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55
12월30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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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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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8f20bqBb84E (김성현 마르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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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가정·친교의 공동체 건설의 비결은 끊임없는 상호 인내와 지지, 계속되는 용서와 격려!>
인간적인 시각으로 성가정의 구성원 하나하나를 두고 보면 참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지경이었습니다. 도무지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가정, 뭔가 이상한 가정이었지요.
엄밀히 따지면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신비에 싸여있었고, 성장하면서 가끔 보여준 돌출적인 언행들은 마리아와 요셉의 속을 사정없이 뒤집어놓기도 했고, 비수처럼 찌르기도 했습니다.
워낙 신비스러운 성가정이었기에, 구성원 사이에 발생했던 약간의 오해와 그로 인한 긴장들이 복음서 몇 군데에 아주 살짝 언급되고 있습니다.
12살 소년 예수의 예루살렘 실종사건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소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 순례 길에 오르셨던 성모님과 요셉은 어느 순간 소년 예수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은 장장 사흘간이나 소년 예수를 찾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곧 찾겠지, 했었는데, 사흘 동안이나 못 찾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마음은 불안해졌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왜 이렇게 애를 태우는가, 화도 났을 것입니다. 더 시간이 흐르면서 혹시나 유괴된 것은 아닌지, 노예상인들에게 끌려간 것은 아닌지,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성모님과 요셉은 중간중간에 설치된 미아보호소란 미아보호소는 다 들르셨을 것입니다. 다행히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회당에 있었습니다. 부모의 걱정과는 달리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율법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두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고, 기가 차지도 않았지만,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소년 예수에게 묻습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그 상황에서 소년 예수의 반응을 보십시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 모르셨습니까?”
제가 그때 당시 성모님이나 요셉이었다면, 일단 뒤통수 한 대 딱! 때리고 시작했을 것입니다.
“야! 아들! 네가 아무리 메시아지만,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야 할 것 아냐?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될 덴데, 어디 감히 버릇없이 말대꾸야 말대꾸가!”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속이 많이 상하셨지만 저처럼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복음사가들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이렇게 성모님과 요셉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해하지 못할 상처가 생길 때마다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다는 것은 앙심을 품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 그렇게 행동한다 이거지? 한번 두고 봐! 언젠가 꼭 갚아주고 말 거야’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셨다는 말은 일단 인간적인 모든 판단을 보류하겠다는 말입니다. 내 뜻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비록 잘 알지 못하겠지만, 계속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가겠다는 말입니다.
성가정의 구성원 각자 각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진 노력했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인내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갔습니다.
상대방으로 인해 미칠 것만 같을 때, 상대방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순간에도 상대방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그렇게 각자의 신앙여정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오늘 이 성가정 축일에 이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원만한 가정, 원만한 공동체는 절대로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끊임없는 상호 인내와 지지, 계속되는 용서와 격려, 그 결과 이루어지는 가정이 성가정이요 친교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두번 째 독서인 콜로새서를 통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너무나 현실적인 동시에 구체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 우리 가정 공동체, 수도공동체에도 유효하며, 말씀 그대로 적용되는 권고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용하신 표현을 한번 보십시오. 너무 직설적이고 신랄해서 가슴이 뜨끔하기도 하지만, 좀 웃기기도 합니다.
그때 당시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부부간의 갈등은 심각했나 봅니다. 부인을 모질게 몰아붙인 남편들이 많았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권고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콜로새서 3장 19절)
오늘날만 자녀들을 들볶는가 했더니, 초대 교회 시대 때도 부모들이 너무 마음이 앞서 자녀들을 들볶기도 했는가 봅니다. 그래서인지 바오로 사도는 부모들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콜로새서 3장 21절)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은 오늘 우리 가족 구성원들도 꼭 유념해야 할 권고입니다. 입시 준비, 취업 준비, 맞벌이, 노후 준비 등등으로, 다들 세상살이가 너무 힘겹고 팍팍해지다 보니, 서로를 향한 여유가 너무 없습니다. 때로 상대를 너무 들볶거나 모질게 대합니다.
자녀들은 물론 배우자들을 포함해서 어르신들조차 하느님 앞에서는 나약한 어린이 같은 존재들입니다. 초기 양성기에 있는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종신서원을 한 수도자들, 노년기의 수도자들도 하느님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 묘목같은 존재들입니다.
인간 존재는 그 누구나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성장을 거듭해야만 합니다.
상대방은 우리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히 성장합니다. 하루 0.01 밀리미터씩이나 성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이 하루에 1미터씩 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기대치가 크다보니 당연히 실망도 상처도 커집니다.
