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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선녀의 선택
유안진
착하다고 믿었던 남편이 날개옷을 내놓자 기가 막혔지요, 우리가 정녕 부부였다니? 내 남편이 선녀들의 벗은 몸을 훔쳐본 치한이었다니? 끓어오른 경멸감과 배신감에, 날개옷을 떨쳐입고 두 아이를 안고 날개 쳐 올랐지요, 털끝만치도 미안하긴커녕 억울하고 분할 뿐이었지요
오오 그리운 내 고향! 가슴도 머리도 쿵쾅거렸지요, 큰 애가 아빤 왜 아니 오느냐고 하자, 비로소 정신이 났지요, 애들이 제 아빠를 그리워한다면? 천륜天倫을 갈라 놓을 권리가 내게 있는가? 아쉬우면 취하고 소용없어지면 버려도 되는 게 남편인가? 우리 셋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까? 옥황상제님도 잘했다고 하실까? 글썽이는 아이들의 눈을 보자, 탱천했던 분노도 맥이 빠지고......
아궁이에서 활활 타는 날개옷을 바라보니, 뜻 모를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분명 나는 웃고 있었지요, 내 하늘은 이 오두막이야, 우리집이야, 마당쪽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까르르 밀려왔지요.
----유안진, [선녀의 선택--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고쳐쓰다]({다보탑을 줍다},창비, 2004년) 전문
옛날 옛적에 한 나무꾼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나무꾼은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는 사슴을 구해주었고, 그 공덕으로 금강산 연못가에서 하늘나라의 선녀를 만나게 되었다. 어느 덧 세월이 지나고 나무꾼과 선녀는 두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다. 따라서 나무꾼은 그의 아내인 선녀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믿어버린 나머지,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 선녀가 입고 내려왔던 날개옷을 그의 아내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날개옷을 되찾은 선녀는 그 남편과의 인연의 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 두 아이들을 양 옆에 끼고 하늘나라로 날아 올라가 버렸던 것이다. 나무꾼이 자기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발을 동동동, 구르고 있을 때, 바로 그때에 또다시 사슴이 나타났다. 나무꾼은 그 사슴이 가르쳐 준대로 금강산의 연못가로 달려가게 되었고, 때마침 금강산의 연못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하여 내려보낸 두레박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이고, [선녀와 나무꾼]은 전래동화로서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과 심금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유안진 시인은 194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심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바가 있다.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달하}, {절망시편}, {그리스도, 옛애인}, {달빛에 젖은 가락}, {영원한 느낌표}, {누이}, {봄비 한 주머니}, {다보탑을 줍다} 등이 있다. 또, 그리고, ‘한국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월탄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가 있으며, 서울대학교 소비자 아동학부 교수로 재직한 바가 있다. 유안진 시인의 [선녀의 선택]은 전래동화인 [선녀와 나무꾼]의 창조적 패러디이며, 선악을 넘어서서 이 세상의 삶의 본능을 옹호한 낙천주의의 찬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방이란 어떤 저명한 작품을 단순하게 복사한 것을 말하고, 창조적 패러디란 어떤 저명한 작품을 단순하게 복사한데 그치지를 않고 그 작품을 넘어서서, 더욱 더 뛰어나고 아름다운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것을 뜻한다. 창조적 패러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학문(예술)의 예비학으로서의 비판철학(풍자와 해학의 정신)이며, 따라서 유안진 시인은 부부간의 천륜天倫과 이 세상의 삶을 거부한 [선녀와 나무꾼]을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하늘 나라가 아닌 이 세상의 삶을 더욱 더 크게 끌어안게 된다.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착하고 훌륭한 것을 말하고, 악이란 악하고 부도덕한 것을 말한다. 선이란 좋은 것이고, 악이란 나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저마다의 선과 악에 대한 가치기준표를 지니고 있으며, 또,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소속되어 있는 정당과 단체와 민족과 국가마저도 그 조직의 수준에 걸맞는 선과 악에 대한 가치기준표를 지니고 있다. 