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먼 옛날 세습 방랑시인으로 출생. 한때 디오니소스의 친구.
- BC 1125
- 카스피 해안에서 암말로 출생.
- BC 0017
- 시베리아 예니세이 유역에서 인간으로 출생, 아기 무당.
- 1302
- 장소 미상(未詳)의 술집 주모.
- 1422
-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출생. 주로 행상.
- 1597
- 내몽고 출생, 목동.
- 1634
- 조선 삼지연 출생, 화전민 피리를 불었다.
- 1689
- 조선 추풍령 출생, 일자무식 나무꾼.
- 1770
- 여수 돌산도 출생, 무사승(無師僧).
- 1847
- 안면도 출생, 귀머거리 머슴. 술을 너무 좋아했다.
'내가 죽고 나서 몇 년 뒤 누군가가 내 무덤을 파헤쳐본다면 거기에도 내 뼈 대신 내가 그 무덤의 어둠 속에서 쓴 시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살지 않는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너무 시에 집착하나? 하기야 시와의 결별 바로 옆에서 내 시는 실재하기 때문에 내 집착은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에도 속한다.'
- 1933
- 8월 1일(호적에는 4월 1일로 잘못 등재됨) 군산시 미룡동 138번지(그 당시는 전북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부락)에서 아버지 고근식(高根植) 어머니 최점례(崔點禮)의 장남으로 태어남(음력 6월 10일 아침 10시). 본명 은태(銀泰).
1950년의 6·25 전쟁 중에 이름의 끝자는 떼어내고 은(銀)이라고 자칭한 이래 오늘에 이름.
어린 시절은 <암사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이는 사람들을 보면 유난히 부끄러움을 탔기 때문. 당숙이 집에 와도 두 손바닥으로 새빨개지는 낯을 덮고 있다가 도망치기 일쑤였음.
중농(中農)과 빈농(貧農)의 변전이 심한 가운(家運). 9세까지 이 마을 저 마을의 서당을 전전하며. 백수문(白首文)부터 동몽선습, 소학, 논어 등을 익혔음.
- 1943
- 미룡국민학교 입학. 그해부터 조선어 교과과목이 폐지되어 일본어만으로 수업. 그러나 마을 머슴 대길이 아저씨로부터 <언문>을 배웠으므로 탄금대인(彈琴台人)의《의지할 곳 업난 청춘》을 주룩주룩 읽다가 종조부한테 혼나기도 했고, 신식 연애소설 따위를 마을 아저씨들을 통해서 빌려다가 탐독. 일본 이름 다까바야시 도라스께(高林虎助).
3학년 때 일본인 교장 아베(安部)가 장차 무엇이 되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육군대장 해군대장이, 또 여학생은 간호부가 되겠다 했는데 나는 천황이 되겠다고 해서 그 때문에 천황모독죄의 퇴학처분을 간신히 넘기는 대신 3개월 동안 하루 3시간씩 썩은 보리에서 덜 썩은 보리를 가려내는 악취 속의 강제 작업을 했음. 고독을 체험.
그림과 작문에 재미가 생겨났음. 이 무렵의 마을 동무 이관전.
- 1945
- 8·15해방으로 월반(越班), 단번에 동급생이 하급생이 되어서, 허약체질로 주눅이 든 처지에서 해방되었음. 학교 친구 문수원, 고근상 등.
해방 직후 새로 부임한 권모(權某) 교장이 친일파라 해서 교내 동맹휴학을 하는데 주모자의 하나로 되었음. 최칠봉, 고재영 교사의 사랑을 받음.
1년 뒤 신설된 군산 사범학교 입학시험에서는 성적은 단연 우수 했으나 동맹휴학사건 때문에 품행문제로 불합격 처분을 받고 다음해 군산중학교에 5백 명 중 수석으로 입학. 그러나 이후 공부를 싫어하고 선생을 무시했음. 급장 부급장 따위를 내놓고 미술부에 들어가 교내전에서 1등상을 받기도 했음.
어느 날 저녁 10리길의 학교와 집 사이의 길에서 시집《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를 습득, 그 시집을 밤새도록 읽고 가슴이 찢어 질 것 같은 문학적 충격을 받음.
이광수, 노자영 등을 열심히 읽기 시작함. 몇 번 출분(出奔)했으나 그때마다 아버지한테 잡혀서 집으로 돌아왔음.
해방 직후에는 특히 반탁(反託) 동맹휴학, 단정(單政)반대 동맹 휴학을 즐기고, 새벽에 상급생의 지시에 의한 벽보 붙이기 심부름 등에 참가했음. 강 건너 장항 제련소의 굴뚝에서 늘 영원감(永遠感)을 체험함.
- 1950
- 6·25전쟁으로 4학년 휴학. 이때부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기 시작함. 3개월 동안 인공 치하. 밤에는 인민군의 명령으로 비행장 강제노동, 미군의 함포사격, 폭격 등으로 파손된 활주로 복구작업을 하고 낮에는 집에서 노동. 이때 한 마을의 선배 김기호와 함께 그는 효성(曉星) 나는 호성(湖星)이라는 호를 쓰며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음.
9월 수복 전후 동족상잔의 참극에 의해서 정신착란 상태가 지속 되면서 그때까지의 농촌적 순결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함. 가출사건이 빈번해 짐.