나자렛 성가정 공동체 안에서 예수, 마리아, 요셉 성인께서 서로를 위해 가장 크게 노력한 덕은 인내의 덕이었습니다. 서로를 위해 늘 인내하면서, 늘 기도하면서, 늘 격려하면서, 절대로 들볶지 않고, 모질게 대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해나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공동체 안에 부성애가 가득 담긴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되풀이해서 기억되고
꾸준히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콜로새서 3장 12~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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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IlK3MzzN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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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붕괴, 해법은 없는가?>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가정이 붕괴하고 심지어 가정을 만들지도 않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며 가장 필요한 축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 결혼도 안 하려 하고 자녀도 안 낳으려 할까요?집값이 비싸고 사교육비가 많이 드는 문제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 모든 문제를 다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생활이 안정되어야 할 시기에 왜 황혼이혼은 더 늘고 있는 것일까요?
일본 30대 남성 타카히토는 잘 나가는 은행원이었습니다. 많은 여성의 결혼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아내가 우울증이 왔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던 타카히토는 지금까지 자신을 이끌어주었던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내를 살해할 것을 종용합니다.
둘은 철저히 계획적으로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완전범죄는 없는 법. 어머니와 아들은 결국 죄를 고백하고 맙니다.
사람은 성장하려면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어머니가 자신을 이끌어 주었고 이제 아내가 그러기를 바랐던 타카히토는 우울증에 걸린 아내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다시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닮아가야 하고, 나를 이끌어 줄 모델의 부재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사람의 붕괴, 가정의 붕괴, 나아가 나라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가정의 끈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모델이 필요합니다. 아기는 부모가 필요하고, 가정은 사회가 필요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시작할 때, 목표 곧 닮고 싶은 모델이 없으면 방향을 잃고 맙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상운 저자의 『왓칭 2』에 이런 실험내용이 나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이 유리한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입니다. 한 문제를 놓고 3부류로 나누어 실험에 참여합니다.
1번 부류는 문제가 이미 풀렸다는 긍정적 상상을 하고 나서 문제를 접하게 했고, 2번 부류는 문제를 바로 직면하여 풀었으며, 3번 부류는 문제가 이미 풀렸다는 상상을 하게 한 다음, 그 문제가 어떻게 풀렸을지도 상상해보게 하였습니다.
가장 문제를 풀지 못한 부류는 1번이었습니다. 문제가 쉽게 풀릴 거란 헛된 망상만 가지고 있으니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치자 금방 지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문제를 효율적으로 잘 풀었던 사람들은 3번 부류였습니다. 풀릴 것이란 믿음과 함께 그 문제를 풀기 위해 겪어야 하는 어려움까지도 예상했기에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려는 젊은 부부들도 이 세 부류로 나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우리는 사랑하니까 무조건 행복할 것이란 무한 긍정의 부부입니다. 하지만 현실이 생각과 같지 않음을 알고는 곧 포기하고 맙니다.
두 번째 부류는 ‘닥치면 되지 않을까?’입니다. 일단 결혼해서 살다 보면 다 될 것 같다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경험은 쌓이되 후회도 많습니다. ‘배우자에게 그러면 안 되었었던 건데, 혹은 자녀를 그때 그렇게 키워서는 안 되었던 것인데!’ 등과 같습니다. 경험 있는 사람, 혹은 미리 살았는데 잘 살았던 모델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부류, 곧 하느님께서 성가정이 되라고 그 모범을 주시고 그 가정의 모델대로 변해가게 둘을 결합해주셨다고 믿는 가정입니다. 이 가정은 조금씩 성가정의 모습을 닮아가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결국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가정이 됩니다.
유태인들은 구약의 가정의 모델들을 많이 접합니다. 노아의 가정을 접하며 부모의 신앙에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집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을 보며 자녀가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임을 배웁니다. 이사악의 경우를 보며 배우자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운명처럼 정해 주신다는 것을 배웁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며 자녀를 많이 낳아야 복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모델들을 가지고 사는 이들이기 때문에 가정에 질서가 있고 또 자녀들도 잘됩니다.
우리는 여기에다가 성가정의 모범도 있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결혼하고 이집트로 갔다가 옵니다. 마리아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정결하게 자녀를 낳고 교육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첫째로 여기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목숨을 바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가정으로 만드시기 위해 혼인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델을 가정의 모델로 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무한 긍정으로 결혼하여 절망에 빠지고 왜 살면서 배우려는 것일까요? 아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목적으로 나아가며 성장합니다.
