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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인 ( 宮 人 ) : 궁 에 사 는 사 람 들
출처 : http://www.bangudaelove.com/
안녕하시오 궁인들?
저잣거리에 처음 쓰는 글이라 떨리는 마음이 크오.
출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홈페이지를 사용하였으나
사실상 쓰인 사진과 글은 본궁이 수업시간에 배우고 공부하기 위해 여러 논문과 학술사이트에서 찾은 것이오.
혹여 자세한 사항에 대해 알고 싶은 궁인들이 있을까 싶어 출처를 표시해 두었소.
대부분 저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일테니 한번 들어가 보셔도 좋을 듯 하오.
사실 본궁이 오늘 소개할 반구대 암각화는
한국 문화재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편에 속하오.
하지만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아 애석함이 매우 크오.
본궁의 미력한 글 솜씨가 감히 이 문화재를 빛바래게 할까 저어되지만
열심히 설해보겠소.
이것이 그대들에게 알고 있냐 물었던 반구대 암각화의 모습이오.
이리 보니 본궁의 눈에도 어디 그림이 있나 잘 보이지 않아 애석하구려.
우선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소개를 하겠소.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소재의 암각화로 국보 제 285호요.
암각화는 가로로 8~10m, 세로로 2m에 달하는 커다란 바위에 그려졌소.
여기서 암각화(岩刻畵)란 바위에 새긴 그림을 뜻하는데
우리나라의 반구대 암각화는 연대가 신석기 말부터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매우 오래된 그림이오.
또한 명실상부, 우리나라 회화의 큰 형님이라 불리며
회화와 예술작품을 연구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제시되는 중요문화재요.
사실상 전경을 살펴 보면 어디에 그림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너른 바위 속에 엄청난 세계가 숨어 있다오.
(사진 출처 : 네이버)
김호석, <한국암각화의 도상과 조형성 연구>, 2005 에서 발췌
김호석 박사님께서 직접 만드신 도상의 자세한 모습이오.
시간이 흘렀기 때문도 있거니와 뒤에 언급할 댐의 수위 문제로 인해
현재는 그 초기의 모습을 많이 상실한 상태요.
그러나 이 도상을 보면 우리는 당시대인들이 얼마나 정교한 솜씨로 바위에 그림을 새겨냈는지 알 수 있소.
본궁은 감히 입에도 담기 힘들만큼 대단한 그림이오.
이 그림이 어째서 중요하냐,
이것은 당시대인들의 생활과 정신세계에 대한 엄청난 증거고 단서기 때문이오.
크고 작은 고래 등의 해양생물과
육지동물, 그리고 인간과 다양한 기호들..
이것들은 총 300여점에 달하는 그림들로 이루어져있소.
그림을 새겨넣은 방법 또한 면쪼기와 선쪼기 등으로 구분되며
이는 이곳에 시대에 걸쳐 두 집단이 교차하여 거주했을 확률을 알려주오.
이제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들에 대해
종류 별로 나누어 설명해보도록 하겠소.
1. 해양동물
반구대 암각화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동물은 바로 '고래'요.
사실 본궁은 한양에서 나고 자라 고래가 친숙하지 않았다오.
하여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가 많이 그려져 있다했을 때 매우 신기하였더랬지.
허나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진 대곡리는 바다와는 먼 거리에 있소.
어찌 그들이 고래를 보고 그림으로 새겨넣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고래를 사냥하였기 때문이오.
붉은 선으로 표시된 곳이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울주 언양읍 대곡리요.
척 보기에도 바다와는 거리가 머니 커다란 고래를 사냥하였다 보기엔 어려움이 많소.
그러나 울산에는 고래잡이로 유명한 항구가 있소.
바로 장생포항이오.
현재는 포경이 금지되었으나 1920년대 까지도 활발히 고래잡이가 이루어졌던 곳이지.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석기 말에는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았기 때문에 대곡리까지 바닷길이 이어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오.
때문에 당시 반구대인들은 고래를 잡아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오.
더군다나 고래의 생김새가 매우 뚜렷하고 모두 종을 알 수 있게 그려져
고래를 직접 보고 사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소.
⑴ 흰긴수염고래
이 고래는 몸체에 여러 긴 선이 특징인 고래요.
지느러미와 몸통과 특징만 그려져 있어 구분하기 쉽소.
⑵ 범고래
이 고래는 반만 쪼아 판 것이 특징이오.
새김방법의 차이로 범고래를 표현해낸 것이오.
매우 섬세한 관찰방법과 표현기법으로 여겨지오.
