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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장 수정 완료하여 다시 게시합니다
본문 : 창세기41장1~57절
주제 : 해석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이 대답하실 것입니다.
요해 : 꿈도 하나님의 섭리에 들어가기 때문에(민12:6 왕상3:5 렘23:28 욜2:28 마1:20; 2:12),하나님의 계시에 있어 꿈은 환상과 함께 중요한 계시 방편 중 하나였다(창37:1).
본문에 나타난 바로의 꿈은 요셉의 생애를 결정짓는 3대 꿈 사건 중 마지막 꿈으로 그를 애굽의 총리로 등용시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역사 속에 실현시키고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섭리하신 꿈이었다.
.그가 총리가 되었다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성도들도 삶 또한 출세나 부귀영화를 취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삶이다 때문에 그러한 사람이 되도록 요셉과 같은 연단이 주어지는 것이다.
단락구분
1-7절 바로가 꾼 꿈
8-13절 요셉을 기억하는 술 맡은 관원장
14-24절 바로 앞에 선 요셉
25-36절 꿈을 해석하는 요셉
37-45절 총리가 된 요셉
46-52절 칠년의 풍년 그리고 요셉의 득남
53-57절 칠년 흉년의 시작
- 註 解 -
1-7절 바로가 꾼 꿈
본문은 요셉이 애굽에 팔려온 지 13년,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준지 2년이 지난 후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세 번째 꿈 사건이 기록되고 있다.
바로는 나일 강가에서 살진 일곱 암소가 풀을 뜯어 먹는 꿈과 후에는 흉악(凶惡)하고 파리한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처음 일곱 암소마저 잡아먹는 꿈과 무성(茂盛)하고 충실(充實)한 일곱 이삭과 세약(細弱)하고 동풍(東風)에 마른 일곱 이삭이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꿈을 연속으로 꾼다.
연속으로 또는 반복하여 꾸는 꿈은 그 꿈의 확실성과 임박함을 예고하는 것이다. 바로(Amenemha3세)는 기이한 꿈을 꾸고 번민하여 해몽(解夢)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술사와 박사들을 불렀지만 그 누구도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애굽사람들은 암소를 월신(月神) 이시스(Isis)를 상징하는 동물로서 땅의 소출과 관련되어 있다.
.하수(河水), 큰 강이라는 뜻으로 나일 강의 보편적인 명칭이었다. 애굽은 나일 강의 상황에 따라 풍작과 흉작이 결정되었다.
.느부갓네살은 꿈 내용을 말하지 않고 꾼 꿈이 무엇인지 말하고 해석하라고 했다 이 때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함고 말씀해주신 그대로 해석한다.
8-13절 요셉을 기억하는 술 맡은 관원장
술객이란(חרטמ-하르톰) ‘보다, 설명하다’ 와 ‘감춘다’는 뜻이 합쳐진 말로 ‘감추인 신비한 것들을 보고 설명하는 자’ 라는 의미다.
이들은 신비한 종교적 지식을 소유한 제사장 계급에 속한 자들로서 점성학, 꿈 해석, 손금 보는 것, 점치는 것, 마술 등과 같은 일을 했다.
이들은 모세시대에 바로의 궁중에도 있었고(출7:11; 8:18), 후에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궁중에도 있었다(단1:20) 박사는 공식적 직함이라기보다는 애굽의 현자(賢者)들에게 붙여진 일반적인 칭호였다(출7:11)
꿈으로 인해 번민하는 왕과 그 꿈을 풀지 못해 쩔쩔매는 신하들의 모습은 술 관원장으로 하여금 2년 전 감옥에서 자신의 꿈을 해석해주었던 요셉을 떠올리게 한다(창40:14).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적합한 상황을 만드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의인의 가는 길을 잠시도 잊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은혜로 이끄신다(시121:3-8 사49:15,16)
14-24절 바로 앞에 선 요셉
바로의 부름을 받은 요셉은 그동안 길렀던 수염을 깎고 바로 앞에 나아갔다.
바로는 요셉에게 어떤 신비한 꿈 해석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으나 요셉은 꿈 해석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솔직하게 말한다.
그리고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에게 말했듯이 꿈 해석의 비결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며 대답해주실 것이라 말한다. 16절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즉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샬롬’으로 대답할 것이라는 뜻이다. 바로의 꿈을 듣기 전, 그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장차 선하게 섭리하실 것을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강한 믿음에서 비롯된 직관으로 대답하고 있다.
25-36절 꿈을 해석하는 요셉
바로의 꿈을 들은 요셉은 애굽의 술객들과는 달리 즉시 명쾌(明快)하게 해몽(解夢)한 후, 구체적인 대책(對策)까지 제시한다.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 이니이다”(25-36절) 물론 이 해결책(解決策) 역시 요셉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세상풍조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분명한 해석에 근거한다.