사랑의 성장은 모델 없이 불가능합니다. 모델이 없으면 모기나 기생충으로 남습니다. 진정 우리가 성가정을 모델로 삼고 혼인하여 닮아가려고 하는지, 아니면 실패가 보이는 길로 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델이 없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그 가정은 이미 붕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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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소경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소경은 ‘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또 다른 기적도 보여주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에 침을 발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를 지어서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소경의 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요소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삶의 기쁨입니다. 꽃, 새, 구름, 바다, 나무, 아이,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기쁨입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모니터는 우리를 더 넓은 세상과 연결해주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은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잘 지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흡족해 하시면서 그렇다면 가진 것을 보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부자청년은 슬퍼하면서 떠나갔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자청년이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행동했다면 우리는 부자청년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도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율법학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문득 생각합니다. 보는 것은 주체가 ‘나’입니다. 내가 보는 것이고, 내가 즐거운 것이고,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것은 주체가 ‘남’입니다. 남이 말을 해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은 보는 것으로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합니다. 구약 예언자들도 모두 말씀을 듣고 전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라고 선포했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알아들어라.’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전에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서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기도와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 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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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이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체험을 거쳐 우리의 형제가 되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강생의 신비는 이 가정이라고 하는 실체도 취하여 거기에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하느님 사랑의 표지와 구원의 도구로 삼는다. 오늘 축일은 가정이 강생의 신비를 통해 구원을 위한 공간이 됨을 상기시켜줄 뿐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대해 체험을 했던 나자렛 가정을 우리에게 구체적인 모범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즉 교회는 오늘 나자렛 가정의 구체적 체험을 거행하고자 하며, 그 체험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모범으로 제시하려는 것이다.
집회서의 내용은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너는 네 아비가 늙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설혹 노망을 부리더라도 잘 참아 받고 네가 젊고 힘 있다고 그를 업신여기지 말아라”(집회 3,12-13). 이 말씀은 너무나 쉽게 노인들에게 무관심해 버리고, 마치 그들을 무슨 짐처럼 여기며 그들을 사회공공기관에 맡겨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하는 말 같다.
복음: 마태 2,13-15.19-23: 이집트 피난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한 가정이 겪는 고통스럽고도 극적인 사건들에 집중되고 있다. 요셉이나 마리아 혹은 아기 예수가 주인공이 아니라, 한 가정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하는 말은 한결같이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13.20절)라고 하고 있다. 이는 어느 것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단일한 결합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복음 전체에 흐르고 있다.(14-15절.21절) 여기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다. 즉 나자렛 가정의 가족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감정과 행동의 완전한 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서로 간의 봉사와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아기 예수에 대한 사랑이다.
아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적으로 나이 때문에, 또 그의 사명 때문에 닥치는 어려움에 대해 보호와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징표들을 알아듣고자 하는 마음 자세로써 아기를 보호하고 도와주고자 애쓴다.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게 하도록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사람의 협력관계를 볼 수 있다. 가족들 상호 간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 이 가정의 삶이 전개되고 있다.
나자렛 성가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것이다. 우선, 가정의 참된 의미는 오직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를 깊이 나눌 수 있는 곳에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영혼과 육신을 결합해주며, 사랑은 삶의 극적인 어려움까지도 극복하도록 해준다. 사랑이 없으면 가정은 무너지고 말며, 사랑이 식어 가는 가정에는 법적 조치도 사회적 대책도 아무 소용이 없다. 가정은 사랑과 그 사랑의 요구가 회복될 때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두 번째 사실은 가정이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은 바로 사랑의 최대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이 진정한 의미의 가정이 되려면, 나자렛 가정과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빛과 영감에 항상 개방되어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정이 근본적으로 종교적 차원을 가져야 하며 하느님께 대한 감각을 양성해야 할 의무도 있다.
