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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중국 공산당의 폭정(暴政)
들어가는 말
폭정(暴政)을 말하면 중국인들은 흔히 진시황(秦始皇)의 가혹한 정치와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연상하게 된다. 진시황은 “온 천하의 재물을 거두어 바치게 했다.
(1) 무절제하고 과중한 세금 징수(徵稅).
(2) 큰 공 세우기를 즐기고 백성들의 노동력을 남용.
(3) 가혹한 형벌과 연좌제.
(4) 사상제한과 분서갱유(焚書坑儒)
진(秦) 왕조가 중국을 통치할 때, 약 천만 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그 중 2백만 명이 노역(勞役)에 징발 당했다. 이는 청장년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진시황은 나아가 사상 영역에서 가혹한 형벌을 시행하여 사상자유를 속박했으며 조정과 의견이 다른 유생(儒生)을 천여 명이나 살해했다.
‘승냥이 같은 진시황(狼虎之秦)’과 비교할 때, 공산당의 포학함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다. 사람들이 모두 알다시피 공산당의 철학은 투쟁철학이다. 공산당의 통치 역시 일련의 대내외적인 ‘계급투쟁’, ‘노선투쟁’, ‘사상투쟁’ 위에 건립되었다.
마오쩌둥 스스로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말한 적이 있다. “진시황이 다 무엇인가? 그는 460여 명의 유생을 생매장했지만 우리는 4만6천여 명의 유생을 생매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보고 독재정치이며 진시황과 같다고 욕하는데 우리는 모두 인정한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당신들이 말한 것이 아직 충분치 않으므로 우리가 더 보충해야 할 것 같다.”(『동방문화』, 2000년 제4기 첸보청(錢伯誠)의 글에서 인용.)
우리는 여기에서 중국이 공산당 통치 하에서 어렵게 걸어온 55년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한 후, 어떻게 정부 기구를 이용하여 계급투쟁 이론으로 계급 학살을 실시하고, 폭력혁명 이론으로 공포통치를 실시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 공산당은 ‘살인’과 ‘주심(誅心
토지개혁-지주계급을 제거
건국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공산당은 중국 전역에서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구호를 내걸고 토지가 없는 농민들을 선동하여 지주들에 대해 투쟁하도록 했다. 또한 인간성 중의 이기적인 면을 방임하여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도록 고무하고 격려하였으며 도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동시에 토지개혁 전체 노선 중에서 ‘지주계급을 제거’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또 농촌에서 광범위하게 계급을 구별하고 성분을 확정하며 전국적으로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지주『地』, 부농『富』, 반혁명『反』, 나쁜 사람『壞』’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그들은 중국 사회에서 멸시와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공민(公民)의 권리가 없는 ‘천민(賤民)’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토지개혁이 변경 지구와 소수민족에까지 깊이 침투됨에 따라 공산당 조직도 신속히 확대되어, 향(鄕)에는 당 위원회가 있고 촌(村)에는 당 지부가 있는 정도까지 발전하였다. 당 지부(支部)는 당의 지령을 상명하달(上命下達)하는 공산당 최일선 조직으로, 종종 계급투쟁 제1선에 뛰어들어 농민들을 선동하여 지주와 투쟁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 10만 명에 달하는 지주들이 생명을 잃었다. 더욱이 어떤 지역에서는 지주뿐만 아니라 그 일가족을 몰살시켰는데 심지어 부녀자와 아이들마저도 불행을 면치 못했다.
이 시기에 공산당은 전국 농촌에서 “마오 주석은 인민을 구원한 큰 별『大救星』이며 오로지 공산당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선전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혜택을 입었으며 또 적지 않은 빈농(貧農)들은 공산당에 대해 감지덕지 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인민을 위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로 말하자면,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좋은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토지를 분배한 지 2년도 채 안 되어 공산당은 호조조(互助組
1978년 개혁(改革)을 시작한 연대에 와서야 전국은 소강(小康
상공업 개조-자본가계급 제거
또 하나의 소멸해야 할 계급은 도시와 농촌의 민족자본가계급이었다. 상공업 개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이렇게 말했다.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은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 즉 하나는 착취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비착취 및 반착취 계급이다. 자본가계급의 착취는 타고난 것이라 죽음에 이르러서야 멈추기 때문에 제거할 수 밖에 없으며 개조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자본가 및 상인에 대한 개조는 그 강도가 더욱 심해서 ‘살인’과 ‘세뇌’를 병용하였다. 원칙은 여전히 순종하면 살려주되 반항하면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만약 재산을 바치고 아울러 공산당을 옹호한다고 표시하면 이것은 인민내부의 모순
토지 개혁과 상공업을 개조하는 동시에 공산당은 진반(鎭反), 사상개조, 가오강(高崗)과 라오수스(饒漱石) 반동집단 타도, 후펑(胡風
이 모든 운동에서 공산당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정부기구와 당 위원회, 당 총지부, 당 지부를 모두 동원하고 공산당원이 세 사람만 되면 하나의 전투 보루를 만들어 농촌과 도심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이리하여 공산당은 없는 곳이 없고 관계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항일전쟁 시기부터 계속해 온 당 지부 건설과 이를 통한 네트워크식 통제구조는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정치운동에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민을 탄압하는데 줄곧 관건적인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회도문(會道門) 단속 및 종교탄압
공산당 정권이 건립된 초기에 발생한 또 하나의 사건은 종교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과 회도문 단속이다. 1950년, 공산당은 각 지방 정부에 지시를 내려 전면적으로 회(會) 도(道) 문(門), 즉 지방의 종교 및 방회(幇會) 조직을 단속하도록 했다. 당이 내려 보낸 문서에서는 봉건 회도문 조직이 국민당 특무 및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들이 조종하는 도구라고 지적했다. 전국의 향진(鄕鎭)까지 파급된 이 운동 중에서 정부는 공산당이 믿을 만하다고 인정하는 계급을 동원하여 회도문 구성원들을 적발하고 공격하였다. 각급 정부는 모든 ‘미신’ 조직, 예컨데 기독교, 천주교, 도교『특히 일관도(一貫道)』, 불교 등 조직을 해체시키는데 참여하였다. 또 이런 교회, 불당(佛堂), 방파의 구성원들에게는 정부에 가서 등록하고 잘못을 뉘우칠 것이며 새 출발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만약 등록하지 않고 나중에 조사해서 적발되면 엄벌에 처한다고 하였다. 1951년 공산당 정부는 회도문 활동을 계속하는 자는 사형 혹은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명문(明文)으로 발표했다.
