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을 대표할 만한 유원지가 있는 압록마을의 원 이름은 합록(合綠)이었다. 즉 섬진강과 대황강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강줄기가 산간을 흘러와 만나 절경을 이룬 곳이라 하여 불리워졌던 이름이다. 그 후 400여년전 마을이 크게 형성되면서 강에 서식하고 있는 은어(銀魚)들을 잡아먹기 위해 오리떼 등 철새들이 많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합할 합(合)을 집오리 압(鴨)으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압록(鴨綠)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압록리는 오곡면의 가장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주변이 온통 강과 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마을 뒤로는 제법 굵은 산봉우리가 가파른 경사를 이루며 두 강변에 접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산봉우리는 독자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이 산봉우리의 뒷켠에 자리 잡고 있는 천덕산(天德山 673.7m)의 산자락에 있다하여 편의상 산명을 그대로 천덕산이라 불러오고 있는 것 같다. 행정구역상 마을 앞 섬진강 건너편은 구례 구역이요, 대황강 건너편은 죽곡면에 속한다.
압록리는 고래(古來)로부터 육로와 수로를 이용한 구례, 곡성, 승주 방면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 하동에서 소금 등 온갖 물상을 실은 배가 구례, 곡성을 거쳐 남원까지, 석곡, 승주, 보성으로 이어지는 강상무역(江上貿易)이 활발할 당시 최고의 중간기착지였다.
또한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시대를 비롯해 백제, 신라의 공방전으로부터 6.25전쟁이라는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밀고 밀리는 전란(戰亂)의 현장이기도 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 왜구가 침입했을 당시 압록진에서 섬진강의 백사장과 협곡을 이용해 왜적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고려시대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사서)에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 전환기를 지켜 본 현장이기도 한 것 같다.
고려의 명장 강감찬(948~1031) 장군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구전설화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시절, 강 장군이 어머니와 함께 압록을 찾아 와 머무르게 되었는데, 밤에 모기떼가 어찌나 기승을 부려 잠을 못 들게 되자 강장군이 부적을 써 붙여 모기를 퇴치했다는 신이(神異)한 행적이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압록지역은 타지역보다 모기가 적게 서식한다는 것.
주민들은 압록초등 자리가 있었던 아래쪽 강변을 ‘배석거리’라 부르고 있는데 이곳에 섬진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국도 17호선이 가설되기 이전까지 활발하게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뱃사공만 해도 무려 60여명이 근무했다고 전해온 것으로 봐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현 행정구역상 구례지역에 속하는 압록마을 강 건너편 산자락에 60여호가 군락을 이루며 살았는데 교통이 원활해지자 모두 압록마을로 이거해와 폐촌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군사적,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연적 요로였기에 조선시대에는 ‘압록원(鴨錄阮)’이 설치되 관헌을 근무토록 했다. 1530년 관에서 편찬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531년도판 곡성의 옛 지도인 동람도(東覽圖)에도 압록진(鴨綠津)과 압록원(鴨錄阮)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전근대 이전에도 교통의 중심지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1936년 12월부터 전라선 철도가 통과해 압록역이 영업을 개시하게 됨으로써 압록마을은 점차 강변나루촌에서 관광지로 변모해 가게 되었다. 그러나 더 크게 마을이 번창할 수 없었던 것은 주변에 농경지가 극히 적었던 탓으로 보인다.
압록마을에 입촌한 성받이 중 가장 오래된 성씨는 김해김씨로 보인다. 군자료에 따르며 1530년대 경남 산청에서 김중장(金重章)이 이주(移住), 정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고흥 밀양박씨, 청주한씨, 풍천임씨 순으로 이주해 왔다. 가구수 120호에 34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압록마을 터에 처음 자리를 잡은 것은 산자가 아닌 죽은 자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압록마을 가운데에는 약 20평쯤 되는 큰 묘가가 하나 있었다. 현재 철길이 지나고 있는 곳으로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며 철길을 가로지르는 육교의 바로 아래쪽이다.
주민들에 의하면 묘의 주인은 실전돼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이부상서(吏部上書)의 벼슬을 지냈던 인물의 묘라 하여 그냥 ‘이부상서의 묘’라고만 구전되 내려왔다는 것이다. 후손이나 기록이 없어 묘주인의 이름이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주민들에 의하면 ‘이부상서(吏部上書) 묘’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근방의 토지가 모두 묘주인의 것이었다는 전언과 묘의 크기로 보아 상당히 신분이 높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부상서(吏部上書)라는 벼슬명으로 보아 고려시대나 그 이전의 인물로 유추된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김씨가 16살 무렵 철로를 가설하기 위해 묘를 파헤칠 때 유골을 살펴보니 정강이의 다리뼈 한 마디가 일반사람의 전체 다리와 같은 긴 거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한 김씨는 관속에 든 뼈가 썩지 않도록 관 밑에 많은 참숯이 묻혀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부상의 묘’는 비록 인물의 성씨조차 오랜 세월을 거치며 실전(失傳)되었지만 이 묘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은 민속신앙으로 나타나 인근의 주민들에게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묘에서 한바퀴 구르면 일년간 잔병치레를 앓으며, 심지어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도 낫는다 하여 그 영험함이 소문이 나 너도나도 찾아와 굴렀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묘에 풀이 돋아날 틈이 없어 항상 민대머리 흙묘였다는 것이다.
