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나빔 외 1편
김종연
눈 감으면 속이 꽉 찬 쇳덩이를 쇳덩이로 내려치는 소리
부술 수 없는 걸 부수려는 소리
서사를 채워본 사람만이 서사를 떠날 수 있다지
늙은 개가 마지막으로 건네준 공을 받아들고 던져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너
나를 기다렸나요 내가 돌아왔어요
그동안 다닌 세상의 모든 냄새를 묻혀서 돌아왔어요
그래 이제 다음은 없구나
마음을 다 가라앉히고 맑게 뜬 슬픔만 마시고 싶어
바닥이 다 젖은 터널을 아주 오랫동안 걷고 싶어
동물처럼 공을 좋아하고 싶어
동물이고 싶어
동물도 아니고 싶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고개를 저어 가면서 진술을 마치고 싶어
사람처럼 웃으면서
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좋은 꿈을 꾼 것 같아
찾는 건 헤매는 일이니까
헤매지 않고 찾아낸 게 있다면
그것이 너를 찾아 오래 헤매 왔다는 뜻이니까
그래 이제 다음은 없구나
사랑하는 이여
당신을 오랫동안 괴롭히던 자가 죽었다
나는 이 소식을 당신에게 전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붉은 화살표를 따라서
마음은 내내 켜 두는 것보다 깜빡이게 두는 것이 더 잘 보여서
우리는 눈을 마주치면서 자주 눈을 깜빡이고
순간순간이 모두 긴 꿈을 꾸는 것만 같아요
그때마다 누군가가 제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달려와서는 나를 지나쳐 가는 것 같다
그렇게 멀리멀리
너무 멀리
생각이 멈춘 뒤에도 여전히 달려가는 머리처럼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몇 걸음 더 가는 다리처럼
집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보고 명복을 비는 영혼처럼
그래 이제 다음은 없구나
이것은 부정을 모르는 시
너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시
진통되지 않는 진통제가 필요해서
책장의 책을 모두 꺼내 햇볕에 말리던 시절
밤마다 동산에서 악쓰던 사람처럼
여기요! 여기요! 부르던 사람처럼
찾아가도 여전히 악을 쓰던 사람처럼
악도 오래 쓰면 선이 된다는 듯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만이 지금껏 삶을 인도해왔다는 듯이
홀이라는 말에는 남겨진 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얼굴은 이제 알 수 없게 되었다
서사를 채워본 사람은 서사에서 벗어나고 싶어지니까
깜빡깜빡 삶에서 깨어나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 살아가다보면
한밤중 자동차 경보음 소리
내다보면 아무도 없다
필요한 걸 가진 사람들은 모두 지하로 떠나는군요
지하에 지상만큼의 집을 쌓아두었어요
구불구불 끝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내시경처럼
인간의 파형을 따라 무한히 옮겨가며 연주되는 음악처럼
삶에 대한 의심이 삶을 끌어가게 하지만
그것이 가끔은 긴 시가 되어주지만
그래 이제 다음은 없구나
새벽에 깨어 한 단어를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리고
기차로는 도착할 수 없는 섬으로의 여행을 꿈꾸는 내게도
영혼의 임시 거처로 쓰일 만한 몸은 남아 있는데
아이는 영혼을 어떻게 견뎌 낼까
자신의 생전 모습을 액자에 담아 침대 옆에 두고 저절로 깊어지는 눈을
어떤 새도 물어 가지 못한 그것을
한여름 눈앞에서 새가 죽어 떨어지고 울던 매미가 울음을 멈추고
나쁜 꿈을 꾸고 나서 어떤 책도 펼쳐볼 수 없는
길고 긴 권태의 시간들을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영원한 마들렌을
그래 이제 다음은 없구나
너는 사람의 옆에 앉아 무언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지만
아니야
떨어지지 않은 것도 모두 너의 것
가장 위에 둔 것도 모두 너의 것
떠올릴수록 멀어지고 마는 것
넘쳐흘러도 언제나 부족해지고 마는 것
눈 감으면 속이 꽉 찬 쇳덩이를 쇳덩이로 내려치는 소리
부술 수 없는 걸 부수려는 소리
형언할 수 없는 걸 형언해보려고
내게 던져준 걸 돌려주려고
그래 이제 다음은 없구나
사랑하는 이여
지상의 다리는 이제 모두 위태로워 보입니다
내게는 아직 말하지 않은 게 남아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나는
당신과 저 다리를 건너야겠습니다
환영의 안쪽
-에게