이 운동에서 공산당은 신(神)을 믿고 선(善)을 추구하며, 법을 준수하고 규율을 지키는 광대한 일반 백성들을 공격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당시 탄압받은 기독교 신도만 백만 명이 된다고 한다. 당시 총 300만에 이르는 신도 및 회도문 구성원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큰 도시로부터 향촌(鄕村)에 이르기까지 거의 집집마다 상세한 조사를 받았으며 심지어 농민들이 모시는 부엌신인 조왕신마저도 파괴하였다. 사람을 죽이는 동시에 오로지 공산당 사상체계만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사상체계이며, 오로지 공산주의만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주입시켰다.
이때로부터 이른바 ‘애국(愛國
2만여 명의 기독교 신도들이 중국 22개 성(省) 207개 도시의 56만 명에 달하는 가정교회 신도들을 찾아다니면서 방문 조사한 결과, 가정교회 신자들 중 13만 명이 감시 받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957년 전까지만 해도 1만천2백50여 명이 넘는 신도들이 공산당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많은 신도들을 임의로 체포하거나 강제로 벌금을 부과했다고 한다.(인터넷 잡지 『Humanity and Human Rights』2002년 2월호에 실린 보고서에서)
여기에 이르러 공산당은 중국에서 지주계급, 자본가계급을 소멸시키고, 도시와 향촌의 신령(神靈)을 공경하고 법을 준수하는 수많은 인민들을 탄압하여 공산당 일교(一敎)가 천하를 통치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반우파 운동-전국적인 세뇌
1956년, 일군의 헝가리 지식인들이 페토피(Petofi) 서클을 조직했다. 여기에 소련이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탄압한 것을 헝가리 사건이라고 한다. 마오쩌둥은 이것을 교훈으로 삼았다. 1957년 중국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당시에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격려하는 몇 마디 말이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백화제방 백가쟁명에서 발언한 것을 이용하여) 약점을 잡지 않고, 공격하지 않으며, 누명을 씌우지 않고, 마지막에 누가 옳고 그른지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반 우파 투쟁에서 55만 명을 ‘우파분자’로 확정지었으며 27만 명이 공직을 잃었다. 23만 명이 ‘중도 우파분자’와 ‘반당(反黨), 반사회주의자’로 분류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공산당이 사람을 괴롭히는 권모술수를 4가지로 정리해 냈다.
1. 뱀을 유인하여 굴속에서 나오게 하기.
2. 죄명을 꾸며 갑자기 습격하고는 한마디로 단죄하기.
3. 병을 고쳐 사람을 구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4. 자아비판을 강요한 후에 이것을 빌미로 끝없이 확대하여 비판하기.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우파분자와 반당분자들을 근 30년간이나, 춥고 험한 변경지대로 유배시킨 이른바 ‘반동언론’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당시 모든 비난의 화살을 받고, 집중 비판대상이 되었던 우파분자의 ‘3대(大) 반동이론’은 뤄룽지(羅隆基), 장보쥔(章伯鈞), 추안핑(儲安平)의 몇 차례 강연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들의 의견과 건의를 간단히 말한다면
1. 공산당과 민주당파가 공동으로 하나의 위원회를 건립하여 3반(三反), 5반(五反), 숙반 사업 중의 잘못을 검사하자.(뤄룽지)
2. 국무원에서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정치협상회의나 인민대표대회 등 민의 수렴 기구의 입장을 정책에 반영해 줄 것을 건의.(장보쥔)
3. 공산당 외부 인사도 자신의 견해가 있고 자존심이 있으며 나라에 대한 책임감이 있으니 이들을 활용하자.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단위를 막론하고, 심지어 매 과(科)나 소조마다 당원을 배치하여 책임자로 삼으니,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모두 당원의 눈치만 본다.(추안핑)
이들 몇 사람은 모두 공산당을 따르는데 동의한다고 분명히 표시했으며, 그 의견이란 것도 루쉰(魯迅
‘우파’로 구분된 사람 중에, 공산당을 전복시키자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비평과 건의를 한 것에 불과했다. 바로 이런 비평과 건의 때문에 수십만 명이 인신의 자유를 잃었으며 그들의 가족에게 고난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등장한 것이 또 ‘당에 마음을 바쳐’ 백기(白旗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후, 일부 학자들은 담장 위의 풀처럼 바람 부는 대로 휩쓸리는 이중인격자가 되었다. 그들은 ‘붉은 태양’을 바짝 따르며 남의 장단에 춤추는 공산당의 ‘어용 지식인’이 되어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다른 일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청고(淸高)함을 유지하면서 정책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원래 천하를 자신의 소임으로 삼던 중국의 지식인들도 더 이상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약진(大躍進)-지록위마(指鹿爲馬)로 충성심을 시험
반(反)우파 투쟁 이후, 중국은 진실을 두려워하는 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거짓말을 듣고 거짓말을 하며 거짓 일을 하고 유언비어와 허위 행위를 통해 진실에서 도피하고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이 세태가 되었다. 대약진이란 바로 전 중국이 집단적으로 거짓말을 만들어 낸 것을 말한다. 전국 인민들은 공산당이란 사악한 영(靈)의 인도 하에, 믿을 수 없고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일들을 조작해냈다. 거짓말을 하는 자와 기만을 당하는 자 모두 스스로를 속였다.