좌우명, 신념, 도덕철학, 당헌 당규, 도덕, 법, 국가의 이념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치기준표들은 정언명령----‘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으로 되어 있으며, 그 정언명령(도덕명령)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거스르게 되면, 그 주체자는 그가 소속된 공동체 사회로부터 처벌을 받게 된다. 부자일 때는 가난한 자를 욕하고 가난할 때는 부자를 욕한다는 말도 있고, 나의 연애는 로맨스이고 타인의 연애는 불륜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들은 선과 악에 대한 우리들의 도덕철학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며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선과 악에 대한 가치기준표가 매우 불분명하고 자의적이기 때문에,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정당과 정당,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들의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며, 그 싸움 자체가 우리 인간들의 삶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욕망은 선한 것이고, 너의 욕망은 악한 것이다. 하지만 선의 기원은 악이고 악의 기원은 선인 것이다. 왜냐하면 선과 악이란 동일한 것의 양면에 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의 개념은 시대, 인종, 위치, 환경, 상황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매우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그 선악을 넘어서서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유안진 시인의 [선녀의 선택]은 도덕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선녀가 그 도덕주의를 넘어서서, 이 세상의 삶의 본능을 옹호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첫째 연의 선녀는 도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선녀이고, 둘째 연의 선녀는 그 도덕주의의 한계를 깨달아 가고 있는 선녀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연의 선녀는 그 선악을 넘어서서 이 세상의 삶을 옹호하고 찬양하고 있는 선녀이다. 우선 선녀는 “착하다고 믿었던 남편이 날개옷을 내놓자 기가 막혔지요, 우리가 정녕 부부였다니? 내 남편이 선녀들의 벗은 몸을 훔쳐본 치한이었다니? 끓어오른 경멸감과 배신감에, 날개옷을 떨쳐입고 두 아이를 안고 날개 쳐 올랐지요, 털끝만치도 미안하긴커녕 억울하고 분할 뿐이었지요”라고, 그 선악의 한계에 갇힌 채, 그 경멸감과 분노를 어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토록 착하고 선량한 줄로만 알았던 남편이 기껏해야 도둑놈이고 치한이며 사기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나무꾼은 날개옷을 잃고 방황하는 선녀를 구원해준 구세주가 아니라,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이중인격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정의는 선이고 불의는 악이다. 나무꾼이 악한이 된 것은 도둑놈과 사기꾼과 치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선녀가 선녀가 된 것은 타인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선녀가 해야될 마땅한 도리를 다 지켰기 때문이다. 나무꾼은 선녀의 날개옷을 훔치고, 그녀의 알몸을 너무나도 뻔뻔스럽게 훔쳐 보았으며, 그리고 그 사실들을 시치미 뚝 떼고 은폐한 채, 더없이 맑고 선량한 인간으로 가장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구세주처럼 섬겼고, 그리고 너무나도 자비롭고 친절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배신이란 믿음을 깨뜨린 행위이며, 우리는 배신을 당하면 그 상대방을 향하여 경멸감과 분노의 화살을 쏘아대게 된다. 우리는 자기보다 하찮은 인간은 경멸하고, 자기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인간에게는 분노의 감정을 품게 된다. 우리는 하찮은 인간의 행위에는 실소를 금치 못하고, 다른 한편, 친구나 그 이상의 인간의 배신의 행위에는 분노의 감정을 품게 된다. 