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 무릉계곡(서당골)에 있는 오천서원(梧川書院)을 찾았다.
이 서원은 조선 전기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한 대봉(大峰) 양희지
(楊熙止)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1786년(정조 10)에 건립하였다.
파동 오천서원 전경
양희지(楊凞止,1439~1504)의 본관은 중화(中和).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峰)이며, 1462년(세조 8) 24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
1474년(성종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종으로부터 희지(稀枝)라는 이름과 정부(楨父)라는 자(字)를 받았다.
오천서원 가는길의 서당골
1498년 좌부승지, 1499년 대사헌으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무오사화로 명현들이 화를 당하자 바로 사직하였으며, 1500년에 다시
부총관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때 상소하여 무오사화로
서북도에 유배된 사람들의 귀양지를 남쪽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오천서원(왼쪽은 강당, 오른쪽은 사당)
1502년에 동지중추부사 겸 세자우부빈객(兼世子右副賓客),
1503년 동지성균관사를 거쳐 한성부우윤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대봉집"이 있으며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오천서원 강당
사당 출입문
오천사(梧川祠,사당)
건물 동편의 제단
중화양씨 시조 정승 휘 포지단, 정승당악군 양포지단
(中和楊氏 始祖 政丞 諱 浦之壇, 政丞唐岳君 楊浦之壇)
중화양씨(中和楊氏)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재위기간,1213~1259) 때
정승을 역임하고 당악(唐岳, 중국의 옛 지명)군(君)에 봉해진 양포(楊浦)를
시조(始祖)로 하고 중화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있다.
중화양씨 선조 제단
중화(中和)는 평안남도(平安南道) 남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의 가화압(加火押)인데 통일신라 헌덕왕이 당악현이라
하였고, 고려초에 서경(西京)에 편입시켰다가 인종 때 9촌을 합하여
중화현을 만들고 영(令)을 두어 서경의 속현이 되었다.
1322년(충숙왕 9)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 임진왜란 때 부(府)가 되었고,
1895년(고종 32) 군이 되었으며 1914년에 상원군(祥原郡)을 합쳤다.
제단비와 서원
양(楊)씨의 인구는 69여명이며, 본관으로는 청주, 남원, 중화, 안악 등이
있고, 중화양씨는 경상도와 충청도를 위주로 분포하며 7000여명이다.
중화권과 베트남에도 양(楊)씨가 있는데 중국의 양씨는 약 4,600만 명으로
중국 성씨 순위 6위이며, 중국어 발음은 양(Yang)으로 한국과 동일하다.
용지봉쪽으로 가는길
중화양씨 대동총친회 창립비
내려오는길의 무릉계곡(서당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