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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카(my car)이력서
전호준
오늘도 별다른 볼일도 없이 길을 나셨다.
차를 몰고 나가자니 길치인 자신이 걱정이다. 길을 모르면 네비 에게 물어보면 되지만 목적지에 무난히 도착해도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난감해 헤맬 때가 허다하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도 만원인데 이면도로 구석구석 주차된 차들은 왜 저리도 많을까? 비집고 들어갈 틈도 찾기 어려우니, 바야흐로 마이-카 시대를 넘어 자동차의 천국이 아닌 자동차 공해시대가 온 느낌이다.
얼마 전 친구들과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 현직에 있을 때 하노이와 하롱베이 쪽으로 다녀온 지 벌써 1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번엔 조금 남쪽 지방인 다낭을 찾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기억에 남는 것은 오토바이 물결이다. 오랜 전쟁 끝에 통일은 되었지만 사회주의 경제 탓일까? 저렇게 오토바이가 많은 것은 아직도 자동차는 호화사치품이란 인식과 만만찮은 가격 때문에 갖기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천에서 일천오백 정도면 골라잡을 수 있는 국민 경차 모닝도 베트남에서는 삼천만 원을 호가한다는 현지 한국인 가이드의 설명이다. 이유인즉 차를 가질 형편이면 부유세 격인 부가금을 차 값의 100~120%를 더 내야 하기 때문이란다.
60년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내가 살던 농촌에는 자동차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자가용이란 말은 들어본 적도 없고 차를 가진 사람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다 등하굣길 6.25 때 미군들이 들어온 재무시(G.M.C)라는 트럭들이 산판에 벌목한 통나무들을 가득 싣고 구름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걸 보았을 뿐이다.
대중교통이라고는 대구에서 오는 국신 여객 시외버스가 하루에 두세 번 다녔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십 여리길 무거운 책가방에 울퉁불퉁 비포장 자갈길을 걸어 다녔다. 자전거도 귀하여 그래도 마을에서 잘산다는 소리를 듣는 집 친구들의 전유물이지 나로선 꿈도 꾸지 못했다.
어쩌다 세차게 비가 오거나 강추위 때 부모님에 떼를 써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얻어 타고 등교한 날이면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던 시절이다.
당시 어른들이 농담 삼아 주고받던 이야기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미국에는 집집이 차가 한 대, 일본은 집집이 오토바이 한 대, 우리나라는 집집이 지게가 한 대 이상, 웃지 못할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시 어린 생각에 내 생애 자가용을 갖고 손수 운전을 할 것이란 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어쩌면 먼 꿈나라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이렇듯 꿈에도 상상 못 한 시대가 예상외로 빨리 왔다. 허기야 경부 고속도로를 닦을 때 차도 없는데 쓸데없이 국민 혈세를 낭비한다며 도로에 누워 투쟁하시던 고인이 되신 두 분의 전직 국가원수도 예측 못 한 일을 나 같은 촌무지렁이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운전을 못 해 차가 없지 차가 없어 운전을 못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때를 떠올리면 가히 천지개벽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전거 한 대도 없던 나에게 일종의 자가용인 자전거도 70년대 초 농촌지도소 통일벼 증산 지도원으로 근무할 때 6,000원을 주고 싼 중고 삼천리 호 자전차(自轉車)가 난생처음 가진 자가용 1호 차(車)인 셈이다.
1973년 지방공무원 첫 발령지가 집에서 8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비포장 20리 길을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80년대 들어 오토바이가 대중화되었지만, 남들은 다 타는 오토바이도 없던 나는 83년도에야 겨우 90cc 오토바이를 한 대 장만했다. 운전면허증이라는 2종 원동기 면허증을 발급받고 일종의 자가용인 오토바이 키를 허리춤에 달아본 나로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90년대 들어 나라 살림이 좋아지고 생활이 윤택해 지면서 자동차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시책에 힘입어 대우자동차에서 500만 원 미만의 국민차를 보급해 국민 누구나 자가용차를 가질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이때 보급된 것이 승용차 티코와 화물차 라보 승합차 다마스이다.