세 번째는 나자렛 성가정이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고 하느님께 온전히 개방되어있었기에 이 세상과 인간적인 문제에 개방되어있다는 점이다. 즉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이며, 마리아는 예수님이 형제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느끼게 해주는 협력자 역할을 할 것임을 말해줄 것이다.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23절). 이 말씀은 나자렛이 아무런 명성도 없는 보잘것없는 동네이다.(참조: 요한 1,46) 이 동네와 예수님을 연결하는 것은 당신의 겸손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결합을 입증하는 것이다. 가정은 개방된 공동체이다. 그것은 가정이 사랑에서 생기고 사랑 안에 자라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안에 폐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가정 안에서의 행동규범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모든 어려움과 긴장 그리고 세대 간의 긴장 등을 안고 있는 가정생활이 처해 있는 분위기에 대한 것이다(참조:콜로 3,18-21). 한 가정을 이루는 남편과 아내를 한 몸(창세 2,24)이라고 할 때, 그리고 부모와 자식을 연결해주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 그리스도의 몸이란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담겨있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말씀과의 항구한 일치가 가족들 모두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랑 속에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정들과 만남으로 서로 가르치고 충고함으로써 현대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혼인의 의미, 부부 사랑, 생명의 가치, 자녀들의 가치, 자녀들의 교육, 부부 상호간의 신뢰 등에 대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개방된 가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 부부간의 넘치는 사랑과 자녀들의 기쁨에 찬,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정, 한평생 이루어졌으면 하는 이 놀라운 기적은 인간들의 깨어지기 쉬운 사랑을 감싸주고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로 바꾸어놓는 하늘로부터의 축복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러한 가정을 실제로 만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가정 축일은 오늘의 가정이 지녀야 할 모든 가치 즉, 사랑, 헌신, 희생, 정덕, 생명 존중, 노동, 평화, 환희 등을 알아들을 수 있는 열쇠를 던져주고 있다고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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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사건, 곧 예수님 가족의 이집트 피신과 이스라엘 귀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은 마태오 복음서에는 떨어져 있지만, 축일 전례 독서에서는 연결되는 이야기로 선포됩니다. ‘헤로데’라는 인물의 위협과 죽음, 그리고 ‘이집트’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피신과 귀환의 여정은 떨어져 배치된 두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정을 ‘길을 걷는 순례자’로 묘사합니다. 아기 예수와 마리아는 요셉의 안내를 받아 베들레헴에서 이집트로, 이집트에서 갈릴래아 나자렛으로 옮겨 갑니다. 그들은 아기를 죽이려는 헤로데의 위협 때문에 어느 한곳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이 여정을 이끄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꿈’에서 요셉에게 당신을 드러내셨고, 천사를 통하여 요셉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예수님과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길’을 걸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예수님과 그분의 가족을 통하여 실현되었고, 복음서 저자는 이 사실을 강조하려고 구약의 본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호세 11,1; 판관 13,5; 16,17 참조)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길을 걷는 순례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에게 배척당하시고 위협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순례의 여정에서 같은 상황에 부딪힐 것입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와 함께 길을 걸어가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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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모는 파업 중>
얼마 전 일간신문에 난 ‘부모는 파업 중’이란 기사를 소개합니다.
미국의 한 부모가 집안에서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녀들을 상대로 ‘부모 파업’을 벌이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플로리다주 델토나에 사는 핼런 배너드(56)와 부인 캣(45) 씨는 아들 벤자민(17)과 딸 킷(12) 남매가 평소 집안일이나 설거지를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방 정리도 하지 않고 빨랫감을 아무 데나 내던지는 등 최소한의 도리를 외면하고 있다며 2004년 12월 6일 파업을 선언했다.
부부는 두 남매를 아무리 설득하고 타일러도 반성과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정원에 텐트를 설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부모는 파업 중’ ‘협조와 존중을 요구하며’라는 피켓까지 꽂아놓았다.
끼니때가 되면 자신들만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집 밖으로 내다 놓은 TV를 보거나 독서를 하다가 침낭에서 잠을 자고 있다. 냉장고에 먹을거리만 채워놓은 채 ‘가출’ 한 뒤 지금까지 남매에게 일체의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
“아이들에게 삶의 교훈을 주기 위해서예요.” 부부는 “일을 못 시켜 먹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면서 “자기 코앞밖에 보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눈을 들어 세상을 내다보게 하려는 마음”이라고 입을 모은다.
부부의 파업 현장에는 이웃들과 취재진은 물론, 비슷한 처지의 부모들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는 부모가 할 짓이 아니라며 손가락질을 하는 반면, 대다수는 이번 기회에 모든 자녀에게 본보기를 보여 달라며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고 현지 언론은 전한다.
부모 파업 닷새째인 10일(현지시각) 현재, 아들은 본체만체 집을 들락거리고 있다. 딸은 지난 8일부터 자신의 빨래를 직접 하기 시작했다. 이상입니다.
자녀 여러분, 여러분들은 집에서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위의 아이들 같아선 안되겠죠? 집안일 잘 거들고 최소한 내가 할 일은 내가 합시다.
오늘은 가정 주일입니다. 오늘의 전례는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들에, 부모와 함께 사신 예수님께 주의를 기울이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우리에게 참된 삶의 모범으로 소개합니다. 가장 요셉은 깊은 신심으로 아기 예수와 아기 어머니를 보살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모든 가정이 성가정을 본받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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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치리아코 신부님]
<사랑합니다>
바보같이 로마에 유학을 떠난 어느 여학생의 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로마 시내에서는 방을 얻기가 어려워 여학생은 시내 외곽에 방을 얻어 기차로 통학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수업을 마치고 기차를 이용해 집으로 가는데 기차 안의 승객들은 저마다 자기 일들로 책을 보거나, 신문을 보거나, 졸고 있거나,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데, 기차가 몇 정거장을 지났을까, 갑자기 건장해 보이는 청년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타더라는 것입니다. 기차에 오른 청년은 이내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책을 보고 있어?”