1·4후퇴로 서해 선유도에 부산행의 피난선을 버리고 기착하여 멀미를 가라앉힌 이래 아버지와의 피난살이에서 문학 지망의 은사 김종숙(金鍾淑)과 함께 하루에도 몇 10편의 습작 시를 지음. 그 무렵까지의 시 원고를 정리하여 <아름다운 전설>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그 뒤의 입산(入山) 당시 불살라 버렸음.
피난에서 돌아와 군산의 미(美) 제21항만사령부 운수과 검수원, 군산 북중학교 국어 및 미술교사 (그 당시에는 교사 자격이 없이도 ×동(童) 운운해서 특채될 수 있었음) 따위를 하다가 옥구 대야(大野)에 가서 엿장수도 했음. 이병기, 신석정, 백양촌, 김수영 등을 만남.
자학증상이 깊었으며, 군산항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일본인 항해사가 건져 냈음. 화장도 하고 다녔음. 두 귀에 청산가리를 넣어서 고막이 녹았으나 하나는 구제.
고향의 문사(文士) 전학배(田鶴培)․옥배(玉培) 형제에게 심취. 그들을 찾아가서 밤새 우는 일이 많았음. 학업 계속을 거부하여 가정불화. 지방의 선배 문인 목련(木蓮 宋基元)과 감격적으로 만남.
- 1952
- 불교 승려가 됨. 법명(法名) 일초(一超). 효봉(曉峰)스님의 상좌가 된 이래 12년 동안 수선(修禪)과 만행(萬行). 목포 유달산 암굴의 거지대장 수제자가 되어 거지 의발(衣鉢)을 전수받음. 구걸 행각에 한동안 몰입. 훨씬 뒤 청담(靑潭)스님과 함께 한 서울 등지에서의 탁발행각(托鉢行脚)도 이때 길들여짐.
- 1957
-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들어감. 불교 총무원 간부, 전등사 주지, 해인사 교무 및 주지 대리 등 역임.
《불교신문》을 이행원(崇山)과 함께 창간, 초대 주필이 되고 그 신문에 논설, 시문 등을 발표함.
- 1958
- 시 <폐결핵>을 친구인 나병재(羅丙哉)가 투고해서 조지훈 등의 천거로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발표되면서 시단에 나옴.
이어서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泉隱寺韻> 등이 서정주의 단회(單回) 추천으로 발표되었음. 구자운, 박희진, 박재삼, 이형기, 김관식 등과 친교. 화단의 신인 김창렬, 나병재, 김서봉, 안상철, 하인두, 박서보, 등과도 교류, 박고석, 전봉초 등과도 자주 만남. 친구인 시인 백종구, 화가 나병재의 결혼 주례를 비롯, 승려 시대의 결혼 주례가 1백여 회.
비가 오면 조계사 마당에서 벌거숭이로 뛰놀았는데 그럴 때는 다른 승려들도 벌거숭이로 따라나섰음.
- 1959
- 첫 시집《불나비》40편의 시가 인쇄 도중 화재로 전소되어 작품을 다 잃었음.
해인사에서 단식 21일, 용맹정진의 수행이 잦았음.
첼리스트 조현진(趙顯瑨)과 친숙.
- 1960
- 시집《피안감성彼岸感性》출간. 해인사 승려 혜정(慧淨)과 대구의 독일어 교사였던 시인 송영택이 시집 출판에 도움이 되었음. 오상순(吳相淳)과 동숙. 전후문협(戰後文協) 결성에 참가.
- 1961
- 장편소설《피안앵彼岸櫻》출간.
《반야심경해의般若心經解義》《불교의 길》(선학원) 출간, 각각 등사본.
전국승려대회 지도위원, 중진회의 등을 탈퇴하고 평 승려로 돌아감. 도우회(道友會) 회장 피선. 그러나 교단 혁신운동을 위한 청년 승려 단합을 서두르다가 그것이 단순한 종정 하야(下野)를 위한 음모로 오판되어 징계회의에 회부되기도 함.
강연 행각. 이때부터 10여 년간 '가짜 고은'이 전국 각 지역에 출몰함.
- 1962
- 한국일보에 환속선언을 발표하고 환속, 그동안 품수(稟受)한 대덕법계(大德法階)를 반환. 중생제도에 대한 환상이 강해서 그 때문에 현실에서의 좌절이 몇 번 있었음.
숄로호프의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그동안 써둔 원고들을 불질러 버리고 절망에 빠짐.
폭음의 주란(酒亂)과 퇴폐. '가짜 고은'도 환속한 세속인 차림으로 고은 행세를 하고 다녔는데 경주, 김천 등지에서는 한글 백일장 심사위원장, 한시대회(漢詩大會) 심사위원, 서울에서는 모대학 영문과 졸업반인 여대생과 결혼하고, 제주도에서도 충남대 가정과(?)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는가 하면, 계룡산에서는 공주지방의 문학청년들의 추앙을 받으며 금품 수취도 일삼으며, 각종 사기행각을 함. 이 때문에 본인에게 피해가 막대했음. 5여 년 뒤에 하나는 제주도에서 체포되고 다른 하나는 10여 년 뒤에 서울에서 경찰과 합동으로 체포하여 훈방.