거짓과 어리석음이 판치는 한 바탕 투쟁극(鬪爭劇) 속에서, 공산당은 자신의 포악하고 사악한 기운을 중국 인민들의 정신 속에 강제로 주입하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곧 옥황상제요, 나는 곧 용왕이다. 삼산오악(三山五岳)에 명령하노니 내가 왔으니 길을 열라고 하거라.(역주:링크)”라는 약진 가요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무(畝)
1959년 루산(盧山)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 중 그 누가 펑더화이(彭德懷
인류 사회는 늘 이미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체계를 넓혀왔다. 하지만 공산당은 사람들에게 전체 사회의 경험과 교훈에 대해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관영 매체에 의한 뉴스 봉쇄로 인해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다음 세대는 이전의 ‘운동’ 중에서 지식인들이 가졌던 이념과 이상(理想), 그리고 경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오직 일부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역사를 이해하고 새로운 현상을 판단한다. 그러므로 스스로는 정확하며 오류가 없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커다란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공산당의 우민(愚民) 정책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문화대혁명`-`사악한 영(靈)의 부체가 세상을 전복
문화대혁명은 공산당이라는 사악한 영(靈)의 부체가 전 중국을 뒤흔든 사건이다. 1966년 중화대지는 또 한 차례 폭정의 세찬 조류에 휩쓸렸다. 적색 테러의 광풍은 마치 미쳐 날뛰는 요괴와 같았으며 고삐 풀린 야생마와도 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작가 친무(秦牧)는 일찍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전례 없었던 한 차례 큰 재난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고생을 겪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죽었으며, 얼마나 많은 가정이 사분오열(四分五裂) 되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불량배가 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서적이 불태워졌고, 얼마나 많은 명승고적이 파괴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선현(先賢)들의 무덤이 파헤쳐졌는가? 또 혁명이라는 허울을 쓰고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는가?”
전문가들의 보수적인 추정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문화대혁명 기간비정상적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773만 명에 달한다.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의 폭력과 학살에 대하여 종종 일종의 착각을 하는데, 이 대부분이 모두 반란 운동으로 야기된 무정부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살인자 역시 모두 ‘홍위병’이고 ‘혁명파’들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출판된 수천 권의 현지(縣志)가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문화대혁명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홍위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중앙의 각급 정부가 마비되었던 1966년말이 아니며, 혁명파들의 무력투쟁이 가장 성행했던 1967년도 아니다. 오히려 ‘각급 혁명위원회’가 설립되고 마오쩌둥이 국가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회복한 1968년이었다. 전국의 유명한 대학살 중에 무자비한 폭력으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진행한 주범들은 대부분 군인과 무장 민병(民兵), 그리고 각급 당원 및 공산당 핵심 간부들이었다.
다음 몇 가지 예로부터 우리는 폭행이 홍위병 혁명파의 일시적인 과격 행위가 아니라 공산당과 지방 정권이 사전 모의한 정책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지도자와 각급 권력기구가 폭정에 참여하여 직접 지휘한 이런 사실들은 지금까지 은폐되어 왔다.