“왜, 잠만 자?”
“신문에 무슨 기사가 났어?”
“누구하고 통화를 하는 거야?”
그러면서 놀란 사람들의 대답을 자기 아버지에게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이 사람은 이런 책을 읽고 있대.”
“아빠, 신문에 이런 일이 생겼대.”
“아빠, 이 사람은 여자 친구가 있대.”
그 순간 고요한 정적이 감돌던 기차 안은 모두 청년에게로 시선이 집중되고 술렁거림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청년은 아버지에게 오줌 마렵다고 소리를 쳤고 아버지는 청년을 데리고 기차에 딸린 화장실로 데려가 용변을 보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마치고 손을 씻은 청년은 기분이 좋았는지 또다시 기차 안의 승객들에게 다가가 비누로 씻은 자신의 두 손을 내밀며, “맡아봐! 냄새 좋지?” 하며 일일이 냄새를 맡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기차 안은 폭소가 터졌고 모두가 연실 청년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고 합니다. 여학생은 그 글 끝에 이렇게 썼습니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주변 사람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정적만이 감돌던 기차 안은 머리가 부족한 청년 한 명으로 인하여 이내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였다.”
사랑은 계산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이기겠다는 욕심으로는 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속아주기도 하고 가끔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사랑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되고 순수한 관심의 배려입니다. 이것이 사라지고 있기에 많은 가정의 행복이 깨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용서가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화와 감사가 사라지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서 이 같은 아름다운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지면 이름은 스스로 허물을 벗습니다. 그래서 모든 부부의 이름은 사라지고 ‘여보’와 ‘당신’만 남는 거랍니다.”
사랑은 내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일이면 이미 늦어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의 사랑은 바로 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라늄 꽃의 꽃말은 “그대가 있기에 행복이 있네”라고 합니다. 가족 한 명 한 명을 예쁜 꽃으로 생각하여 지금의 있는 그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있어, 네가 있어 행복해”라고 말입니다.
쑥스러워하며 입안에 웅얼거리고, 생각만으로 말하지 않고 내일로 미루다가는 영영 그 아름다운 말을 가족이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시린 가슴의 상처로 영원히 남을 수 있습니다.
세속의 한 해가 마무리되는 오늘 교회는 세상의 가장 작은 교회인 가정을 위하여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오늘날 모든 가정이 나자렛의 성가정을 닮으라고 가르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부모님에게 하신 자세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 51).
예수님은 분명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계산적이지 않고 바보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있는 그 자리, 그 순간에 사랑을 사셨습니다. 성모님 역시 이기적인 삶이 아닌 희생의 사랑을 사셨습니다. 그분의 순명과 자기 헌신이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 성인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남자로 바보 같은 삶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바보스러움의 희생이 나자렛 성가정을 지켜낼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가정의 평화를 위해 오늘 사도 성 바오로는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같이 가르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콜로 3, 12)
진정 사랑으로 한 해를 잘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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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황용구 안드레아 신부님]
<성실한 신앙생활 안에서 행복한 성가정이 됩시다>
어느 젊은 남녀가 혼인면담을 하러 본당에 찾아왔습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혼인면담할 당사자 진술서 등의 혼인 면담용 서류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면담 초반에 신랑이 미신자이고, 신부는 신자라서 ‘미신자 장애만 관면해 주면 되겠구나’하고 속으로 생각을 했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신랑이 될 형제님이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인 날짜를 알아보니, 형제님의 세례식이 있고 난 후였습니다. 자매님은 혼인성사를 받기 위해 신랑이 될 형제님을 교회로 이끌어 주었던 것입니다. 자매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세례 후에 혼배를 하자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2009년은 수원교구가 성가정 운동의 3년을 마무리 짓는 해입니다. 이 특별한 기간에 성가정이 되라고 하느님께서 두 분을 맺어주셨고, 또 형제님을 세례성사로 이끌어 주시는가 봅니다. 나중에 2세가 태어나면 꼭 유아세례를 받게하여 하느님께 더욱 감사드리시고, 보다 성실한 신앙생활을 통해 행복한 성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나자렛 성가정을 특별히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늘 주님의 사랑과 이끔 안에서 모든 가정이 성가정이 되기를 기도하며 보내는 거룩한 날이기도 합니다.