《세계전후문제작품집 - 한국전후문제시집》에 <고은집高銀集>을 수록. 구상(具常)과 친교.
- 1963-66
- 제주도 기류. 처음에는 제주해협에서 투신자살을 뜻했으나 만취한 상태에서 자살이 포기됨.
제주시 화북동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금강고등공민학교를 개교, 교장 겸 국어 미술 교사로 있으면서 무료수업으로 3년간 1회 졸업생까지 배출. 폭음. 어느 때는 만 3일을 자지 않고 마시기도 했고 술취해서 공동묘지에서 잔 일도 허다함. 최현식, 김종철, 이영복, 문성선, 박만영 들이 그때의 벗.
장시 <니르바나> 발표. 서울의 김수영(金洙暎)이 자주 격려를 함. 불면증 심각, 허무주의에 침윤, 반주로 소주 4홉짜리 한 병이 거의 다반사. 바지란 바지는 다 가위로 잘라서 반바지를 만들어 입고 다님. 서울의 신동문(辛東門)이 늘 보살펴 주었음.
서귀포와 마라도에 사로 잡힘. 한라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가까스로 구조됨. 김현 등이 찾아옴.
시집《해변의 운문집》출간.
- 1967
- 서울행을 결심, 15일 동안 송별회 술을 마시고 제주도를 떠남. 민음사 박맹호와 만남. 윤호영의 도움으로 홍릉에서 기거.
수필집《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 시집《신, 언어의 마을》 출간.
민음사, 신구문화사의 편집실에서 생활. 신동문의 술을 최인훈, 염무웅, 김현 등과 자주 마심.
- 1968
- 수필집《G선상의 노을》,《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출간.
한국 뮤지컬 대본 <한강>집필 - 예그린 악단의 공연 제목은<정이 흐르네>.
《세대(世代)》에 연재·기고를 자주 했고, 이광훈, 이중한, 권영빈 등이 내 글을 게재하기 좋아했음.
- 1969
- 정릉으로 이사. 화가 박고석 등과 친교.
자취와 매식, 폭음·만작(晩酌)의 주벽.《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절망의 메시지》 출간. 장시 <사형(死刑)>(大日蝕 改題).
동화통신 부장대우로 취임, 이것이 유일한 직장생활. 외신기자 구락부 살롱을 취중 난동으로 파손시켜서 그 일로 바로 사직, 저술에 전념.
- 1970
- 단시집(短詩集)《세노야》출간. 신민당 대통령후보의 신문 발표용 선언문 초안 청탁이 송원영(宋元英) 측으로부터 문공부 차관직 제시로 있었는데 사절.
정교하게 추진한 음독자살이 정릉 골짜기 취약지구 예비군 특훈 때문에 의식불명의 신체가 발각되어 경찰에 의해 입원, 만 30시간 만에 의식 회복. 장기간 치료 및 휴양.
아버지 병사(病死)로 20여 년 만에 밤중에 고향에 감.
노동자 전태일(全泰壹)의 분신자결로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
- 1971
- 연희동으로 이사. 수필집《한 시대가 가고 있다》 출간.
송지영, 남재희,《문학과지성》편집 동인 등과 술을 자주 마심.
- 1972
- 《1950년대》제1권 출간. <노래의 사회사(社會史)>를 한국일보에 연재.
- 1973
- 화곡동 46-308로 이사. 이 이사 이후 이른바 허무주의의 대표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역사의식의 출발이 실현됨. 박정권 3선 개헌반대 운동의 첫 단계인 개헌청원 운동에 문인대표로 참가. 백낙청 등과 동반하기 시작함.
세칭 문인 간첩단사건 구명운동을 주도하고 민청학련사건의 김지하 석방운동도 개시함.《이중섭평전》을《신동아》에 연재, 출간(영화화). 중편《파계(破戒)》영화화.
- 1974
- 작가의 사회적·역사적 책무를 절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백낙청, 이문구, 박태순, 염무웅, 이시영, 송기원, 조태일, 황석영, 신경림, 장용학, 등과 결성, 초대 대표간사로 활약. 제1차 선언문 발표. 데모 중 체포됨.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문인대표로 김병걸, 백낙청 등과 참가. 이때부터 경찰서, 정보부의 고객이되어 유폐되는 일이 다번 했음.
시집《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장편소설《일식日蝕》(영화화 됨)을 출간,《이상평전》을《세대》에 연재, 출간. 장편소설《어린 나그네》를 《독서신문》에 연재, 출간.《고사편력(古寺遍歷)-나의 방랑放浪 나의 산하山河》출간. 편역서 《당시선》, 《두시언해》 출간.
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한 이상화(李相華)와 만남.
제1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동아 자유언론투위와 동조, 동아일보지광고의 격려광고 운동에 박차를 가함.
강연, 선언문 낭독 등에 의해 당국에 연행, 장기구금. 전담형사 및 정보부 기관원의 24시간 감시·동침·동행이 계속됨. 심지어 친지의 결혼식에 갈 때도 동행하고 술집에도 함께 가서 앉아야 했음.
서울대생 김상진 추도식 때문에 명동 수녀원에 피신, 끝내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추도식을 함세 웅신부 등과 개최.