국도변에서 마을 안쪽으로 5M쯤, 경로당 앞 골목에 들어가면 “정삼품석우정일섭유혜비(正三品石愚丁日燮遺惠碑)”라 쓰여진 비석(碑石)이 하나 서 있다. 압록마을에는 지난 1859년 음력 삼월 삼일(己未年 陰 三月三日) 마을의 당산나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붙어 삽시간에 마을의 초가 지붕위로 옮겨 온 마을을 거의 다 태워버린 큰 화재가 발생했다. 마을이 갑작스러운 재해로 가산을 모두 잃고 먹을 것 하나 없이 밖으로 나앉아 망연자실할 무렵, 당시 곡성읍에 사는 정일섭씨가 곡간을 풀어 마을 주민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뻗혀주었다. 이 은인(恩人)에 대한 고마움을 후세들이 잊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정일섭 유혜비(丁日燮 遺惠碑)’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 후 마을주민들은 삼월 삼짇날이면 잠시 일손을 놓고 쉬면서 마을주민끼리 하루를 보내는 관습이 자리를 잡아 갔다. 이날 마을 주민들은 액을 쫓아내는 ‘액멕이 굿’‘돌탑쌓기’‘진대 세우기’‘팔씨름’‘들독들기’ 등으로 전체주민이 한자리에 모여 준비한 음식을 나눠먹고 놀이를 하며 하루를 지냈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잊혀져 가고 있었는데 지난 2000년 음력 3월 3일 전래의 마을 풍속을 살려내자는 취지로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둔치에서 ‘압록 삼짇날 축제’를 처음 실시하기도 했다.
현재 압록삼거리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은어회를 비롯한 참게탕 등 매운탕을 파는 식당이 즐비하다. 모두 40여 개 정도.
압록에 주막의 형태를 벗어난 전문 매운탕집이 들어선 것은 1936년 ‘압록역’이 생기면서부터. 압록역은 침곡역과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주변 목사동, 죽곡 오곡등지에서 벌목된 목재를 실어나르기 위해 만든 간이역이다. 당시엔 준급행 열차가 정차했기에 서울쪽의 정보를 제일 빨리 들을 수 있었고, 산판업자들의 내왕이 잦았기로 돈 또한 흔했다는 것. 그러기에 나룻터를 건너는 손님만을 받던 주막 형태에서 좀 더 규모가 커진 국밥집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5~6곳 생겨났다고. 현 오곡주조장 역시 압록에 소재했음을 볼 때 당시 압록의 경제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 후 국도의 확장으로 교통소통이 원활해지고 철교와 압록교 등의 교량이 가설되었다. 특히나 여기에 은빛나는 모래, 합수되는 강물, 협곡을 이룬 주변경관과 앙상블을 이루면서 외지에 널리 알려져 유원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 40여년전 이 마을 주민인 신준희씨가 맨 먼저 섬진강에서 은어를 직접 잡아 은어회를 전문으로 요리한 ‘압록집’을 열었다. 이어 ‘순천집’ ‘일미집’ ‘하코방집’ 등 네곳이 문을 열어 성황을 이루었다. 그 후 경제적 호황과 관광지 개발 시책에 따라 점차 식당이 대형화 되기 시작, 맨처음 압록마을 출신 박종선씨가 ‘용궁산장’을 개업하면서 업소들이 강줄기를 따라 포도알처럼 생겨나기 시작,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기한대로 압록마을 주변에는 농경지가 적은 산간지역인 까닭에 예부터 한지(漢紙)의 원료인 ‘닥나무’재배가 성행했다. 현 마을회관 자리에 종이 만드는 공장이 있을 정도로 이 지역의 특산품으로 유명했는데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당시 매 가구당 1천냥씩의 수입을 올렸다고 회상한다.
마을민들의 숙원 중 하나는 곡성팔경의 하나인 압록귀범(鴨綠歸帆)과 더불어 압록의 상징적 경관 중 하나로 손꼽혔으나 화재로 소실된 백로정(白鷺亭)의 복원을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