말고 체중을 줄이세요.” 이 또한 저에게는 명심해야할 수행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먹는 대로 됩니다(I am who I eat)”. 적게 먹어 병이 아니라 지나치게 먹어 병입니다.
어제 강론에도 인용했고 어느 자매와도 나눈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얼굴은 사람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 순수로 빛났던 젊음의 얼굴들이 욕망대로 무절제의 삶을 살다 보면 괴물같은 노년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은 한폭의 그림같습니다. 평생 그려가야 하는 인생 그림이듯 평생 꼴잡아가는 얼굴입니다.
웃으면 꽃같은 사람 얼굴인데 웃지 않을 때는 괴물같아 보일때도 많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바로 제가 말씀 처방전 약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대로 살면 꽃같은 얼굴에 영적승리의 삶이 보장됩니다. 바로 보호자 성령께서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이 말씀에 꼭 찍어 드리는 “웃어요!”라는 스탬프입니다. 웃을 때 하늘의 별같은 얼굴이, 땅의 꽃같은 얼굴이 됩니다. 웃을 때 꽃처럼 피어나는 사람의 얼굴들입니다. 기쁨도 기도도 감사도 의식적, 의도적 선택이요 훈련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수행자들의 영적승리의 삶을 위한 구체적 처방입니다. 오늘 복음이 영적승리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보호자 성령임을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힐 것이다.”
보호자 성령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의 삶임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떠남이 죄요, 주님과 함께 함이 의로움이요 주님과 함께 할 때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바로 성령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에 구원의 삶임을 말해 줍니다. 성령과 함께 파스카 예수님과 일치되어 살 때 죄에서의 해방, 의로움의 성취, 심판에서 벗어납니다.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영적전쟁입니다. 바로 파스카 예수님의 영적승리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다음 복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ㄷ).
바로 영적승리의 삶을 모범을 보여주는 제1독서의 바오로와 실라스 일행입니다. 온갖 고통과 시련중에도 오뚜기 같은 두제자입니다. 무지몽매한 군중의 승리인 듯 하나 바오로와 실라스의 승리요 주님의 승리, 성령의 승리입니다. 깊은 감방속, 발에 차꼬를 채웠지만 이들의 영혼은 자유로웠습니다. 자정 무렾에 이들은 하느님께 찬미가를 불렀고 다른 수인들을 귀기울여 듣습니다.
그러자 즉시 발생한 기적이 상황을 일변시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자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감옥문들은 저절로 열리고 사슬도 풀렸습니다. 마침내 간수의 구원에 까지 이르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두제자의 영적승리의 삶을 보여줍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두 제자들로부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두 제자들은 이 가족으로부터 음식 대접에 환대를 받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니 참으로 통쾌한 영적승리의 기쁨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실 때 백전백승의 승리요, 전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 없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요약한 영문 한구절이 저에겐 화두처럼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하느님은 구부러진 선으로 곧게 쓰실 수 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사막교부의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구부러진 선으로 곧게 쓰시는 주님을 모시고 성령따라 살 때 언제 어디서나 곧은 삶, 영적승리의 삶에 하느님의 나라, 천국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바오로와 실라스가 그 모범입니다. 탓할 것은 주님과 함께 못하는 내 믿음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위 잠언 말씀을 입증하는 제 “메꽃들”이란 시입니다.
“이 가지 저 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피어 내며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들!”-1997.8.21.
무려 26년전 제 정주의 꽃자리 여기 요셉 수도원에서 쓴 자작 애송시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끊임없이 하늘 사랑 꽃피어 내듯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써온 강론에 제가 놀라고 감사한 마음 차고 넘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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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오늘은 위의 구절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생각을 잘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찬찬히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죄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기준은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은 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도 아니고 늘 항상 그런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은 자기를 위하는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즉 죄와 선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느님 반대편에 있는 것, 혹은 하느님과 반대로 향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간혹 세상은 세상이 만든 기준으로 죄와 그렇지 않음을 구분합니다만 그 안에는 많은 오류를 품고 있습니다.
저는 의로움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의로운 삶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욥, 요셉….
그들 모두 나약한 인간이었으나 그들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성경에서 전하는 이유는 모두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이 이야기하는 정의로서의 의로움과 하느님께서 보시는 의로움과는 그 결이 조금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심판은 사람이 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심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심판은 그 모든 권한이 하느님 아버지께 있습니다. 즉 사람이 그 기준이 아닌 하느님께서 그 심판의 기준이 되십니다.
세상은 사람이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죄인이라고 혹은 의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우리는 가여운 사람인 동시에 하느님을 따르려 부단히 노력한 의롭고자 노력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보호자께서는 하느님의 이러한 자비를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보호자가 오실 것입니다. 이미 오셨고, 또다시 새롭게 오실 것입니다.
볕이 잘 드는 곳에서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아 보세요.
이런 일들, 저런 일들을
헤치고 넘으로 살아온
나와 함께
앉아 보세요.
외롭지 않도록
너무 슬프지 않도록
너무 아파하지 않도록
볕을 나에게 선물하세요.
그 온기가 따스함이
전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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