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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라합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호수아 2:8-11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5) 라합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호수아 2:8~11) -마경훈목사 - YouTube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3대절기가 나옵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40년 했는데, 그때 초막에 거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 생활한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은 맥추절, 초실절 혹은 오순절이라 합니다. 칠칠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유월절이 끝난 후 7주가 끝난 다음날 곡식을 처음 거두어 수확의 첫 단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칠칠절을 보리麥(맥)자를 써서 맥추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보리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보리가 영글기 시작하는 시기는 4월경이며, 본격적인 보리추수는 5월경 시작됩니다. 보리추수가 시작된 날로부터 50일이 되는 날이기에 6월초에 지킵니다. 우리나라는 통상 10월에 보리와 밀을 심어 5~6월에 거둡니다. 2월에 심는 경우도 있는 데, 이런 경우는 6월말께 수확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교회는 6월 말 보리 수확을 끝내고 7월 첫 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을 7월 첫 주일로 지키는 또 다른 의미는 살아온 반년을 감사하고 나머지 반년을 감사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7월 첫 주일인 오늘 맥추감사절을 지키면서 지나온 6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합시다. 그리고 앞으로 6개월 간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푸실 것을 믿고 감사합시다.
오늘은 여호수아 2장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2장은 이스라엘의 두 명의 정탐꾼이 여리성을 정탐한 이야기입니다. 여리고성은 약 1만 년 된 도시입니다. 주전 8천년에 세워진 도시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여리고는 참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여기 저기 서 있는 울창한 종려나무와 풍성한 과일 때문에 성경은 이 도시를 ‘종려나무의 성읍’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리고에는 엘리사의 샘이라는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엘리사의 샘에서 나오는 물이 온 여리고를 적셔서 이 땅은 비옥하고 아름답습니다. 사방이 사막인데 엘리사의 샘 때문에 여기에만 나무와 숲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도시입니다.
여호수아 당시에 이 도시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사는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성을 정복하지 않으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점령하기 전에 싯딤에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두 명의 정탐꾼은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두 명의 정탐꾼을 내놓으라고 했으나 라합은 이미 두 사람을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습니다. 급히 따라가라면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탐꾼들을 찾는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줄을 제가 압니다. 당신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홍해 바다를 가르신 것과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 소식을 듣자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당신들을 선대하였으니 당신들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십시오. 나의 부모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십시오.” 라합의 말을 들은 두 정탐꾼은 라합에게 약속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 사람들이 라합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아라. 누구든지 너와 함께 이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 라합은 즉시 붉은 줄을 창문에 맸습니다.
여호수아서 6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멸망시킬 때에 여리고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의 약속대로 붉은 줄을 매달아놓은 라합의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내용을 중심으로 라합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나누겠습니다.
1. 하나님은 믿음 없는 다수보다 믿음 있는 소수를 쓰시는 분입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에 보냈습니다. 왜 여호수아는 여리고 정탐을 위하여 한 명도 아니고 세 명도 아니고 두 명을 보냈을까요? 그때로부터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 거할 때, 모세는 가나안 정탐을 위하여 열두 명을 보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때처럼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단 두 명만 보냈습니다.
저는 이것이 여호수아의 신앙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40년 전에 열두 명이 정탐을 한 후에 열 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장대하고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가나안을 점령할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반면에 두 명의 정탐꾼은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이 장대한 것은 맞지만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서 떠났고, 자신들은 하나님이 도우시니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적들이 자신들의 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백성들은 부정적인 열 명의 정탐꾼들에게 미혹 되었습니다. 믿음이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은 불신앙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다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수라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5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여호수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수라도 믿음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를 정탐할 때는 두 명만 보낸 것입니다.
여리고성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그 성에 믿음의 사람은 오직 라합 한 명이었습니다. 지극히 소수였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에 압제를 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성령께서 기드온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기드온이 나팔을 불고 전령을 보내서 군사를 모집하였습니다. 삼만 이천 명이 모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믿음이 없어서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가고 일만 명이 남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일만 명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삼백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메뚜기 떼와 같은 미디안을 물리치시는데 삼만 명이 넘는 오합지졸들보다 숫자는 적어도 강하고 담대한 삼백 명의 믿음의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많은 숫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소수라도 진짜 믿음의 사람을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다수에 설 것인가 아니면 숫자는 적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수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수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소수로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인구를 적게는 10억 명, 많게는 100억 명 정도로 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은 노아 한 사람이었습니다. 대홍수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은 겨우 여덟 명이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적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은 롯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롯과 롯의 두 딸 뿐이었습니다. 역시 구원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적었습니다.
예레미야 5:1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할 시기에 예루살렘의 형편입니다. 만일 예루살렘에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 성읍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믿음의 사람이 천연기념물보다 더 희귀했습니다.
현재 지구촌의 인구가 80억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 가운데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마 7:13-14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신앙생활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문은 좁은 문입니다. 그리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 그 길은 찾는 자가 적습니다. 반면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습니다.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제가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앙생활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말씀대로 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 따라가는 것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멸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돈을 따라가거나 사람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역시 넓은 문, 멸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6:24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입니다. 신앙생활은 안일한 자세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진리에 접근한 사람입니다. 그는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했고, 기독교 신학의 뼈대를 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알았으며,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광과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한계를 알았고 은혜의 신학으로 무장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다른 사람들이 비진리와 타협하는 것에 대해서 엄격하게 다루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믿음의 대선배인 베드로가 외식에 빠지자 주저하지 않고 책망했으며, 자기를 교회 안으로 인도한 은인 바나바마저도 책망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만 엄격했던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굉장히 엄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그렇게 엄격했을까요?