1966년 8월 홍위병은 ‘송환’이라는 미명하에 과거 여러 차례 운동 중에서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 우파 등으로 처리되었던 베이징 시민을 강제로 베이징에서 쫓아내 농촌으로 압송했다. 당국의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당시 33,695가구의 베이징 시민들이 집과 재산을 몰수당했고, 85,196명이 도시에서 쫓겨나 원래 호적지로 송환되었다. 이 바람은 아주 빠르게 전국 각 대도시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40만 명에 달하는 도시 주민들이 송환되어 농촌으로 내려갔다. 지주 출신의 공산당 고급 간부들의 부모조차도 이 대오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이런 송환은 중국 공산당이 문화대혁명 이전에 이미 계획한 것이다. 펑전(彭眞)이 베이징 시장을 맡았을 때, 베이징 시민들의 성분을 ‘유리’나 ‘수정’처럼 순정(純淨)하게 하려면, 즉시 성분이 나쁜 시민들을 모두 베이징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66년 9월 마오쩌둥은 “수도를 보위(保衛)해야 한다”는 지시를 발표하고 예젠잉(葉劍英), 양청우(楊成武)와 셰푸즈(謝富治)를 두목으로 하는 공작조를 설립했다. 이 공작조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공안국(公安局)을 통해 이른바 ‘성분이 좋지 않은’ 시민들을 대규모로 송환시키는 것이었다. 이로 볼 때 홍위병들이 2%의 베이징 시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송환시킨 사건이 왜 정부의 제지를 받지 않고 오히려 공안국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공안국 국장 셰푸즈는 일찍이 공안 간부 경찰들에게 홍위병을 제지하지 말고 홍위병을 위한 ‘참모’가 돼야 하며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홍위병들은 당국에 의해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 1966년 말에 이르러서는 홍위병들 또한 공산당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동(聯動)분자’ 로 몰려 감옥에 갔다. 하지만 송환 활동을 주재한 홍위병 조직은 공산당 지도자의 ‘직접적인 관심’ 하에 성립되었고 그들의 훈령 역시 당시 국무원 비서장이 수정한 후에 발표한 것이었다.
수도인 베이징에서 지주와 부농들을 농촌으로 송환한 데 이어, 농촌에서도 지주, 부농들에 대한 박해 운동을 일으켰다. 1968년 8월 26일, 베이징시에 소속되어 있는 다싱(大興)현 공안국 회의에 공안부장 셰푸즈의 연설이 전달되었다. 그 요점 중의 하나는 바로 공안 간부 경찰들은 홍위병의 참모가 되어 검은 5부류(黑五類, 지주, 부농, 반혁명, 불순분자, 우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홍위병들이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협조하라는 것이었다.
즉, 다싱현 학살운동
문화대혁명 중에는 ‘사람을 구타’하는 것도 계급 분석을 해야 했다.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을 때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을 때리는 것은 영광이며,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때리는 것은 오해이다.” 마오쩌둥의 이 말은 당시 제멋대로 반란운동을 하는 중에 널리 퍼졌다. 계급의 적들에 대한 폭력은 모두 ‘당연하다’고 규정했는데, 폭력뿐 아니라 살육까지도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 까지 후난성(湖南省) 다오현(道縣) 인민 무장부 말단 민병들이 ‘상강풍뢰(湘江風雷)’의 조직원과 검은 5부류를 도살했다. 66일 동안 10개 구역 36개 공사(公社), 468개 대대(大隊), 2778가구에서 총 4,519명이 연루되었다. 그 중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이 38%를 차지했고, 지주와 부농의 자녀가 44%였다. 살해당한 사람 중에서 연령이 제일 많은 사람은 78세였고 가장 어린 경우는 생후 10일 밖에 안 된 아기였다. 이것은 다만 특정지역에서 문화대혁명 중에 발생한 한 가지 사건에 불과하다.
1968년 초, ‘혁명위원회’ 가 설립된 후, 계급 대오(隊伍)를 조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네이멍구(內蒙古)에서는 ‘내인당(內人黨)’을 조사하면서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한 유혈사건을 만들어냈다. 1968년 광시(廣西)에서는 4.22 군중 단체에 대한 무장 대학살에 수만 명이 참가했으며, 당시 사망한 사람이 11만 명에 이른다.
이런 사실로 알 수 있듯이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일어난 주요 폭력, 학살사건과 대형사건은 모두 국가기구의 행위였으며 공산당 지도자들의 용인(容認)하에 백성을 박해하고 학살한 것이다. 이런 학살을 직접 지휘하고 집행한 주범들은 대개 군대, 경찰, 무장 민병과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만약 토지개혁이 노동자를 위해 자본가를 타도한 것이고, 반 우파 투쟁은 지식인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것이었다면, 문화대혁명과 같은 무차별적인 투쟁은 결코 그 어느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설령 공산당이 의지하는 노동자나 농민이라 할지라도 당과 관점이 일치하지 않으면 곧바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은 바로 공산당 단독으로 천하를 통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단 국가를 통치할 뿐만 아니라 매 개인의 사상도 통치하였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과 마오쩌둥을 ‘신(神)으로 만드는’ 운동의 절정이었다. 마오쩌둥의 이론으로 모든 것을 독재하며 한 사람의 이상(理想)을 억 만인들의 머릿속에 스며들도록 해야만 했다. 특이한 것은 문화대혁명 때에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없다는 규정은 없고 도리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가서 해야 하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없으며 생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 인민들은 마치 종교 숭배처럼 “아침에 교시를 물어보고 저녁에 보고하는”형식을 행해야 했다. 매일 여러 차례 마오쩌둥 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으며 아침, 저녁 두 차례 정치 기도를 했다. 글자를 아는 사람들은 자아비평과 사상보고를 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때 사용하는 말도 반드시 마오쩌둥 어록에 근거한 것만 가능했다. 가령 “이기적인 일념에 맞서 단호하게 싸워야 한다.”거나 “이해해도 집행하고 이해하지 못해도 역시 집행해야 하며 집행 중 깊이 이해해야 한다.” 등이다.