점점 더 각박해지고 어려워지는 경제현실에 우리 가정에도 어두움이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도적 권고 가정 공동체에서 현대 가정이 놓여있는 역사적 상황을 “빛과 어둠의 교차점으로 나타난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에 뿌리박은 사랑을 위한 교육만이 어둠의 가정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정에 드리워진 어둠을 밝히는 등불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 안으로 내려오신 아기 예수님이며, 우리는 밝은 희망의 빛을 오직 신앙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 요셉, 성모님, 예수님이 이루셨던 성가정에 늘 웃음과 평화만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가정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가운데 그 어려움과 고통을 봉헌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 요셉과 성모님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는 내용을 통해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가정이 온전히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그토록 바라는 성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12월의 마지막 주간은 ‘가정 성화 주간’입니다. 가정생활의 자랑이며 모범이신 성 마리아와 성 요셉의 덕을 본받아 가정성화를 이룰 때, 우리가 외치고 있는 구역반 공동체의 성화, 나아가 본당, 지역교회, 보편교회 성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하나의 기초적 교회이며, 교회의 세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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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가정>
마태오 2,13-15.19-23 (이집트로 피신하시다,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성가정>
나는 하느님처럼
너를 돌보고
너는 하느님처럼
나를 돌보니
성가정
너를 하느님처럼
나는 섬기고
나를 하느님처럼
너는 섬기니
성가정
나는 너에게
하느님처럼 되어주고
너는 나에게
하느님처럼 되어주니
성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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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복을 많이 만드시고, 나눠주시고 또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성가정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을 더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요셉은 목수일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하였고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라는 시메온의 당혹스런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19) 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에는 인간적 갈등과 고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습니다.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성가정은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가정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한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 있어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13,8) 요한 사도도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 3,14).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 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여 성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는 대통령(미국 16대, 1861)이 되고 나서도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4)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새서 3,13.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새서 3,15.16) 하셨는데 이 외침이 하나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고, 말씀이 마음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실천하는 가운데 믿음의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영적 충만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 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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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0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021년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함께하실 것 같았던 부모님께서 1년 사이에 모두 하늘나라에 가시니 마음이 먹먹해지고, 잘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늘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부모님 물건을 정리하는데 큰 형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님 재산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니? 다른 사람들 보니까 재산 분할 문제로 싸움도 많이 하던데, 우리는 그럴 일이 없잖아.” 사실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재산은 신앙심과 교육이었습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삶을 늘 강조하셨고, 또 한 가지는 끝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책을 손에 놓지 않으면서 생활합니다. 많은 돈도, 세상의 높은 지위도, 그밖에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는 우리 가족 모임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게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가 가족들 간에 더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가정을 성가정의 모범으로 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가정이 부자였을까요? 아니면 세상 안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들의 가장인 요셉은 가난한 목수로 알려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결 예식 때 바치는 제물도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비둘기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고통과 시련이 없었을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가족을 보면,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첫아기인데도 마구간에서 낳아야 했던 형편이었습니다. 에집트로 피난도 가야 했고, 12살 때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너무 일찍 하느님 곁으로 가신 것 역시 인간적 관점에서는 커다란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십자가 아래에서 직접 봐야 했던 어머니의 아픔을 떠올리면 고통과 시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성가정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성가정은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 서로서로를 위한 사랑의 마음에서 성가정은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신앙의 일치를 성가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성가정도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 가정에 있는가를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그 사랑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시면서 진짜 성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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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례 항해 여정 중의 성가정공동체>
가장의 리더십-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
지난 12월28일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95세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을 위한 특별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을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분은 침묵중에 교회를 떠받쳐 준 분입니다. 그분은 지금 매우 아픕니다. 그분을 기억하며 주님께 그분을 위로해 주십사, 또 끝까지 교회를 위한 그분의 사랑의 증거가 지속되게 해 주십사 주님께 청해 주십시오.”
오늘 성가정 축일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겹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오늘 하루 내내 화살기도 노래로 바치며 행복한 성가정 축일을 지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이 참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성가정 요셉 수도 성가정 공동체에 몸담고 살고 있음이 참 감사합니다.
아마 이렇게 하느님 중심의 성가정 공동체를 이뤄 사는 12명 대가족의 공동체도 드물 것입니다. 그대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를 모델로 삼아 살아가는 순례 항해 여정중의 우리 성가정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세상이 흡사 순례 항해 중인 바다 같다는 생각에 강론 제목을 “순례 항해 여정 중의 성가정 공동체”라 정했습니다.
잠시 성가정 축일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참으로 시의적절하게도 나자렛 성가정을 특별히 기억하고 그 모범을 본받도록 성가정 축일을 제정했습니다. 성가정에 대한 신심이 교회 내에서 퍼진 것은 지난 17세기 무렵으로,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된 공경이 캐나다 퀘벡의 초대 주교 라발(1623-1708)에 의해 캐나다로 확산하면서 특별 미사가 봉헌되고 기도문이 제정됩니다.