- 1975
-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선포로 일단 칩거당함. 한동안 절필(絶筆)하다가 집필 재개. 이 1년 동안 소주 1천 병을 통음(이 계산은 이문구가 해주었음).《서울평론》에 연재했던《한용운평전》 출간.《세대》에 연재한《제주도》 출간. 민음사의<오늘의 시인선>의 고은시선《부활復活》 출간. 역주《초사(楚辭)》출간. 이남덕, 이효재, 박순경, 이종복, 권영빈, 강운구, 등과 설악산에서 자주 만남.
- 1976
- 지학순, 김승훈, 함세웅,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등과 <김지하 구출위원회>를 결성, 부위원장으로 석방운동 개시.
이우정 등과 동일방직사건에 대한 대책위원회, 상고사 대책위, 원풍모방 대책위, 전태일과 청계피복사태 문제 등에 참가하여 노동 운동에 입문. 제품 불매운동, 단식투쟁, 시위와 노동시 낭독, 선언문 발표 등으로 여념이 없었음.
오늘의 산문선집《환멸을 위하여》출간. 역주《시경(詩經)》출간.《한국의 지식인》출간. <불교란 무엇인가>를《법륜(法輪)》에 연재. <시와 시대>를 《독서신문》에 연재. 역주《두보시선(杜甫詩選)》 출간. 동화《갠지스 강의 저녁놀》출간.
- 1977
- 시집《입산(入山)》출간. 소설집《밤 주막》출간. 수필집
《세속의 길》출간. 오늘의 사상신서《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출간. 장편소설 《피안앵》을 개작,《산산이 부서진 이름》으로 출간. 민주구국헌장사건 주모자로 약 1개월 동안 정보부의 지하실에 구속, 그 뒤로 송광사에 유폐당함.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조태일과 함께 서울구치소에 수감. 구속 취하로 석방. 선임 변호사 김강영, 홍성우, 황인철 등. 나의 인세 및 가계 등의 관리를 담당형사가 맡음. 황숙자가 옥바라지. 출옥 뒤 자유실천문협 제3주년을 계기로 문학운동 확대를 위한 선언문 발표. 《대화》에 장시 <대륙大陸> 연재.
- 1978
- <민주청년협의회>를 화곡동 자택에서 결성 지도, 윤보선, 문익환, 박형규, 성내운, 천관우, 송건호, 백기완 등과 고문이 됨. 민주통일 원칙 및 방안의 모색. 광주 서울 부산 등지의 많은 강연, 그 중에서 KSCF주최 4·19기념강연은 열렬한 반응.
자유실천문협과 백범사상연구소 공동주최로 '민족문학의 밤'을 개최, 성대한 운동이 되었음. 개회사 및 <갯비나리>를 친지 백기완 등이 특별낭송. 외유와 국회의원, 장관 등의 유혹과 협박 심각.
8·15를 맞아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삭발. 다시 평화시장 남영나일론 해태제과 등의 노사문제와 동일, 상고, 원풍 등의 사태에 대한 대책문제로 노동 현장에 접근.
이 무렵 <똥> <쪼까니 딸들에게> <열다섯 살의 노동자 바우에게> <전태일> <장준하> 등의 근로자 격려시를 각 집회에서 발표. 이 때문에 당국의 제재가 있었음.
원주 집회사건으로 구금. 집은 늘 찾아오는 젊은이들로 메워짐.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발족, 송건호 등과 함께 그 부회장에 피임.
산문집《사랑을 위하여》, 《가난한 이를 위하여》, 평론집《진실을 위하여》출간. 민중연구 모임에 참가(서남동, 백낙청, 박현채, 김용복, 서인석, 현영학, 김윤수, 구중서). 일제잔재 청산, 분단극복을 지향하는 새로운 문학운동을 제기함.
시집《새벽길》 출간.
- 1979
- 평론집《지평선으로 가는 고행苦行》출간. 《한국문학전집 - 고은집》 출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약칭 국민연합) 결성, <민주회복국민회의>와 <한국인권운동협의회>의 지도층을 잇는 새로운 재야운동의 총본산이 실현됨. 함석헌,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 함세웅, 박형규, 이우정 등과 함께 참여, 문익환, 함세웅과 함께 중앙상임위 부위원장으로 핵심 역할을 함. 각종 인권문제에 대응. 집에서 세수할 겨를도 없을 때가 많았음.
이상화 영국 런던대 대학원으로 떠남.
YWCA에서 10일간 민족문학 특강. 《실천문학》창간 주도.
미 대통령 카터 방한 반대 데모 주도, 구속.
YH사태에 문동환, 이문영 등과 함께 대책 수립, 농성현장을 격려·지도. 신민당 총재 김영삼에게 여공들의 문제를 협의, 적극 찬동을 얻음. YH 김경숙 양 신민당사에서 절명. 국가보위에 관한 특조법 위반으로 문·이 등과 함께 서울구치소에 투옥. 선임 변호사 홍남순,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박한상, 박세경, 등. 집은 오종우가 맡아줌. 옥중에서 10·26사태를 만남. 연말에 보석 형식으로 출감. 노동운동을 결심하고 하루 두 갑짜리 담배를 끊음. 감옥에서 귀의 고막 파열로 청각을 잃어서 그 때문에 귀와 코의 수술. 서울대 의대 김종선(金宗善) 집도.