문화대혁명 중에는 오직 하나의 ‘신(神)’만을 숭배해야 했고 오직 하나의 ‘경(經)’만 읽어야 했으니 바로 마오쩌둥 주석의 어록이었다. 어록을 암송하지 못하거나 축원하지 않으면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물건을 사거나 차를 타거나 전화를 걸 때에도 아무 관계가 없는 어록 하나를 외워야 했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할 때에 열광적으로 흥분하거나 혹은 감각이 무뎌졌는데, 이미 완전히 공산당이란 사악한 영(靈)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거짓말을 조작하고 거짓말을 받아들이며 거짓말에 의존하는 것은 이미 중국인민의 생활 방식이 되어버렸다.
개혁(改革)·개방(開放)`-`계속되는 폭정
문화대혁명은 선혈이 낭자하고 원혼이 도처에 떠돌며 양심을 저버리고 시비(是非)가 뒤집어진 시대였다. 문화대혁명 이후, 성루의 깃발이 바뀌듯 공산당과 공산당 지도 하의 정권은 이십여 년 사이에 6대(代)의 지도자를 바꿨다. 사유재산제도가 다시 부활되었으며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커졌다. 사막이 급증하고 강물이 말라들었으며 마약 판매와 매음(賣淫)이 급증하였다. 일찍이 중국 공산당이 소멸시키려고 했던 ‘죄악’들이 공산당에 의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공산당의 잔혹성과 악독함, 그리고 기괴함과 사회를 혼란시키는 수법은 줄기는 커녕 더 늘어만 갔다. 6.4때는 탱크로 천안문(天安門) 광장의 학생들을 깔아 뭉갰으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한 잔혹한 박해는 말로 표현할 할 수 없을 정도이다.
2004년 10월 산시성(陝西省) 유린시(楡林市) 시정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를 징발하기 위해 1600명의 전투경찰을 동원하여 50여명의 농민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체포하였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중국의 정치는 여전히 공산당의 투쟁철학과 폭력 숭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보다 더 기만적이라는 점이다.
법률
공산당 정권이 끊임없이 인위적인 투쟁을 조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반혁명분자, 반사회주의 분자, 불순분자와 사이비 종교 신자라는 누명을 씌워 공산당 독재집단과 각 민족 인민 단체 사이에는 첨예한 충돌이 자주 발생하였다. 공산당은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를 안정시킨다.” 는 명분으로 ‘법률’과 ‘조례’ 및 ‘명령’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인민들의 불만 행위를 반혁명적인 행위로 간주하여 탄압하였다. 장쩌민은1999년 7월 공산당 정치국 구성원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려 3개월 내에 파룬궁(法輪功)을 소멸시키려 하였다. 이리하여 한때, 유언비어가 하늘을 뒤덮을 듯 전국을 휩쓸었다.
장쩌민이 프랑스 한 매체(라 피가로(La Figaro) 신문)와의 인터뷰에서 파룬궁은 ‘사이비 종교『邪敎』’라고 말하자 관영매체에서는 서둘러 문장을 발표하여 전국 각계에 압력을 가했으며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위협하여 전혀 타당하지 않은 이른바 『결정』을 내리게 하여 사이비 종교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뒤이어 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에서는 인민대표대회의 『결정』에 대한 『해석』을 발표하였다. 1999년 7월 22일 신화사에서는 중공 중앙 조직부 책임자, 중공 중앙 선전부 책임자의 연설을 발표하여 공개적으로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를 지지하였다. 이렇게 하여 광범위한 인민 대중들을 이번 박해에 끌어들였다. 이미 ‘당 중앙’에서 그 성질을 규정하였으므로 그들은 옹호하고 집행만 할 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최근 5년 사이에 국가 기관에서는 전체 국가 예산의 4분의 1을 투입하여 파룬궁을 탄압하였다. 중국 인민들은 사람마다 모두 시험을 거쳐야 했는데 무릇 파룬궁을 수련한다고 인정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직에서 해직시키고 감금시켜 노동개조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나라를 배반하고 정부를 반대한 것도 아니며 오직 진선인(眞善忍)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천수만 명이 감금되었다. 비록 공산당이 소식을 겹겹이 봉쇄하였지만 친족들을 통해 조사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현재까지 살해된 것으로 확인된 사람만 천 오백여 명
뉴스
홍콩 『문회보(文滙報)』는 2004년 10월 15일 중국의 제20번째 과학실험위성이 지구로 돌아올 때 쓰촨성(四川省) 다잉현(大英縣) 펑라이진(蓬萊鎭)의 훠지위(튦積玉)씨의 집을 덮쳤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는 다잉현 현정부 주임 아이위칭(艾裕慶)의 말을 인용하여 이 ‘검은 덩어리’는 확실히 되돌아 온 과학실험 위성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사실 아이위칭은 위성 회수 현장의 부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화사에서 운영하는 신화망은 위성이 돌아온 시간만을 발표하면서 이것은 중국에서 회수한 제20번 째 과학기술 실험위성이라는 것만 강조했을 뿐, 위성이 민가(民家)를 덮친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처럼, 좋은 소식은 알리되 나쁜 소식은 보도하지 않는 수법은 언론 매체들이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사용해온 일관된 보도자세이다. 여러 차례 운동 중에서 신문과 텔레비전은 옆에서 부추기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공산당의 방침과 정책이 실시될 수 있도록 도왔다.