나무꾼은 선녀의 남편으로서 지존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그 남편의 자격 밖에서 하찮은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나무꾼은 존경의 대상에서 경멸의 대상으로 추락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끓어오른 경멸감과 배신감에, 날개옷을 떨쳐입고 두 아이를 안고” 날아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도덕주의에 사로잡힌 마음은, 그 경멸과 분노의 도가니 속에서 이제까지의 인연의 끈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을 무섭게 단죄를 하고 그녀의 두 아이를 안고 하늘나라로 날아 올라가게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왜, 나무꾼은 선녀의 날개를 훔쳤던 것이고, 왜, 그 사랑하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는 사슴을 구해주고 그 공덕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무꾼은 비록, 가난하고 헐벗은 인간이었지만, 매우 착하고 선량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 사슴은 옛날 이야기 속의 도인道人이며, 또한 제우스 신의 사자使者인 헤르메스와도 같은 인물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도인(신)은 위기에 처한 사슴으로 변장을 하고 그 착하고 선량한 나무꾼을 구원해주게 되었던 것이다.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 것도 그녀를 자기 자신의 아내로 삼기 위해서였던 것이고, 그리고 그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믿은 나머지----세 아이를 낳을 때까지 날개옷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슴의 당부를 무시하고----그 날개옷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이다. 나무꾼은 너무나도 착하고 선량한 남편이었지만, 도덕주의의 함정에 갇혀 있는 선녀는 그 착하고 선량한 남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 선녀의 도덕주의는 둘째 연에서 파탄을 맞이하게 된다. 왜냐하면 “오오 그리운 내 고향! 가슴도 머리도 쿵쾅거렸”지만, 그러나 “큰 애가 아빤 왜 아니 오느냐고 하자, 비로소 제 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천국이고 이 땅은 지옥이다. 선녀는 선녀이고 나무꾼은 나무꾼이다. 선녀는 착한 인간이고 나무꾼은 악한 인간이다. 그런데도 왜 아이들은 제 아빠를 사랑하고 제 아빠를 그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나무꾼은 너무나도 착하고 선량한 아빠이었기 때문이다. 도덕적 편견의 시선----우물안의 개구리의 시선----으로 바라다 보면 나무꾼은 도둑놈이고, 치한이고, 사기꾼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선악을 넘어서서 바라다 보면----하늘의 제왕인 독수리의 시선으로 바라다 보면----, 너무나도 착하고 선량한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이었던 것이다. “애들이 제 아빠를 그리워한다면? 천륜天倫을 갈라 놓을 권리가 내게 있는가? 아쉬우면 취하고 소용없어지면 버려도 되는 게 남편인가? 우리 셋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까? 옥황상제님도 잘했다고 하실까? 글썽이는 아이들의 눈을 보자, 탱천했던 분노도 맥이 빠지고......”라는 시구는 지극히 다행스럽게도 선녀가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도덕주의를 넘어서는 시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안진 시인의 [선녀의 선택]의 둘째 연은 물음표와 물음표들의 집합체이며, 그 물음표들은 그들이 속한 도덕의 미덕에다가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메스를 들이대는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짓과 불의를 삶의 조건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은 그 도덕주의를 넘어서서 이 세상의 삶을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거짓이 없으면 진실도 없고 진실이 없으면 거짓도 없다. 불의가 없으면 정의도 없고 정의가 없으면 불의도 없다. 유안진 시인의 분신인 선녀가 그 도덕주의를 넘어서게 된 것은 그 두 아이들 때문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 두 아이들은 도덕 이전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때에 도덕 이전의 인물들이라는 것은 그의 아이들이 티없이 맑고 깨끗하다는 것을 말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짓과 불의를 우리 인간들의 삶의 조건으로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 것도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서였고, 그 선녀의 알몸을 훔쳐본 것도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서였고, 그리고 그 날개옷을 보여준 것도 그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진실보다도 더욱 더 진실한 거짓말도 있고, 정의보다도 더욱 더 정의로운 불의도 있고, 선보다도 더욱 더 선량한 악도 있다. 우리 인간들이 도덕과 선악의 이분법에 갇혀 있게 되면 그 사회는 바로 지옥이 되고, 어떠한 인간들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도덕은 천륜 아래에 있고, 천륜은 그 도덕을 넘어서 있다. 어떠한 도덕도 그처럼 티없이 맑고 깨끗한 아이들로부터 그 아버지를 빼앗아 갈 권리가 없고, 어떠한 옥황상제님도 한 가정의 행복을 파괴할 권리가 없다.
