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이로 (막 5:21-25)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이 시간 “야이로로 본 새 양심”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 양심 때문에 우리 심령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행23:1에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했고, 딤전1:19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했고, 딤전3:9에도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나오는데, 22절에 보면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라 해서 성경이 그 이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야이로는 "깨달은 사람" 혹은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살리는 빛나는 양심의 상징입니다.
충신 “우리아”도 ‘여호와는 나의 빛’이란 뜻으로 양심의 상징입니다. 제사장의 흉패 안에 우림과 둠밈도 검은 돌과 빛난 돌이 있는데 양심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빛나는 양심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런데 왜 양심입니까? 양심은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런 특성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만이 우리 영혼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빛나는 양심은 어떤 양심입니까?
1. 예배하는 양심입니다.
21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여기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계셨는데 그것은 사람이 너무 많아 해안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바닷가는 바로 강단이요 교회였습니다. 여기를 야이로가 찾아왔습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을 살리려면 예배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아직 죽은 심령과 같다면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가인의 예배가 아니라 아벨의 예배와 같이 혼자든지 함께하든지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내 영혼을 살리려면 예배만큼은 양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하는 양심입니다.
22-23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당시 유대의 회당장이면 상당히 존중받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그는 병들어 죽어가는 딸을 위해 엎드렸습니다.
야이로가 어린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본문의 “어린 딸”이라는 원문을 보면 ‘뒤가트리온’이라 했는데 그 낱말은 어린 딸을 부르는 애칭인데, 그 용어에서 얼마나 사랑하는 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신분, 유대인들의 핍박,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미안함도,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딸을 살려야겠다는 그 일념뿐이었습니다.
이 절박함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심령을 살리기 위해서 눅 18장에 나오는 원한 맺힌 과부와 같이 날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세에 참된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기도는 양심입니다. 다니엘처럼 양보할 수 없는 것이 기도입니다. 집에 손님이 왔어도 어디 출타했다 해도 기도는 지켜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삽니다.
3. 보혈을 믿는 양심입니다.
24-25절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가던 중에 혈루증 여인을 만나 주님이 고쳐주신 거기에 담긴 의미가 있습니다. 혈루증은 만성자궁출혈로 끝없이 피를 흘리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도 아닌 혈루증 여인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본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혈의 공로를 믿지 못하면 끝없이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 많이 한다고 다 좋은 양심은 아닙니다. 자기 양심을 보혈로서 지키고, 죄 아닐 때는 회개하지 않는 것도 좋은 양심입니다.
4. 사랑하는 양심입니다.
25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참으로 딱한 상황입니다. 아이는 죽어 가는데 상황은 악해져만 갑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보행조차 어려운데,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한 여자가 있어 시간을 지체합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가슴 터지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내 자식도 중요하지만 내 이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독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랑하는 양심입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이 아무리 급해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내 영혼이 사는 비밀입니다(요일2:4 –5). 그래서 위대한 신앙인들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 섬기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5. 말씀을 놓지 않는 양심입니다.
35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야이로에게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셨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님의 말씀을 더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집에 도착하니 통곡 소리가 들립니다. 아이가 보자기에 덮여 있습니다. 그래도 아이에게 달려가 안고 울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수제자만 데리시고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딱 한 마디)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랬더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고 예수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녀가 살아나자 먹을 것부터 찾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우리 영혼도 예수님의 수제자와 같은 투철한 믿음 가지고 말씀을 보고 말씀을 먹으면 살아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시1:1-3에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성경을 손에서 놓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살리기 전에는 어린 딸이라 했는데 살린 후에는 열두 살이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자아이는 만 13세에 여자아이는 만 12세에 성인식을 치룬다고 합니다.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서야 장성한 신앙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어린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죽은 심령들이 잠자는 데서 깨어 살아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회당장 야이로처럼 내 영혼을 살려야겠다는 밝은 양심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장성한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