- 1980
- 계엄하에 작품발표 엄금됨. 국민연합운동 적극화. 이때 한두번 작품발표를 위해서 '무단(舞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음. 소설집《산 너머 산 너머 벅찬 아픔이거라》출간. 대학신문들의 청탁에 호응. 출옥 직후 영등포에 노동학교 설립, 교장이 됨.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이문영, 이우정, 서인석, 서남동, 김종철, 정연주, 이돈명, 홍성우, 김용복, 한완상, 김찬국, 장기표, 신혜수, 서경석, 임명진 등이 주요 초빙 강사. 각 대학 강연.
5월 이후 내란음모죄, 계엄법, 계엄교사 죄목으로 조사, 재판.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등과 육군교도소에 구속됨. 죽음 직전의 극한 상황 체험. 군법회의에서 20년 선고 받음.
- 1981
- 대구교도소 특별요시찰 정치범 수용 중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어 통합병원에서 파견된 김종선에 의해 다시 귀 수술, 위기를 넘김. 양복순과 친지들이 집을 맡았음.
- 1982
- 8·15기념으로 가석방. 국민연합 동참 예춘호를 비롯 성내운, 박태순, 염무웅, 김종철 등이 대구에 와서 내 신병을 인수.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건강상태였음. 여러 번의 옥중 단식으로 인한 악성 위궤양, 과민성 대장염 치료. 삭발 철회. 당분간 강연 불응.
- 1983
- 친구인 의사 장홍주의 시술로 어머니 양성종양 수술. 3년 만에 시를 발표. <조국의 별> <온돌>(세계의 문학) <4월혁명론> 발표. <함석헌 전집> 편집위원.
5월 5일 이상화와 결혼. 풍운의 독거생활을 끝냄. 식장은 수유동 안병무 교수 자택 정원. 주례 함석헌, 축도 문재린, 축시 문익환, 축사 이문영. 백낙청, 집전 리영희 교수 등으로 극히 제한된 친지 1 백여 명만을 초청함. 정보기관에서도 당일에야 알고 달려왔음.
아내는 결혼으로 대학 당국에서 면직 여부 대상이 되었으나 대학 담당 안기부 직원의 권고로 무사하게 넘어갔음.
결혼 직후 고려대 이문영 교수가 소개한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에 주거를 정함.
4년 만의 첫 강연 <민족통일의 역사적 과제>. 시를 잇달아 발표함.《고은 시전집》1, 2권 출간. 출판기념회를 준비가 당국에 의해서 제지당함.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주년을 맞아 재창립, 후진에게 물려줌. 일본의 반핵평화운동대회의 초청이 있었으나 출국불허.
미국 기독교 기관에서 초청이 있었으나 출국불허. 연금이 다시 계속됨.
- 1984
- 김재준, 함석헌, 안병무, 박형규 등과 재야간담회 구성 실무를 맡음. 민통련 지도위원직 등은 자동적인 것임.
시집 《조국의 별》출간.
- 1985
- 서사시 <백두산>을 계간지《실천문학》에 연재하다가 강제 폐간당함. 창작과비평사 출판사 등록 취소에 맞서 투쟁. 월간 《마당》에 <겨레와 노래> <어린 시절>을 연재.
딸 차령이 태어남. 5월 12일.
미국 일본 등지의 초청여행 불허됨.
- 1986
- <만인보(萬人譜)>를《세계의 문학》에 연재함. 전작으로 옮겨 1, 2권을 출간.《창작과비평》강제폐간 뒤 이름을《창작사》로 연명할 때였음. 시집 《전원시편》,《시여 날아가라》,《가야 할 사람》, 평론집《문학과 민족》출간. 산문집《고난의 꽃》출간.
일본 펜클럽과 서독 하이델베르크대 등지의 2개 대학 강연 초청이 있었으나 여권이 발급되지 않음. 당국에 의한 연금상태 자주 있었음. 집 주위는 항상 사복 경찰관 수명이 감시. 제13회 한국문학작 가상 수상식에도 연금에 동원된 경찰 중 3명과 함께 동행하여 상장만 받고 바로 귀가 조치됨.
- 1987
-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상임공동대표(박형규, 김승훈, 이돈명 등과). 6월 항쟁에 적극 참여. 최루탄가스로 흉통이 잦았음. 동대문, 세운상가 그리고 서울역 광장 시위에 참가하였음.
박종철, 이한열 군 추도회 주관하고 추도시 낭독. 서울 시청앞 광장 2백만 시민집회에 앞장섰으나 그것을 청와대로까지 이끌지 못했음. 이른바 대통령 직선제의 6·29선언에 이렇다 할 정치적 대응없이 대통령선거 국면을 맞았음. 재야가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것을 보고 비애. 저술에 몰두함. 대학 등 강연 계속.
당국으로부터 완전봉쇄의 연금조치를 자주 당하고 어느 때는 사전에 이를 피해서 떠돌이 생활로 보내기도 했음.
버클리대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강연과 여행 2개월(1회용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 그러나 일본의 국제평화대회 초청에는 정작 일본 정부로부터 배일(排日) 사상가로 낙인 찍혀 비자를 받지 못했음.