거짓과 불의를 삶의 조건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은 그것은 기존의 도덕 관념을 거부하고, 이 세상의 삶을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도덕이 인간의 삶을 위해 있는 것이지, 우리 인간들이 그 도덕을 위해서 봉사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안진 시인은 도덕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었던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그 도덕주의를 넘어서서 이 세상의 삶을 더욱 더 옹호하고 찬양하게 된다. 따라서 유안진 시인은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이라는 하늘나라에 대한 동경을 버리고 그 ‘날개옷’을 아궁이에다가 태워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사상과 신념이 다르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게 되고, 또한, 아들 역시도 그 아버지를 향해서 총부리를 들이대게 된다. 사상과 신념을 바꾼다는 것은 그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러나 그 사상과 신념에 갇혀 있다는 것은 더욱 더 불행한 인간의 초상에 지나지 않는다. 유안진 시인이 날개옷을 태우면서 “뜻 모를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상주의(사상과 신념)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뜻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뜻 모를 눈물”은 시적인 반어와 역설에 지나지 않게 된다. “뜻 모를 눈물”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상주의(하늘나라)를 포기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눈물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 “뜻 모를 눈물” 속에는 유안진 시인의 여러 감정들이 중층적으로 겹쳐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뜻 모를 눈물” 속에는 그의 이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슬픔과 허전함의 감정들이 내포되어 있고, 다른 한편,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새로운 지상낙원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자기 만족과 기쁨의 감정들도 내포되어 있다. 도덕주의는 삶을 질식시키지만, 그 도덕주의를 넘어서면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이 펼쳐지게 된다. 도덕군자는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 갇혀 있지만, 그 도덕을 넘어선 인간은 하늘나라가 아닌, 이 세상도 지상낙원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참다운 사랑은 자기 자신의 알몸마저도 허락하고, 또한 참다운 사랑은 어떠한 불행도 더욱 더 행복한 삶으로 변모시킨다. 사랑은 전지전능한 신이며, 그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지상낙원이라는 새로운 신천지가 펼쳐지게 된다. 지상낙원은 오두막집도 하늘궁전으로 변모되고 있는 곳이며, 그 구성원들의 웃음 소리에 의하여 행복이라는 나무와 그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히고 있는 곳이다.
아궁이에서 활활 타는 날개옷을 바라보니, 뜻 모를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분명 나는 웃고 있었지요, 내 하늘은 이 오두막이야, 우리집이야, 마당쪽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까르르 밀려왔지요.
유안진 시인의 [선녀의 선택]은 전래동화인 [선녀와 나무꾼]의 창조적 패러디이며, 선악을 넘어서서 이 세상의 삶의 본능을 옹호한 낙천주의의 찬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덕주의의 함정에 빠져서 부부간의 천륜과 이 세상의 삶을 거부한 [선녀와 나무꾼]을 극단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동시대의 도덕의 심장에다가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메스를 들이댔다는 것을 뜻한다. 유안진 시인의 [선녀의 선택]이 물음표와 물음표들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선악을 넘어서서, ‘시인이라는 이름’의 ‘행복론의 연출자’이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하늘나라를 거부하고,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선택한다는 것은 낙천주의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고귀하고 위대한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의 영생불사의 삶을 거절하고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은 그의 인생관에 해당되고, 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삶일지라도 어떠한 고통과도 싸워 이겨나가며 그 오두막집에서 ‘까르르 까르르’ 웃으면서 살아가겠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에 해당된다. 어차피 우리 인간들의 인생이란 유한하고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 그렇다면, 바로 그 고통과의 싸움 속에 우리 인간들의 행복이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낙천주의자로서의 유안진인 인생관이자 세계관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유한한 삶을 긍정하면 영원불멸의 삶이 펼쳐지고, 더욱 더 어렵고 힘든 고통을 긍정하면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상낙원의 삶이 펼쳐지게 된다.
유안진 시인의 [선녀의 선택]은 전래동화에서처럼 이야기의 구조를 갖고 있는 데, ‘기승전결 起承轉結’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선녀와 나무꾼의 고백을 듣고 그 배신과 분노 때문에 치를 떠는 것은 발단에 해당되고, 그 남편을 너무나도 극단적으로 단죄를 하고 두 아이를 안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은 전개에 해당된다. 큰 아이의 말을 듣고 비로소 ‘나는 천륜을 갈라 놓을 권리가 없다’라는 것을 깨닫고 그 날개옷을 태우는 것은 절정에 해당되고, 머나 먼 하늘나라보다는 이 지상에서의 삶이 더욱 더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것은 그 결말에 해당된다.
나는 나의 {행복의 깊이},제1권, 제4장에서, “모든 시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시가 존재하는 한 우리 인간들의 삶은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을 향유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 인간들의 삶이 과연 살만 한 것인가,아닌가라는 질문조차도 쓸데 없는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회의되고 질문되기 이전에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대전제 앞에서만이, 우리인간들의 삶을 향유할 수 없게 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성찰이 가능해진다”라고 역설한 바가 있다.
유안진 시인은 대한민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이 어렵고 힘든 삶을 더욱 더 사랑하는 낙천주의자이다. 이 어렵고 힘든 삶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지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게 된다.
오오, 언제, 어느 때나 그 절망을 넘어서서, 이 세상의 삶을 옹호하고 찬양하고 있는 시인이여!
오오, 호머와도 같고, 오딧세우스와도 같은 시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