공산당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전국 매체에서는 즉시 이를 집행한다. 당에서 우파를 반대하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우파의 죄악을 보도했고, 당에서 인민공사를 세우려고 하면 전국에서 한결같이 인민공사의 우월성을 찬미했다. 파룬궁 탄압 운동이 시작된 첫 달에 언론매체들은 매일 황금시간 대에 반복적으로 전국 인민들을 세뇌(洗腦)시켰다. 이때부터 장쩌민은 모든 대중 매체에 인민들로 하여금 파룬궁을 증오하게 하는 이른바 ‘분신자살사건’, ‘살인사건’ 등의 거짓 뉴스와 거짓 사건들을 날조하게 하였다. 그 중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은 중국 정부가 사건을 사전에 조작하여 민중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UN교육발전기구의 지탄을 받았다. 지난 5년 동안 중국 국내의 어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도 파룬궁의 진실한 상황을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이제 뉴스에서 거짓을 보도해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필자가 접촉한 신화사의 한 베테랑 기자조차도 “신화사의 보도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민간에서는 심지어 중국 언론기구는 공산당의 앞잡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
교육
교육은 인민들을 통치하는 또 다른 족쇄이다. 교육은 본래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지식(知識)은 ‘지(知)’와 ‘식(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知)’란, 정보, 자료, 전통문화와 시사에 대한 이해를 가리키며 ‘식(識)’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분석, 연구, 비판, 재창조하는 것으로, 즉 정신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지(知)만 있고 식(識)이 없으면 책벌레에 불과할 뿐 사회의 양심적인 지식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왜 역대로 ‘지(知)를 가진 사람(有知之士)’이 아닌 ‘식(識)을 지닌 사람(有識之士)’를 숭상했는가 하는 이유이다. 공산당 통치 하에서 중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지(知)만 있고 식(識)이 없는 사람들과 지(知)만 있고 감히 식(識)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학생들에게 공산당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몇 년 동안, 학교에서는 정치과목과 당사(黨史)를 설치하였고 통일된 교재를 사용하였다. 교사들은 교과서의 일부 내용을 믿지 않지만 ‘규율’에 강요되어 양심을 어기고 거짓말을 한다. 학생들도 교과서와 교사들의 강의를 믿지는 않지만 기계적으로 외워 시험에 응할 수밖에 없다. 중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기말시험과 입학시험 문제 중에 파룬궁을 비판하는 문제가 나타났는데 표준 답안을 외우지 못한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만약 아이들이 진실을 말하기만 하면 바로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진학자격을 박탈당한다.
민중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신문과 각종 문서들이 악영향을 많이 미쳤다. 사람마다 귀에 익어 줄줄 외울 수 있는 말들, 예를 들면 “무릇 적들이 반대하는 것이면 우리는 옹호하고, 무릇 적들이 옹호하는 것이면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어록을 ‘진리’로 삼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기에 동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선(善)을 향한 마음과 화목을 중히 여기는 윤리 도덕을 대체하였다.
2004년 중국정보센터에서 대륙 신랑망(新浪網)에서 조사한 자료를 통계, 분석한 데 의하면 82.6%의 중국청년들이 전쟁 중에 여성, 아동 및 전쟁 포로를 학대하는데 찬성하였다고 한다. 이런 결과는 매우 의외이긴 하지만, 중국 민중들의 현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특히 청년 세대는 전통 문화 중 어진 정치(仁政), 인성(人性)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2004년 9월 11일 쑤저우(蘇州)에서는 한 미친 남자가 칼로 28명의 어린이를 살해했으며, 9월 20일 산둥(山東)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는 한 남자가 휘두른 칼에 25명이 희생되었다. 또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수입’을 늘리기 위해 교사들이 학생들을 강요하여 수공(手工)으로 폭죽을 제작하다가 폭발 사고를 일으킨 경우도 있었다.
정책 집행과 관철
공산당의 지도하에 집행하는 정책은 늘 강요하고 위협하는 수단을 사용한다. 정치 표어는 바로 이런 수단의 일종이다. 오랫동안 공산당의 정책은 표어를 붙인 수량을 성적을 가늠하는 표준의 하나로 삼았다. 문화혁명 기간에 베이징은 하룻밤 사이에 표어가 가득 나붙은 ‘붉은 바다’로 변해 버렸는데 ‘당내에서 자본주의 길을 가는 집권파를 타도하자.’는 표어가 도처에 나붙었다. 농촌에서는 간략하게 ‘집권파를 타도하자’라고 썼다.
근래에『삼림법(森林法)』을 선전하기 위해 임업국의 각 임업사업소, 삼림보호 사무실에서는 반드시 표어를 충분히 붙여야 한다는 강제 지표를 하달하여 숫자가 부족하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말단 정부 부문에서는 대량의 표어를 붙였는데 예를 들면 “산불을 내면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등이다.
최근 중국의 가족계획운동 중에는 더욱 사람을 놀라게 하는 표어들이 나왔다. “한 사람이 더 태어나면 온 마을이 피폐해진다.” “무덤 하나를 보탤지언정 사람을 더 보태지는 않는다.”, “불임수술을 해야 할 사람이 하지 않으면 집을 부숴버리고 유산해야할 사람이 하지 않으면 밭을 회수하고 소를 끌어간다.”는 등이다. 더 심한 것은 인권과 법률을 위반한 표어들도 있다. 예를 들면 “오늘 세금을 내지 않으면 내일은 감옥에서 자야 한다.”는 것도 있다.