대하장편서사시《백두산》시작, 1, 2권 출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해체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회장 김정한, 백낙청과 함께 부회장이 됨.
《만인보》3, 4, 5권. 출간.
- 1988
- 《만인보》6권, 시집《네 눈동자》, 《나의 저녁》, 《그 날의 대행진》, 평론 《잎은 피어 청산 되네》출간. 《고은전집》1, 2, 3, 4권을 출간하면서 매월 2권씩 계속해서 간행함.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여덟 번째 초청인 일본 이와나미(岩波) 출판사 초청이 당국의 출불허로 또 막히고 함께 초청된 백낙청을 통해 강연 원고가 대독되었음.
다시 일본 초청을 받아 그곳 2백여 지식인과 작가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강연과 대화를 계속함. 일본 사회당 당수 도이(土井) 위원장. 작가 오에(大江健三郞), 야스에(安江良介), 이회성(李恢成), 노마(野間宏) 등과 교유. 일본 TV의 취재 계획에 따라 오키나와 조선인 희생현장 참배.
- 1989
-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위원장에 피선, 남북작가회담 제안. 판문점 회담을 위해서 회담 대표와 동료들이 가다가 연행 되었음. 일단 귀가조치 뒤 다시 연행하여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시킴. 서울구치소. 국제펜클럽 등 여러 나라의 석방운동, 구속항의에 의해 2개월 만에 보석 석방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의 1심, 2심 재판이 진행됨.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창립, 초대 공동의장 피선으로 의장 수락연설. 해방 이후 처음으로 진보적 예술인의 결집체가 이루어졌음.
《만인보》 7, 8, 9권. 산문집 《고은통신》, 《얼마나 나는 들에서 들로 헤매었던가》 출간.
- 1990
- 시집《아침이슬》, 《천년의 울음이여 사랑이여: 백두산 서정 시편》,《눈물을 위하여》. 평론집《황혼과 전위》출간. 납월북 예술가 산문집 전 3권 엮음.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 1991
- 민예총 의장 연임한 뒤 사임. 문학 저술활동.
시집 《해금강》, 《선시 - 뭐냐》, 《거리의 노래》, 《백두산》3, 4권, 장편소설《화엄경》출간.
<중앙문화대상>수상.
- 1992
- 호주 시드니대 한국학과에서 <한국문학의 오늘> 강연 및 호주 각 지역 여행.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초청, <한반도의 꿈> 강연.
장선우 감독, 김형균 등과 인도, 네팔, 스리랑카 여행.
시집《내일의 노래》, 소설《그들의 벌판》,《내가 만든 사막》 출간.
- 1993
- 김영삼 정부에 의해 리영희 교수 등과 함께 사면 복권됨. 처음으로 복수여권을 발급받음.
미국 미시간대 국제대학 주관 국제대회에 리영희교수와 함께 강연.
경향신문사와 MBC 후원, 창비, 동아출판 협찬의 <시력詩歷 35년 고은 문학의 밤> 문학행사. 연강홀. 기념집 《고은문학앨범》(웅진) 출간.
경향신문에 자전소설 <나의 삶 나의 산하> 장기 연재, 광주일보에 <방랑시인> 연재.
서사시《백두산》후반부 5, 6, 7, 8권 출간. 시집《아직 가지 않은 길》, 에세이집《광야에서의 사색》, 여행기《인도기행》, 연구서《내가 가는 금강경》, 자서전《나, 고은》1, 2, 3권 출간.
아내 이상화, 딸 차령이와 함께 첫 유럽여행.
- 1994
- 경기대 대학원 석좌교수로 초빙됨 (1994-1998).
제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대하서사시《백두산》5, 6, 7권을 출간하면서 완성.
- 1995
-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초청 시낭독 및 강연.
프랑스 문화성 초청, 시낭송 및 문예지 고은특집.
시집《독도》. 소설 《정선아리랑》, 《소설 김삿갓》1, 2, 3권, 소설《선(禪)》1, 2권.
자서전《나의 청동시대》.
- 1996
- 호주 작가 페스티벌 참석. 고은 시선《아침이슬》영어판 출간. 시드니 TV 특집 프로 '한국시인 고은'에서 대담 및 시낭독.
일본 오사카 '중심 21' 초청강연 및 시낭독.
독일 주어캄프사 주최로 프랑크푸르트, 뮌헨, 베를린 등 5대 도시 순회 시낭독. 독일 주요신문들 인터뷰.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제시인대회 참석.
시집《어느 기념비》, 대하연작시《만인보》10, 11, 12권 출간.
- 1997
- 버클리대에서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와 함께 시낭독. 버클리대에서 미국 계관시인 로버트 하스와 시낭독.
멕시코 <과달라하라 북페어> 문학행사에서 시낭독 및 인터뷰.
시집 《어느 기념비》,《만인보》13, 14, 15권 출간. 프레스 센터에서 창작과비평사 주최《만인보》15권 출판기념 '70년대 사람들' 행사.
산문집《살아있는 광장에 서서》, 동시집《차령이 노래》, 동화책《나는 시골 삽살개에요》
40일간 티베트 수미산 순례 중 어머니 별세(향년 84세).