고린도전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을 마라톤으로 비유를 하면서 자신이 왜 그렇게 자신에게 엄격한지를 밝혔습니다. 고린도전서 9:27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국과 내세에 대한 확신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를 쳐서 복종시켰던 이유는 자기가 버림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이 몸이 원하는 대로만 살다가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고린도전서 9:27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1:1을 보면 빌립보서를 받아보는 수신자들은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많은 사람들이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원 이후에도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성된 구원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6:4-6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봤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봤습니다. 이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는 확실하게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6절에서 타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풍성하게 경험한 사람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바울이 말한 두렵고 떨림이 있습니까? 정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사람은 믿음 없는 다수보다 믿음 있는 소수의 길을 가야 합니다. 좁은 길로 가야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두려워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두려움으로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믿음의 편에 서기를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기생 라합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9-11절을 보면 라합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라합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구원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을 인도하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으며 그들의 적들을 물리쳐주셨다는 기적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두려움만 임했습니다. 그들은 간담이 녹았습니다. 마음이 녹았습니다. 너무나 두려워서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반면에 라합은 동일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믿음이 생겼습니다. 라합에게는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를 천지만물의 주인으로 믿었습니다. 라합과 여리고 성 사람들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차이였습니다. 라합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믿음이 생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만 임했던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바클레이는 “인간적으로 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백성들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볼 때는 100분의 1이 아니라 1만 분의 1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1만 분의 1에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그 이유는 라합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기에게 집중하거나 세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집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환경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합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에게 집중합니다. 내면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기도 응답을 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기도하는 사람의 능력이나 인격 때문에 일어난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의 문제에 부딪히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믿고 담대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합니다. 자기를 보거나 환경을 보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 전쟁 등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응답이 나타나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의 능력이 부족하고 돕는 사람이 없다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기도 응답을 누리게 되고 우리의 삶과 사역에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증거가 되어서 라합과 가족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붉은 줄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애굽에 열 번째 재앙이 내릴 때, 죽음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들을 쳤습니다. 그때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갔습니다.
우리의 멸망과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어 정결하게 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합니다. 라합이 창에 매달았던 붉은 줄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십자가 아래 모였던 라합의 친족들은 모두 구원 받았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돌기 시작해서 7일째 되었을 때에 그들이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았습니다. 그리고 나팔소리가 울려퍼지고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의 성벽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성벽 중에 한 집만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라합의 집이었습니다. 붉은 줄을 매달아놓은 라합의 집만 견고하게 서 있었습니다. 여리고가 무너지듯이 마지막 심판이 임할 때 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견고하게 서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믿는 우리들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냐 하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루터는 아볼로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터틀리안은 바나바라고 추측했습니다. 하르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설이 제일 유력합니다. 저도 바울로 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열여섯 명의 믿음의 거장들을 출현시키면서 그들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바울이 칭찬한 믿음의 사람들 중에 열다섯 명은 남자였습니다. 단 한명만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가 바로 라합입니다. 바울은 라합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히브리서 11:31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바울이 칭찬한 라합의 믿음은 행함의 믿음, 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진짜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가짜입니다. 우리는 믿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믿음과 행함의 연관성에 대해서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홍수가 나서 온 마을에 물이 들어차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이 그의 집 1층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배를 타고 있는 다른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배에 탄 사람들이 그에게 “이 배로 와서 생명을 구하시오!”라고 하자, 그는, “아니오, 나는 주님이 구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층에 물이 차게 되자 그는 2층으로 올라가서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다른 배에 탄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생명을 구하라고 했지만, 그는 “아니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구조를 거부했습니다. 2층에도 물이 차게 되자, 그는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그 때 헬리콥터가 날아와 그의 머리 위에서 조종사가 외쳤습니다. “우리가 로프를 내려주겠소. 그걸 타고 올라와서 생명을 구하시오!” 지붕에 있던 그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나는 주님이 구해주심을 믿습니다.” 결국 그 남자는 구원받지 못하고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천국 문에서 베드로를 만나서 불만을 털어났습니다. “제 얘기를 들어주시고 제가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제 마음속에서 있는 불만을 좀 없애주세요. 저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홍수 때에도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저를 죽게 내버려두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요.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배를 두 번이나 보냈고, 헬기까지 보냈는데, 당신이 타지 않았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영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환난에서의 구원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기도할 때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행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는 기도해야 하지만 행동할 때는 움직여야 합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구체적인 행동까지 했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동반합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여호수아 2:1에 보면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생이란 직업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생’을 ‘여관 주인’이라 했습니다. 정탐꾼들이 간 곳은 여리고 여관이었고, 라합은 그 여관의 주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유대인이었던 요세푸스는 자기의 선조가 창녀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라합은 여관집 주인이 아니라 창녀였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된 ‘기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זָנָה(자나)인데 “간음하다, 매춘하다, 창녀이다”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성경에는 ‘창녀’로 번역했고, 70인역 성경에서는 ‘매춘부’로 번역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매춘부라는 직업은 부끄러운 직업이었고, 사회적으로 최하위층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리와 창녀는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오그만 디노는 “창녀는 드러누워 돈을 버는 직업이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업 중 가장 비참하고 천한 직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창녀였던 라합이 믿음을 갖게 되면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라합의 인생은 복된 인생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 네 명의 여인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라합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창녀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라합을 통해서 고린도후서 5:17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사람을 구원하고 그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인생에 새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43:19을 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광야 같은 인생에 길을, 사막 같은 인생에 강을 내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내 인생에 행하실 새 일을 기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 광야요 사막이었더라도 하나님은 내 인생에 새로운 길을 내시고 강을 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와 여러분은 무능한 나 자신에 집중하지 마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시고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하나님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의 실패한 과거, 부끄러운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