⑶ 귀신고래
입의 모양을 강조하여 그려 귀신고래를 표현해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소.
⑷ 향유고래
입부분이 뭉툭하고 길게 표현되어
이 역시 한눈에 향유고래를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오.
⑸ 긴수염고래
고래는 특이하게도 종에 따라 물을 뿜는 모양이 다른데
당시 반구대인들은 이를 포착해내어 긴수염고래가 v자형으로 물을 뿜어내는 것을 묘사하였소.
그만큼 반구대의 사냥꾼들이 고래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요.
⑹ 아기 고래를 등에 업은 어미 고래
귀신고래는 아기고래를 등에 업고 다니는 것이 특징이오.
반구대 암각화에는 이런한 고래의 특성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소.
연구 초기에는 이 도상을 보고 새끼를 밴 어미고래의 모습으로 추측하였으나
현재는 귀신고래의 생태와 동일한 모습이기에 귀신고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란 것이 유력하오.
⑺ 작살을 맞은 고래
뚜렷하게 보이는 작살은 고래를 사냥하던 방법이 작살을 이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게하며
당시인들이 고래를 사냥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소.
실제로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고래를 사냥할 때 작살을 이용한다고 하오.
뿐만 아니라 고래 외에도 거북이, 물고기, 상어 등도 그려졌소.
2. 육지동물
반구대 암각화의 시기를 두 시기로 나눌 때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들의 대부분은 바로 육지동물이오.
이는 사냥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증거로 여겨지오.
환경의 변화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오.
육지동물은 호랑이와 같은 맹수부터 토끼까지 매우 다양하다오.
⑴ 호랑이
호랑이의 모습은 매우 간단하게 그려졌소.
다만 귀와 줄무늬, 꼬리의 모습에서 호랑이임을 추측할 수 있소.
특이하게도 왼편의 호랑이 도상은 자세가 남달라
죽은 호랑이의 모습이라는 주장도 있다오.
⑵ 표범
독특한 점무늬로 인해 표범으로 추측 중인 도상이오.
당시 한반도에는 표범도 살았다고 하니 과거의 한반도의 모습은 현재와는 사뭇 달랐나 보오.
⑶ 노루
노루는 본래 꼬리가 짧고 목이 긴 동물이라
왼편의 도상과는 조금 어색한 감이 있으나 어미와 새끼의 모습인 것은 알 수 있소.
⑷ 기타
이렇게 교미 중인 것으로 보이는 동물의 모습도 보이오.
예전에는 이를 보고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중의 모습으로 추측하기도 하였소.
요즘은 교미 중의 모습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생김새가 매우 다른데다 두 개체가 모두 잉태 중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해
신성시되는 동물의 잉태를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하오.
또한 이렇게 울타리의 모습이 묘사되어 당시 반구대인들이 가축을 길렀음을 알 수 있게 하고
그물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 사냥을 했는지도 추측이 가능하게 하오.
울산 반구대 암각화 박물관에서는 이런 모습으로 고래 사냥을 추측하고 있다오.
길다란 배에 여럿이줄지어 타 커다란 고래를 잡는 모습이오.
이렇게 실제 반구대 암각화에 묘사된 그림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사실감 넘치는 묘사인지 알 수 있다오.
3. 인간
다양한 동물들이 그려진 반구대 암각화에는 인간의 모습도 그려져 있소.
인간의 모습은 대개 남성으로 여겨지는데 바로 음경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오.
피리를 부는듯 보이는 인물의 가랑이 부분을 보시오.
무언가 툭 튀어나와 있지 않소?
선사인뿐만 아니라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도
남성의 성기는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오.
신라의 왕이었던 지증왕의 음경 길이가 매우 길어 신붓감을 참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요.
때문에 암각화에 새겨진 남성은 당시 반구대인들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던듯 싶소.
제사장 혹은 선장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오.
두번째로 독특하다고 여겨지는 인물상이오.
본궁은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 공부할 적에 이 인물을 여성으로 추측하였다오.
나중에 알고보니 그렇게 추측한 학자들도 꽤 많았소.
이유로는 음경이 묘사되지 않은 것과
팔다리를 쭉 펴고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펼친 모습이
출산 중의 고통스러운 장면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오.
또한 이 도상은 반구대 암각화에서 가장 아래에 위치하고 있고
제사장 혹은 선장으로 여겨지는 남성상이 가장 위에 위치한 것과 대비되어
여성은 풍요로운 땅이며 남성은 비를 내려주는 하늘임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오.
하여 제사장의 아내로 보는 이도 있소.
혹은 아예 다르게 '조류'로 보는 학자도 있었으며
무구(巫具)의 일종을 묘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오.