- 1998
- 중앙일보 주관으로 북한 방문, 15일 간 북한 각지 문화와 자연 시찰. 북한에서 쓴 시를 분단 이후 최초로 팩스를 통해 직접 남한에 전달, 신문에 실림.
시집《속삭임》출간.
프랑스 정부 초청, 파리 <작가의 집>에서 미셀 드기, 알랭 주프르와와 시낭독, 이브 본느프와와 대담.
<산하여 나의 산하여:고은 시낭독회>가 예술의 전당에서 2일간 공연됨.
<만해대상> 시부문상 수상.
- 1999
- 미 하버드대 옌칭 연구교수 및 버클리대 방문교수로 가족과 함께 1년간 도미, 시론 강의.
한국 뮤지컬 대본 <백범 김구>집필.
하버드대 페인홀에서<고은의 밤>행사.
시카고대에서 미국 10대 시인의 하나로 시낭독 및 강연.
미 UCLA, 버클리대, 하와이대, 캐나다 요크대학, 캘거리 등지에서 강연과 시낭독.
뉴욕에서 '고은의 밤' 행사.
멕시코에서 파블로 네루다 기념 시낭독회 중남미 시인들과 참가.
시집《머나먼 길》, 북한여행기《산하여, 나의 산하여》, 시평론《시가 있는 아침》, 소설《수미산》1, 2권 출간.
- 2000
- 분단 55년 휴전 50년 만의 남북공존을 세계에 선포한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의 일원으로 방북, 기념만찬장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낭독.
스웨덴 스톨홀름대 한국학 포럼 참석 및 <요테보리 도서전시회>에서 강연 및 시낭독.
미워쉬와 쉼보르스카야가 후원하는 폴란드 크라카우 세계시인축제에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망명시인 베이 다오와 함께 참가. 쉐이 머스 히니, 로버트 하스 등과 각종 시 행사에 참여.
시집《남과 북》,《히말라야 시편》출간.
- 2001
- 유네스코 주최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세계 시인의 날'에 초대받아 아테네, 델피, 올림피아 등지에서 시낭 및 토론.
독일 브레멘 세계시인대회에서 시낭독 및 강연과 인터뷰.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린 <세계 시 아카데미>창립대회에 회원으로 초청받음.
남미 콜롬비아 국제시인대회에 초청받아 각지 순회 시낭독.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동양박물관 초청강연 및 요테보리 국제 도서전 시 축제에서 시 낭독.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 초청으로 UC 데이비스에서 시낭독 및 강연. UC 버클리와 UC 산타크루즈에서 시낭독 및 강연.
일본 도쿄 국제도서전시에서 후지와라 출판사의 포럼 발제자로 참가. 일본 5대 일간지와 인터뷰.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대 초청, 시낭독 및 강연.
시집《순간의 꽃》, 수필집《길에는 먼저 간 사람의 자취가 있다》출간.
- 2002
- 체코 '프라하 작가 축제'에 초청받아 시낭독 및인터뷰, 현지 신문에 <시와 혁명> 기고.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서 열린 한국 문예창작학회 국제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필리핀 마닐라에서 필리핀 문학예술센터가 주최한 제1회 '환태평양 시인축전'에 13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 발제 및 시낭독.
백낙청 편 고은시선《어느 바람》출간.
전 38권의 《고은접집》출간 (김영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총장의 초청으로 시낭독 및 문학강연.
프랑스 정부 초청의 한국문화축제 행사로 파리 몰리에르 극장 시낭독.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 받음.
시집《두고 온 시》, 《늦은 노래》, 《젊은 그들》출간.
- 2003
- 일본 오끼나와에서 열린 문학과 환경 국제회의에서 발제 및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와 시낭독.
프랑스 빠리 제 7대학 동양학 연구소 주최 아시아 축제에서 시낭독, 강연 등.
이라크 한국군 파병 반대 작가 시위.
스웨덴 동양박물관 주최 현대한국문학 심포지엄에서 발제강연 및 시낭독.
일본 도쿄 국제 도서전의 한일 지식인 포럼에서 기조연설 및 기자회견 등.
만해재단 주최 국제평화시인대회 대회장으로 세계 20여개국에서 온 시인들의 문학축전을 금강산과 서울에서 진행.
제 3회 베를린 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 및 시낭독.
군산에서 시비 '삶' 제막행사.
- 2004
- <한국문학평화포럼> 회장.
미국 워싱턴의 폴저 쉐익스피어 도서관에서 시낭독, 하버드대학과 위싱턴대학에서 시낭독.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여행.
스페인 살라망카대학에서 스페인 시인 안토니오 꼴리나스와 시낭독.
오페라 대본 <단군>(일명 개천<開天>) 집필.
스페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만인보》 출간 기념 시낭독.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고은 문학의 밤' 개최.
스페인 무르시아 세계시인대회와 꼬르도바 도서전에서 시낭독.
단재상 수상.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제 1회 한이문학포럼에서 강연 및 시낭독.
《만인보》16-20권 출간.
- 2005
- 한반도 분단 이후 최초의 한국어 공동사전 편찬을 위한<겨레말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상임위원장에 취임.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강연 및 시낭독.