이것은 특별히 언약의 백성과 관련하여 바로와 바로의 나라도 하나님의 섭리속에 깊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아야 함을 뜻한다.
이러한 사실은 애매모호(曖昧模糊)한 이방술객과 박사들의 신탁(神託)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요셉이 분명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해몽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따라서 본문은 바로의 꿈을 주관하신 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었다는 점과, 하나님은 때로 높은 자와 교만한 자들을 난관에 빠트려 그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게 만든다는 점과 또한 세상의 왕권위에 하나님의 절대적 왕권이 엄연히 통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사명을 위임하고 그에게 전하도록 하신 선지자의 말 한마디는 세상의 군왕도 반드시 따라야 함을 보여준다.
이스라엘과 애굽에 대하여 영해를 한다며 성경의 본뜻을 곡해하지 않아야한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국가의 명칭이 되어 성경에 많이 언급되고 그들을 통하여 구원사가 전개 된다는 점, 그리고 애굽은 그들을 괴롭히는 국가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로, 애굽은 이 세상에 속한 나라로 영적인 해석을 한다(물론100%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해석도 있을 수 있다).
무분별한 영해가 성도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은 좋아하고 애굽은 싫어하는 이원론적인 잘못된 사상을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자리하도록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국기를 데모에 사용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선택하여 모본으로 삼고자 하신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애굽의 백성들과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죄악에서 돌이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는 차별이 없으시다.
37-45절 총리가 된 요셉
명쾌한 꿈 해석과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자 바로는 요셉이야말로 그 계획을 추진시키기에 가장 합당한 명철하고 지혜 있는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술 관원장이 요셉의 인격과 정직하고 성실하며 지혜롭고 성결한 삶에 대하여 바로에게 말했을 것).
따라서 바로는 그 즉석에서 왕의 직권으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공식 등용시킨다(33-36절).
실로 요셉은 바알을 숭배하는 파라오 앞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고(16,25,28,32절), 그러한 요셉을 하나님은 바로의 면전에서 영광(세상적인 것이지만)을 얻도록 하신 것이다.
요셉의 생을 통해 나타난 ‘고난 후 기근으로 부터 백성을 구원한 영광’ 된 삶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십자가 고난을 통과하신 후 죄인들을 구원하고 부활 승천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신분과 승귀(昇貴)의 모습을 잘 예표 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셉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모형이다(37장 강해 도표 참고).
46-52절 칠년의 풍년 그리고 요셉의 득남
요셉의 해석대로 전기 7년은 연속적인 대풍이었다.
이 기간 요셉은 장차 닥쳐올 7년의 대흉년에 대비하여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즉 33-35절에 근거해 요셉은 인재 등용과 곡물 수확량 조사 및 수확량의 1/5을 비축하고, 합당한 세금 징수와 국고(國庫) 성(城) 건축 등 많은 국책(國策)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수행했다.
실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나 보디발의 집에서나 시위대의 감옥에서나 애굽의 권좌에 오른 지금이나 변함없이 주어진 책무에 최선을 다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이었다.
힘들고 괴로울 때에도 충성하는 요셉을 마침내 기근(饑饉)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원할 중요한 일을 맡기셨던 것이다(눅16:10; 18:17).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국가에서 그것도 당시 이방 종교의 심장부에서 백성의 지도자로 생활하면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잊지 않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룬 요셉의 구별된 삶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식으로 지은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그대로 요셉의 신앙 고백이다.
즉 가나안 땅 도단에서 노예로 팔릴 때부터 애굽의 권좌에 오르기까지 파란 만장했던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과거의 쓰라림을 말끔히 잊게 해주신 하나님의 위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장자를 ‘므낫세’라 하였고 외롭고 척박한 이방 땅에서도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마음으로 차자를 ‘에브라임’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 요셉은 아스낫과 결혼한다. 왜 신앙이 좋은 요셉이 히브리 민족중의 딸과 혼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이삭이 리브가를 선택하고 야곱이 자기 친족 중에서 아내를 선택 한 것을 생각할 때 더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파라오는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로 지어주고 애굽의 최고의 실세인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요셉의 아내로 중매한다.
이 상황에서 왕의 중매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기독교인 부모나 목사들 중에 '믿지 않는 자와 멍애를 같이 하지 말라' 했다며 넌 크리스천과의 결혼을 무조건 반대하여 자녀들에게 상처를 준다.
또 상당히 많은 분들이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한다.
이방신을 섬기는 여인들로 인하여 신앙이 잃어버린 족장이나 왕들 때문에 가정과 국가를 위기에 빠트린 것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은 그가 이방 나라에 있으면서도 또 이방여인과 결혼했어도 그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내와 자녀들까지 신앙으로 양육하는 모본을 보인다.