표어란 본래 일종의 전파수단으로서, 직관성과 반복성을 갖고 있다. 중국정부는 이를 이용하여 정치 동향 및 정부 의지를 표시하거나 호소한다. 정치 표어는 또 정부가 인민들에게 하는 연설로도 볼 수 있는데, 그 속에서 그들의 폭력 성향과 피비린내 나는 잔인함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국적인 세뇌와 연금(軟禁)
중국 공산당의 가장 잔혹한 폭정 통치 도구는 네트워크식 통제이다. 공산당은 매 사람들에게 조직의 형식으로 냉소주의를 가했다. 그것은 앞뒤 모순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것인데 바로 조직의 형식으로 개인의 인권(人權)을 박탈하는 것이다. 정부가 통치하는 촉수는 없는 곳이 없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인민은 모두 가도(街道)위원회 혹은 향(鄕)위원회에서 관리한다. 결혼, 이혼, 출산은 모두 그들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당의 의식형태, 사상체계, 조직방식, 사회구조, 선전 매커니즘, 조직체계는 모두 이러한 강권통치를 위하여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당은 정부 체계를 통해 매 개인의 생각과 매 개인의 행동을 통제한다.
공산당 통제의 잔혹성은 다만 육체적인 시달림 뿐만이 아니며,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변화시키거나, 혹은 독립적인 견해가 있어도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고 겁쟁이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의 통치 목적은 사람마다 세뇌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공산당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공산당이 말하는 것을 말하게 하며, 공산당이 주장하는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산당 정책은 달과 같아서 수시로 변한다.”라고 한다. 그러나 공산당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전국 인민들은 모두 공산당을 바짝 따라야 한다. 공산당이 당신에게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역할을 맡길 때 당신은 공산당이 ‘인정해 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하고, 당신이 공격을 받을 때는 공산당이 ‘교육시켜 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한다. 공산당이 당신을 공격한 것이 잘못임을 알고 당신에게 명예회복을 시켜줄 때도 또한 공산당의 ‘넓은 도량과 잘못을 알고 고칠 줄 아는 것’에 감사드려야 한다. 공산당의 폭정은 바로 끊임없이 공격하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중에서 시행되고 있다.
55년의 포학한 통치를 통해 중국 인민들의 사상은 이미 연금(軟禁)되어 공산당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 자신을 속박해 놓았다. 테두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곧 죄가 된다. 반복적인 투쟁을 통하여 우매(愚昧)함은 지혜로 찬양받았고 나약함은 이미 생존방식으로 되었다. 인터넷이 정보교류의 주요한 전파수단으로 된 현대 정보사회에서, 인민들이 인터넷에 접속할 때조차 자신을 단속해야 하며, 외부 소식을 보지 말아야 하고, ‘인권’이나 ‘민주’ 글자가 있는 웹사이트도 보지 말아야 한다.
공산당의 세뇌 운동은 이처럼 황당하고, 잔인하며, 이처럼 비열하고 또한 없는 곳이 없다. 그것은 중국 사회의 가치관과 윤리 도덕을 변화시켰으며, 중화민족의 행동양식과 생활방식을 철저하게 뜯어 고쳤다. 아울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심한 손상을 입혀 공산당 일당 독재의 절대적인 권위를 더욱 공고하게 하였다.
결론
이상 말한 것을 종합해 보자. 공산당은 무엇 때문에 달마다 투쟁하고 날마다 투쟁하며 생명이 멈출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는가?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살인을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으며, 생태환경을 파괴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중국 대부분의 농민 및 도시 주민들이 장기간 빈곤한 상태에 처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가?
이것은 공산주의의 이상(理想)을 위해서인가? 아니다. 공산주의의 원칙 중 하나는 일체 사유재산제도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제도는 일체 죄악의 근원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정권을 빼앗은 초기에 역시 전면적으로 사유재산제도를 없애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래, 사유재산제도는 이미 중국에서 부활되었으며 『헌법』에도 사유재산을 보호한다고 규정하였다. 공산당의 40년 통치는 ‘재산 재분배’란 희극을 연출하여 몇 개의 윤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다른 사람의 자산(資産)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은 것에 불과하다.
공산당의 다른 원칙 중 하나는 공산당이 ‘노동자계급의 선봉대’이며, 그 임무가 자본가계급을 소멸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공산당의 당장(黨章) 중, 이미 자본가도 입당할 수 있다고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공산당 내부에도 이미 더 이상 공산당과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이 없다.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도 조리가 서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공산당은 현재 껍데기만 남았으며 이미 본질은 사라지고 없다.