10년 가까이 나의 발이 되어준 오토바이도 나이를 먹으니 잦은 고장으로 나을 골탕 먹인다. 국민차에 관심이 많던 나는 읍에 출장을 나왔다가 국민차 전시장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호기심에 구경삼아 들린 것이 마이-카 이력의 계기가 되었다. 운전면허도 없는 주제에 판매원 말에 귀가 솔깃 화물차 라보를 할부로 계약했다. 당시 부업으로 자그마한 과수원 농사를 지을 때이다. 승용차보다 화물차가 필요했다.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없는 작은 차이지만 나에게는 안성맞춤 첫 자가용으로 너무나 기쁘고 흥분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는 인수했는데 면허증이 문제다. 여려 경로로 알아보니. 대구에 직장인들을 위한 토. 일요반 운전면허 교습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전화로 예약했다. 팔달교 건너 00운전면허 연습장이다.
토요일 일요일 촌에서 버스를 타고 나와 열심히 연습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방과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 나가 운전연습도 했다. 그때 이미 직장 동료들 중 자가용을 갖고 운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의 코치아래 기계치인 나도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밤에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교본을 열심히 읽었다.
시험일 하루 전날 대구로 나와 화원 면허시험장 인근 여관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시험장으로 갔다. 무슨 큰 고시라도 치르는 듯 긴장과 초조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안전성 확보를 위해 보다 쉬운 2종 보통 원서를 냈다. 필기시험도 시험이지만 실기에서 S 코스 후진에 자신이 없던 내가 궁여지책 선택한 일이다. 다행히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오후 실기시험이 있었다.
출발은 좋았는데 오르막길 잠시 멈추다 미끄러지지 않고 오르는 등반코스에서 시동이 꺼져 버렸다. 얼른 키를 돌려 출발은 했지만 날 샜다는 불안 속에도 신중을 기해 전 코스를 별다른 감점 없이 통과하고 내리니, 전광판에 합격이라는 빨간 두 글자가 나를 마중한다. 날아갈 듯한 감흥, 내 생애 다시없을 기쁨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나의 발과 수레가 되어주던 작고 귀여운 라보 때문에 죽을 고비도 있었다.
원래 가벼운 자체에 화물차 특성상 뒤가 가벼워 빈 차일 때는 미끄러운 길은 그야말로 스케이트가 된다. 왕초보 기사가 초겨울 퇴근길에 산 밑 응달 커브 길을 무심코 달리다가 브레이크에 발을 올린 순간 미끄러져 반대편 작은 연못에 곤두박질쳤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논농사가 끝난 뒤라 물이 많지 않아 목숨을 건진 셈이다. 물이 만 수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물에 빠진 생쥐가 된 차를 건져 올렸다. 이제 첫정이 들기 시작한 내 인생 1호 자가용을 버리긴 너무 아까워 찻값의 반 가까이 들어 수리했지만, 몸살을 자주 해 7년간의 희로애락을 같이한 라보 차를 처분하고 1톤 뉴 포터 더블 캡 새 차로 바꾸었다.
퇴직 후 소일로 짓던 과수 농사에 큰 일꾼이 되어주고 대구 집과 촌집을 오갈 때 발이 되어주던 17년 지기 포터와도 지난해 서운한 이별을 했다. 아내의 건강과 가사 사정으로 농장도 촌집도 모두 정리하고 보니 더 이상 화물차가 필요치 않고 년 식 때문인지 고장도 잦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2016년 형 R.V 신형 현대 투-싼 으로 차를 바꾸었다. 화물차 밖에 몰랐던 나에게 고급 차는 아니지만 블랙박스에 네비게이션, 하이패스 카드까지 장착하고 스마트키라는 새로운 열쇠를 갖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볼 때 완전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기분이다. 이것이 마이카(my car)의 보잘 것 없는 이력서의 전부다. 2017.4.19
첫댓글 70년대 초 봉급이 3~4만원이 오락가락 하던 시절 자전거 6,000원이면 큰 돈이였지요. 10리길을 넘게 걸어서 출근하던 시절입니다. 76년 처음 집을 장만할 때 그 기쁨이 지금 그려집니다. 마이카 시절이 보통시민에게 올줄이야 참 좋은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자가용의 이력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그때 그시절 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그래도 그때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이 행복했었습니다.
지금은 상대적 빈곤 때문에 잘 살지만 행복하지 않다는 사람이 많아 졌다고들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지난 생활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자전거에서 자가용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셨습니다.어려운시절 박봉으로 고생 하셨으며 이제 추억하며 즐거운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자동차운전학원 다니던 일과 면허시험 치던 날이 떠오릅니다. 이젠 신형 자동차로 더 행복한 나들이 하십시오 알뜰살뜰하신 마이카 이력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