이어 ‘성가회’, ‘성가정 선교 수도회’, ‘성가정 자매회’, ‘베르가모의 성가정 수녀회’ 등 성가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공동체들이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1893년에는 교황 레오 13세가 모든 가정을 성가정에 봉헌했고, 1921년 10월 26일에는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이 축일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모든 교회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도록 합니다. 마침내 1969년 전례력 개정으로 성가정 축일은 성탄 팔일 축제내의 주일, 즉 예수성탄 대축일 다음의 첫째 주일이지만, 이번처럼 주일이 없으면 12월 30일에 지냅니다.
보금자리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하고 어두워도 반듯한 부모들이 건재하는 한, 자녀들은 잘 양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가정생활의 체험은 평생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저도 초등학교 어렸을 때 귀가하면 우선 찾는 것이 어머니였습니다. 특히 가장의 리더십이 빈약할 때 어머니의 역할은 참으로 결정적입니다.
훌륭한 인물들의 배경에는 십중팔구 현모양처의 어머니들이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가끔 되뇌이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은 아무나 하나?”, “부모는 아무나 되나?” 때로는 부부 자격시험. 부모 자격시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책임감은 물론 준비가 참으로 부족한 이들이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므로 불행을 겪고 있는 자녀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따뜻한 보금자리 품의 가정 공동체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대부분 결손 가정들입니다. 힘들고 거친 광야 세상에 성가정 공동체를 이뤄가는 가정의 부부들을 보면 저절로 감동하고 고마운 생각까지 듭니다. 문제가 없는 순탄대로의 성가정이 아니라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다하는 부모들이 있어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저는 힘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임을 다하며 가정을 이끌어가는 부모들을 보면, 저는 무조건 성인들이라고 격찬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 가정을 잘 이끌어 간다는 것은 거의 순교적 희생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순례 항해 여정 중 파선이나 조난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지요! 어제 읽은 기사가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성가정을 이뤄 살기 어려운지 잘 밝혀 줍니다.
“세계화-신자유주의는 다른 어느 곳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추진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한국처럼 비정규직이 많고(전체 노동자의 37.5%), 66살 이상 노인이 빈곤에 시달리는(노인 상대적 빈곤 40.4%) 나라는 없다. 하도급 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들의 상대적 값싼 노동을 이용하는 한국형 이원적 수출경제 구조는 일면으로 대기업들의 세계적 도약을 가능하게 했지만, 다른 일면으로는 최악의 양극화를 낳았다.
구미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학습경쟁과 경제적 압력 속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세계화 시대 말기의 젊은 한국인들은, 아예 ‘가족’ 형태로 결합해 재생산할 여력 자체를 잃고 말았다. 주민등록 세대중 1인 가구 비율이 40%를 넘고,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0.79명으로 떨어진 대한민국은, 가면 갈수록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경쟁 속에서 스스로 생존만 도모하느라 여념 없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나라가 됐다.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지만, 행복지수가 선진권의 ‘꼴찌’에 가깝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2022.12.29. 한겨레, 박노자)
너무나 적나라한 비판이지만 사실입니다. 이런 와중에 성가정을 이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지 정말 눈물겹습니다. 혼기를 놓친 30대에서 50대까지 남녀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설상 결혼했다 해도 이혼은 날로 늘어나고 위태한 가정들 역시 얼마나 많은지요.
제 70년대 교사 시절 6학년 때 지금은 50대 후반의 제자들, 이때만 해도 결혼 못한 이들은 몇 명의 소수였지만 지금의 30-40대는 결혼 못한 이들이 대다수입니다. 결혼한다는 것이 하늘에 별 따기 같습니다. 새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본받아 내가 몸담은 가정의 성가정 공동체 건설을 위해 주님의 형제이자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 전의와 각오를 새로이 해야 절박한 시대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순례 항해 여정 중인 성가정 공동체를 묵상했습니다. 헤로데 임금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갔다가 다시 귀환하게 되는 참 파란만장한 순례 여정 중 가장인 요셉의 리더십이 빛납니다. 참으로 주님의 인도 따라 순례 여정에 충실했던 기도와 믿음, 지혜와 순종의 사람, 참으로 가장으로서 끝까지 인내하며 책임을 다했던 성가정의 가장 요셉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흡사 요셉의 수호천사처럼 생각됩니다. 세상에 아무리 어려운 가정이라 해도 오늘 복음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상황보다 힘든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또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참으로 가장이 리더십이 부족해도 어머니들이 그 책임을 다할 때 하느님은 기꺼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십니다. 참으로 파선 직전의 가정들이 성녀같은 어머니들 덕분에 성공적 순례 항해 여정 중인 성가정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성가정 생활중 구체적 지침을 줍니다. 사실 노부모들 잘 모시는 가정치고 잘못되는 가정 본 적이 없습니다. 자녀들은 어김없이 부모들을 보고 배웁니다. 믿음, 사랑, 희망, 기도, 효도 등 보고 배우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야, 네 아버지나 어머니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분들이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날로 늘어나는 노인들에 또 치매환자들도, 본의 아니게 가정을 떠나 요양원 신세를 지는 노인들도 많습니다. 성가정의 개념이 확대돼야 함을 봅니다. 혈연血緣 가정을 넘어 명실공히 예수, 마리아, 요셉의 신연神緣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우리 교회공동체,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물보다 진한 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 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
참으로 진짜 성가정 공동체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맏형으로 모신 말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요 여기에 속한 세상의 성가정들입니다.