그렇다면 이런 장기적인 투쟁은 공산당 집단의 청렴과 순결함을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공산당이 55년 집권한 이래 현재 전국 공산당 간부들은 횡령하고 뇌물 받고, 법을 지키지 않으며 함부로 행하고,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해치는 일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약 2천만 명의 당과 정부 관원 중 최근 몇 년 동안의 조사결과, 이미 8백만 명이 부패범죄로 인해 처벌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아직 조사받지 않은 부패관리를 고발하기 위해 청원하는 사람의 숫자가 매년 백만 명에 달한다. 2004년 1월에서 9월까지만 해도 중국 국가외화관리국은 35개 은행과 41개 기업에서 규정을 어기며 무역결재업무를 처리한 것에 대해 조사했는데, 그 금액이 무려 1억2천만 달러에 달했다. 통계에 의하면 최근 몇 년간, 돈을 가지고 몰래 달아난 당과 정부 간부가 수두룩한데 나라의 공금을 유용한 것이 많게는 수억 달러에 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투쟁은 인민의 소질과 각오(覺悟)를 드높이어 사람들에게 국가 대사에 관심을 갖게 하려는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오늘의 중국은 물욕(物慾)이 넘쳐나고, 인심이 옛날 같지 않으며, 부모를 속이고 친구를 살해하며 임기응변에만 능하다. 많은 중국인들은 원칙적인 문제에 대해 몰라서 말하지 않거나, 알아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에서 무사히 생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이와 동시에 민족주의 정서는 여러 차례 근거 없는 헛소문에 의해 선동을 받는다. 중국 정부는 인민들을 조직하여 중국 주재 미국대사관에 찾아가 돌을 던지고 불을 질러 미국 국기를 불태우게 할 수도 있다. 중국 인민들은 ‘순종하는 백성『順民』’ 또는 ‘난폭한 백성『暴民』’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있어도 ‘인권이 보장되는 공민『公民』’은 되지 못한다. 문화적인 소양은 소질을 높이는 근본이다. 중국은 수천 년 동안 공맹(孔孟)의 도리로 사람들에게 예의의 기강(紀綱)을 확립하였다. “만약 이 모든 것을 없앤다면 사람들은 따를 법이 없게 되고 옳고 그름도 가리지 못하며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이것은 도(道)가 크게 어지럽게 된 것이다.”(역주:링크)
결국 공산당의 투쟁철학은 큰 난을 만드는 것으로, 끊임없이 동란(動亂)을 만들어서 ‘일당 천하’의 교주(敎主)지위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다. 즉, 공산당 유일사상으로 전국 인민을 통치하는 것인데, 정부 기구, 군대, 신문, 방송국은 모두 공산당이 폭정(暴政)을 실시하는 도구이다. 공산당이 중국에 가져다준 위해(危害)는 이미 병이 고황(膏肓)에 들어가 치료할 수 없는 상태로 되었다. 공산당은 이미 멸망의 변두리에 처해 있으며, 그것의 해체는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해체되면 천하에 큰 난리가 날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누가 공산당을 대체하여 중국을 통치할 수 있겠는지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5천 년의 기나긴 중국 역사 중에서 공산당의 55년 통치는 흘러가는 구름에 불과하며, 이 짧은 55년 중에 전통적인 신앙과 가치관이 공산당의 강압에 의해 파괴되었다. 고유의 윤리 관념과 사회체계는 강제적으로 해체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 및 화목은 투쟁과 원한으로 왜곡되었다. 천지자연에 대한 경외(敬畏)와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인간의 힘이 자연을 이긴다.”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가져다 준 사회 도덕체계와 생태계의 전면적인 붕괴는 전체 중화민족을 매우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하였다.
중국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중국 역대의 어진 정치가들은 모두 ‘백성을 사랑하며(愛民)’,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富民)’, ‘백성을 가르치는(敎民)’ 것을 정부의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사람은 누구나 선(善)을 지향하는 본능이 있으며 정부는 인민을 도와 이런 본능을 실현시킬 책임이 있다. 맹자(孟子)는 “백성의 도(道)를 말하자면, 고정적인 재산(恒産)이 있는 사람은 항심(恒心)이 있고, 고정적인 재산이 없는 사람은 항심(恒心)이 없다.(역주:링크
상하 5천 년의 기나긴 중국 역사 중에는 어진 정치를 실시한 사람이 드물지 않았다. 고대에는 요순(堯舜)이 있었고, 주(周)나라에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있었으며, 한나라에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있었고, 당나라에는 정관(貞觀
어진 정치의 특징은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고, 누구나 말할 수 있게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주며, 의리를 지키고 화목을 구하며 백성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데 있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능히 예의를 따르고 법을 준수하며 평안하고 조용히 살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다.
천하의 세력을 가늠해 본다면, 흥망성쇠는 그 누가 결정하며, 번성과 쇠퇴에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공산당이 사라지면 세상은 상서롭고 온화한 분위기를 되찾아 백성들은 진실하고, 선량하며, 겸손하고, 참고 양보하게 되리라. 그렇게 되면 국가는 순조롭게 백성들의 일상사를 돌보게 될 것이며 모든 사업이 번창할 것이다.
‘9평 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의 본질을 9가지로 나눠 평론한 대기원시보의 사설입니다.
대기원시보는 인성, 인권, 자유를 지향하는 국제적인 신문그룹으로서(29개국 41개 가맹사), 동양의 정통정신문화를 발양하여 서구물질문명의 폐해와 반인류적인 인권문제를 개선하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대기원시보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류문명을 선도해 온 찬란한 정신문화를 핍박하고 그 정통성을 멸절하려는 중국공산당의 본질과 지난 80여 년간 주기적으로 자행한 인권말살의 실상을 폭로하고자 합니다. 이는 인류의 안녕을 위협하는 삿된 독소를 제거하고 문화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대기원시보의 기본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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