이외에도 다양한 도상이 존재하나 그를 다 적다간
게시글이 끝나지 않을 것같아 도상에 대한 설명은 이만 줄이오. ㅠㅠ
그러나 이외의 그림들도 분명 중요하다는 것만은 알아주길 바라오.
궁인들이 보기엔 어떻소?
겹쳐져 그려지기도 하고 왠지 두 부류의 동물이 동서로 나뉘어 집중 분포한 것같기도 하고
이것이나마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지만
본궁에겐 아직도 신기하게, 또 알 수없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은 그림이오.
왜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암각화를 그렸을까?
암각화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암각화의 의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있소.
첫째, 의식용이다.
- 신께 풍요를 빌기 위해 그린 것이란 학설이오.
그려진 작살과 배를 탄 인물들, 그리고 당시의 먹을 것이었던
사냥꺼리들을 그려 사냥의 성공과 풍요를 빈 것이라는 뜻이오.
가장 가능성있는 학설이며 또한 바위가 제단과 같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고
비바람이 들이 닥치지 않게 교묘히 경사지고 판판한 바위이기 때문인 듯 하오.
뿐만 아니라 제의와 관련된 가면과 주술사의 모습(추정)이 묘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오.
둘째, 교육용이다.
- 육지동물이 선쪼기로 새겨짐과 동시에
부위를 나누듯 묘사되어 아이들에게 고기손질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린 것이라는 학설이오.
마치 고기를 도축하기 위한 것처럼 부위별로 나누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오.
그 외에는 예술의지의 발현이나 기록용이라는 학설 등이 있소.
매우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기에 반구대 암각화는 그만큼 신비로운 문화재요.
그러나 이러한 반구대는 존명의 위기에 처해왔었소.
반구대 암각화는 1964년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사연댐이 완공되고 6년 후인 1971년에 발견되었소.
수위조절로 인해 반구대 암각화는 지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물에 잠겼다 나왔다는 반복하였소.
그러다보니 바위가 상하고 이끼벌레가 발생해
암각화가 크게 망가지게 된 것이오.
울주군 문화재 명예관리인인 김태관씨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외국 관광객을 모시고 반구대에 찾아갈 때가 가장 부끄럽다.
'오늘은 물에 잠겨 볼 수 없다'고 말할 때 수치감을 느끼곤 한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소.
한국의 문화재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재인 반구대 암각화가
물에 잠긴다니 이는 정말 비참한 현실이오.
현재는 문화재청과의 첨예한 대립 끝에
문화재청의 한발 양보로 임시 물막이(카이넥틱 댐)를 설치하는 것으로
시급한 문제를 해결했으나
사실상 안전성이 떨어지고 누수의 위험이 매우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오.
또한 반구대 암각화의 보존에 힘쓰는 변영섭 전 문화재청장의 경질로 인해
과연 앞으로 어떻게 반구대 암각화를 지켜나갈 것인지 본궁 역시 걱정되는 마음 뿐이라오.
사연댐의 수위를 52m로 낮추는 것이 식수 해결과 문화재 보존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 하나
이에 대해서도 논쟁이 많소.
앞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세계의 문화유산인 반구대 암각화가 올바르게 보존되기를 바라오.
또한 그러기 위해선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많은 이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앞으로 한국의 미술품들에 대해 저잣거리에 게시하기 위해서는
첫 시작은 꼭 반구대 암각화로 열어야지 다짐했다오.
우리나라 최초의 회화이며 중요한 문화재인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 많은 관심 가져주길 바라오.
문제 시 둥글게 말해주시오...
많이 힘들게 쓴 글이오 허허
첫댓글 오 잘보았소! 평소에 문화재에 관심많아서 이런 글을 보면 보는 내가 반갑소! 걸걸
고맙소 써놓고 아무도 관심없을까 걱정하였소
별 말씀을..걸걸! 역사랑 문화와 관련된 학과에 다니고 있고 꿈도 그 쪽이라 그래서 오히려 고맙소!
본궁의 생각도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보호해야한다 생각하오 그럴가치가 충분히 있는 문화재이거늘.....
오 정말 공들여 쓴것이 보이오!정말 유익하오!
흥미롭고 유익하였소!!!
오오!!!!본궁 역사 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나는구려!!!좋은 글 잘보았소 고맙소!!!!!
잘 보았소! 물에 잠긴다니 참으로 안타깝소....ㅜㅜㅜ
신기하오 본궁도 수업 중에 배운바 있는 중요한 유산이오 (흐느낌) 잘 보존되었으면 좋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