일본의 마쓰야마대학과 고베 등 여러 도시에서 강연, 대답, 인터뷰 등.
장편 판소리 대본 <초혼(招魂)> 집필.
제 3회 베를린 세계 시인축제에서 대담, 시 낭독, 시 녹음 등.
노르웨이 몰데에서 열린 뵨슨문학제에서 강연, 시낭독, 인터뷰 등. 이어 오슬로 대학에서 강연과 시낭독.
독일 베를린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과 시낭독.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주빈국 대표로 개막식의 '문학연설'을 하고 여러 행사에서 시낭독, 인터뷰 등.
노르웨이의 유일한 문화훈장인 뵨슨 문화훈장 받음.
- 2006
- <겨레말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의 정례회의를 위해 수차례 북한 방문.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백두산에서 남북작가 300여명이 참가한 문학축제에 남측 대회장으로 시낭독.
이탈리아어판 《순간의 꽃》 출판 기념 시행사를 로마, 피렌체, 밀라노, 포르미아 등 4개 도시에서 개최, 여러 인터뷰와 시낭독.
프랑스 보르도대학과 빠리 도서전에서 강연 및 시낭독.
미국 여러 도시에서 영어판 시집 《삼거리 주막》 출판 기념 강연과 시낭독.
미국 PEN의 뉴욕 국제문학제에서 시낭독, 알렌 긴즈버그 50주기 기념식에서 시낭독.
이탈리아 빠르마 세계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 대화, 시낭독.
미국 제랄딘 다지 국제 시축전에 '특집시인'으로 초대받아 강연, 대화, 시낭독. 이어 하버드대학과 워싱턴대학에서 시낭독.
스웨덴의 문학상 시카다상 수상.
《만인보》 21-23권. 시집 《부끄러움 가득》 출간.
- 2007
- 몽고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제 1회 한몽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홍콩에서 개최된 국제 펜 아태지역회의의 특별손님으로 초대받아 시낭독.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ARCO 기념행사에서 인터뷰와 대담 및 시낭독, 말라가대학에서 강연과 시낭독.
서울대 초빙교수.
일본 도쿄에서 열린 <21세기 지식인>이 주최한 제2회 국제 콜로키엄에서 기조연설, 대담과 인터뷰 등.
일본 가나자와에서 개최된<문학과 환경학회>한일공동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영랑문학상 수상.
한러문학제에 참석, 모스코바 레닌도서관에서 시낭송.
북경과 상해에서 열린 한중문학제에서 강연 및 시낭송.
《만인보》 24-26권, 산문집《우주의 사투리》출간.
일찍이 1991년 시집 《해금강》을 내면서 고은은 '내가 죽고 나서 몇 년 뒤 누군가가 내 무덤을 파헤쳐본다면 거기에도 내 뼈 대신 내가 그 무덤의 어둠 속에서 쓴 시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살지 않는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너무 시에 집착하나? 하기야 시와의 결별 바로 옆에서 내 시는 실재하기 때문에 내 집착은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에도 속한다.' 라고 썼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02년 고은의 70세를 기념해 창비사에서 펴낸 시선집《어느 바람》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왜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그 대답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길 44년을 나는 어설픈 농부였고 새였고 울음인가 하였다. 그러는 동안 말이 종교였다. 시가 오지 않으면 흙을 팠다. 흙 속에 시의 넋이 더러 묻혀 있다가 내 몸에 떨며 들어왔다. 바람 부는 날 잔터럭이 일어나며 나는 이내 가지 끝을 차고 날아올랐다. 공중에 시가 여럿이 떠 있었다. 스치다가 한 둘은 우연히 쪼아 먹었다. 자주 미쳤다. 운다. 울 음이나 졸졸 가는 도랑물이나 강물 그리고 천년 절벽 때리는 파도기둥이나 다 한 집안이다. 흰 포말의 춤, 시가 거기에 함께 있더라. 세상을 좀 넓히련다. 훨훨! 이승에만 갇혀 있지 않으련다.
첫댓글 ㅋㅋㅋ! 전생 연보, 저런 걸 기억해야 작가가 되는가 봐요. 저도 전생 기억을 짜내봐야 겠어요. 혹시 수필이 기차게 잘 써질지 알아요? 카페지기님 우리 전생 연보 페스티벌 한 번 할까요? 아아아, 생각났어요. 제 전생은 잘 모르지만 저희 어머니께서는 전생에 옥황상제 셋째 딸이었지요. 그러니까 족보를 정확히 짚어 보면 제가 옥황상제님의 외손녀인 거지요.
그랑께...내는 옥황상제 네째 딸이니 이모라고 혀요.
옥황상제의 딸이 되려면 우선 욕부터 잘 해야되요.
지금부터 더 깊이 알아보려구요.^^
고은 샘, 1847년에는 안면도에서 태어나셨대요. 머슴살이 하셨다는데 ㅋㅋㅋㅋ, 왠지 낯설지가 않아요. 울 할 아버지도 그때 거기 가셨었다는데 아마도 두 분이 만났었나봐요. 할아버지의 기억은 제게 유전되었을 것 아녜요.
이 분의 연보를 눈여겨 봐 두시면, 24호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니까 맹난자 선생님 글 속에 아주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시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