우리 성가정 요셉 수도공동체에 잠시 손님으로 머무는 이들, 또 수도원 가까이 살면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는 분들 역시 넓은 의미로 성가정 요셉 수도공동체의 일원이란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넓고 깊고 따뜻한 정주定住 수도 가정 공동체에 걸맞는 환대歡待의 영성입니다.
1인 가구가 날로 늘어나는 외롭고 쓸쓸한 시절에, 교회의 성가정 공동체 역할은 날로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가정 교회 공동체에 속한 한 식구 형제자매들로 만들어 줍니다.
“주님, 당신 성가정의 모범으로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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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2,23)
<성가정을 이루자!>
오늘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하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은 예수, 마리아, 요셉이 사셨던 가정입니다. '성가정'은 '하느님께서 가정의 중심으로 서서 계신 가정'을 말합니다. '성가정'은 '내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의 중심'이요, '참 가장(家長)으로 계신 가정'을 말합니다.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인 가정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정'은 '신앙과 사회화의 첫 자리'입니다. '인격 형성과 인간적 가치관을 배우는 첫 학교'이며, '사랑의 학교'입니다. 따라서 어머니 뱃속에서 시작되는 가정의 모습이 잘못되면, 이것이 그 사람의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평생 이어지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문인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은 가정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고, 흔들리는 가정을 다시 일으켜 바로 세우자는 호소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은 '가정 성화 주간'입니다. 한번 각자의 가정의 모습을 진지하게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서 계신 성가정을 이루고 있는지?' '내가 중심이 아닌 하느님과 네가 중심이 되는 성가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고 있는지?'
"저는 마태오의 종입니다."
이는 살아생전에 계실 때 저의 어머니(이정숙 사비나)가 아버지( 이종만 마태오)에게 드린 고백입니다. 어머니는 용인본당에서 있었던 성령세미나 후에 이 고백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가정에 평화가 왔고, 성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제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서로에게 종이 됩시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종이 됩시다! 그래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이루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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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3wRaYiuxa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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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마태 2, 13)
가족이라는
인연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기쁨과 아픔을
함께 겪습니다.
나자렛에서도
이집트에서도
함께하는
가족입니다.
성가정이
들려주려는
가정의 역사를
듣습니다.
큰 사랑이
가정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큰 사랑을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되는
가족의 의미입니다.
함께 지나온 시간이
가정의 살이며
가정의 피가 됩니다.
갈등하고
아파하며
한 몸이
되어갑니다.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가정이라는
선물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가정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신앙의 맥박은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돌보고
마주하고
깨어나고
기도하는 곳이
우리들의
신앙이며
성가정입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뜨겁게
만납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도
가장 따뜻했던
사랑을 가정에서
체험하십니다.
가정의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이며
가정의 행복이
하느님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구원은
다른 곳이 아닌
여기 이곳
가정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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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마태 2, 21)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은
우리의 가정입니다.
가정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여정은 시작됩니다.
참된 가정이란
가족 모두를
살아나게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의
소중한 가정은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성가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어놓는 사랑 없이는
성가정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내어놓는 사랑이
성가정의 열매가
됩니다.
성가정이란
하느님 사랑으로
결합되어
하느님을 체험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사랑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기에
가정은 가장 고귀한
선물이 됩니다.
가정의 여정은
성장의 여정입니다.
가정의 탄생은
하느님 현존의
탄생입니다.
가정 안에
참된 정화와
참된 기쁨이
공존하길
기도드립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나자렛 성가정에
머물기를 원하셨고
머무르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성가정 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성가정이란
하느님을 먼저 찾고
하느님을 먼저
바라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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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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