언제나 시 한 편이 부족하다 여기에도
약을 하루치씩 남겨두는 습관처럼
슬픔이 투명해서 알록달록한 속이 다 비치는
제 등을 어둠 삼아 잠든 새의 꿈에서
다리 달린 환영의 전집은 탄생하고
아무리 깨어나도 오늘이고 마는 도서관의 복도를
비에 젖은 장화를 신고 걸어 다니다보면
책꽂이 가장 높은 곳에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그것
그것의 강령은
그것을 말하기 위해 그것을 소비하지 말 것
오래된 나무 냄새 그윽한 도서관은
강철로 만든 책을 품고 있다 단단하게 굳은 정념―그것은 우리의 십대에 꽂혀 있다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게 용기고
왜 좋은지를 알게 되었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게 사랑이니까
시도 시인을 필요로 하진 않으므로
쓸모를 잃어버린 기쁨으로 이삭을 주워라
다정하게 네 손을 베어갈 때까지
보이지 않는 비유는 폐기된다
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비유는 사람을 죽게 만드니까
그들은 시로부터 자유로워진 자들
모두 다른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는 자들
낳을 수 없는 사람에게도
낳는다는 비유가 작동하듯이
이제 이야기해야하는 건 삶이 아니라 사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시집에는 언제나 시 한 편이 부족하지
주파수를 맞추듯이 하나의 목소리를 찾아서
수많은 잡음의 밤거리 눈이 내리고 사람들이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포근하고 적막해서
모두가 한날한시에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어도
여기는 장면이구나 우리는 드라마구나 흑백 화면에 자막으로 흘러가는
낙천적인 슬픔처럼
2091년까지 남은 보험처럼
다리 달린 환영은 여전히 복도를 걸어 다닌다
환영의 취미는 마음에 드는 문의 손잡이를 쥐었다가 벼락같이 옆문을 열어젖히는 것
아직 태어날 때가 안 된 것들 웅성거리고
젖어 버린 알약
세상이 복용하기 시작해 버린 알약
집의 입속에서 녹아 사라져 버리는 그것
푸드덕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우리는 동등하게 잃을 게 있지
항구적인 슬픔을 찾아 떠난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운 얼굴로 돌아왔지만
그것은
스스로 말한다
전집은 한 권의 무게만 못하다고
불 꺼진 열람실에서 다른 사람의 책을 몰래 읽고 다시 꽂아 두었다가
그 사람의 전집을 쓰게 된 사람처럼
도서관 복도를 서성이는 다리 달린 환영
복도의 모든 문을 열고
노를 집어넣으면 배가 되고
나의 책장 가장 높은 곳으로 항해하는 그것
이 모든 강철들이 한 번씩은 다 흘러갔다고
차갑고 단단한 페이지를 열어젖히면서
상상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항해하는 쇄금선
금을 다 깨뜨리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아름다움을 통과하는 관념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것은 마디의 리듬
뚝
뚝
손가락을 하나씩
꺾어 가면서
새가 제 등을 어둠 삼는 것처럼
어둠 속으로 퍼져 스며들듯이
조용하고 고요하고 적막하게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여기에는 더 많은 강이 필요하다
건너가기엔 조금 짧아서 건너가지 못할 다리도
너는 내가 돌아볼 때마다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어준다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서
시집에는 언제나 시 한 편이 부족하지
다리 달린 환영은 이제 다른 복도를 찾아다니고
각주 없이도 인용이 가능한 시
오래 전에 쓴 사람과 함께 지워진 시
도서관에 꽂힌 책 중에 그런 건 없는데
강을 보는 사람은 강이 보일 때까지 걸었다는 것
누구에게나 아직
하루치의 약은 남아 있다는 것
지금도 등을 어둠 삼아
한 사람이 가진 환영의 안쪽을
가장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
그럴 때면 언제나 좋은 이웃처럼
날개도 다리도 달린 네가 문 앞에 와 있었다고
김종연
1991년 서울 출생. 2011년 월간 『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월드』, 『검은 양 세기』를 출간했다. 제23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