이로 볼 때 상대의 신앙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전에 결혼하는 당사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흔들리지 않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려는 믿음이 더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기독교인이 아닐 때 결혼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지금의 목회자가 되었다.
53-57절 칠년 흉년의 시작
마침내 기근의 날은 요셉이 예고한 대로 닥쳐왔고 그 정도는 앞의 7년 동안의 풍년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혹독했다.
파라오는 기근 대책에 대한 전권을 요셉에게 일임했고 요셉은 탁월한 지혜와 성실로 곡물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부응한다.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천혜(天惠)의 나일 강을 가진 애굽에 이와 같은 이례적인 장기간의 가뭄은 하나님은 천지만물 및 자연현상까지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는 요셉이 그 형제들과의 재회와 이어 애굽에 정착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ing......
◐본문소고(本文小考)◑
첫째 :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 연단이 이루어진다.
연단이란 무엇일까? 왜 연단을 주실까? 왜 연단이 끝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선택한 그 사람이라면 단 한번, 하루를 쓰임 받게 될지라도 그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될 때까지 연단은 계속된다. 그렇다 해도 그 하루 쓰임 받은 삶은 귀한 삶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이루는 삶이 이 땅에 보내진 인간의 본분이요 구원받은 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하루 꽃을 피우고 지는 꽃이 있다.
마치 붓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등심붓꽃’ ‘네오마리카’ 그리고 ‘부레옥잠’도 1일화로 알려져 있다.
백년을 살아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았다면 무익한 삶이다.
그러나 하루를 살았다 해도 그 뜻대로 사명을 감당한 삶이라면 참으로 복된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피었다지는-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같이 하시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우리 마음속 깊은 그곳에 영혼을 내리신 주’
‘죽음 이기신 영원한 생명을 약속 하시였네’
둘째 : 뜻을 이루는 그 때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된다.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비교적 정직하고 성실하며 순종적인 신앙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요셉의 마지막 2년의 감옥생활은 하루가 천년 같은 긴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꼭 필요한 기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어 요셉의 고난도 끝났다.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계획한 그 때(야곱일가와 및 인류를 기근에서 구원하고 또 애굽에 정착하여 민족과 나라로 성장시키는)까지 그는 애매히 고난을 받은 셈이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당하는 고난과 그의 삶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꿈과 및 그가 기도할 때마다 교제하시며 또한 섭리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
셋째 : 기근(饑饉)은 왜! 무엇 때문에 비롯되는가?
자연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온 현상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역사 정치학자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와 왕의 부덕에서 비롯된다고 해석한다.
농부들은 인간들이 신에게 뭔가 잘 못해서 하늘이 노(怒)해서 기근이 들었다고 생각한다. 원인분석과 해석에 따라서 해결하려는 방식도 각각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굶주림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기근을 이야기해도 별로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매스컴을 통하여 아프리카나 일부지역의 기근을 어렴풋 짐작할 뿐이다. 아무튼 성경은 기근의 원인과 해결의 방법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
1,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때에 흉년이 들어 기근이 있었다.
이 때의 기근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시험하시기 위한 기근이었으며 본문의 야곱 때에 기근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한 기근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2.여호와를 떠남으로 기근이 들었다.
아버지 곁을 떠난 탕자의 비유는 기근이 어디서 비롯되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
3.우상 숭배한 죄로 인하여 기근이 들었다.
아합왕 때 3년 6개월 비가 내리지 않았다(왕상18:2). 또한 역대 왕들이 여호와를 떠나 이방신을 섬김으로 기근이 임하였으며, 약조를 어기고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린 때문에 기근이 있었고(삼하21:1), 또한 징벌의 도구인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과 도성을 포위함으로 인위적인 기근이 발생하였다(왕하6장 25:3절).
4.말세의 징조로서 기근을 말씀하고 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24:7) 인간의 비극은 있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죄악이다.
5.여호와의 말씀이 없는 기근이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기근을 빗대어 영적인 기갈을 말씀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린 자들을 초청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 양식과 물이 없어 그 말씀을 갈망하는 자(가난한 자)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3-12)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하셨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는 생수와 영생하는 양식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양식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요 또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이다.
넷째 기근에 대비하여 저축하라(요셉에게 가르쳐주신 정책에서).
요셉의 풍년(豊年)의 때 저축(貯蓄)은 기근(饑饉) 때의 아사(餓死)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성도들의 지혜 있는 저축은 하나님의 때를 위함이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성도와 교회의 의무이다.
‘여유로울 때 낭비는 기근이 닥칠 때 어려움을 당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허영과 사치가 죄악이며’ ‘목적 없는 부(富)를 위한 저축 또한 죄가 된다’ 마6: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선한 목적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며, 힘 있을 때 저축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저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사업과 선한 사람을 위한 것, 즉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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