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1
#요한계시록 #Revelation 2:10-11
10 너는 將次 받을 苦難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魔鬼가 將次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獄에 던져 試驗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十 日 동안 患難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忠誠하라 그리하면 내가 生命의 冠을 네게 주리라
Do not be afraid of what you are about to suffer. I tell you, the devil will put some of you in prison to test you, and you will suffer persecution for ten days. 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of death, and I will give you life as your victor's crown.
Nihil horum timeas quæ passurus es. Ecce missurus est diabolus aliquos ex vobis in carcerem ut tentemini : et habebitis tribulationem diebus decem. Esto fidelis usque ad mortem, et dabo tibi coronam vitæ.
μὴ φοβοῦ ἃ μέλλεις πάσχειν. ἰδοὺ μέλλει βάλλειν ὁ διάβολος ἐξ ὑμῶν εἰς φυλακὴν ἵνα πειρασθῆτε, καὶ ἕξετε θλῖψιν ἡμερῶν δέκα. γίνου πιστὸς ἄχρι θανάτου, καὶ δώσω σοι τὸν στέφανον τῆς ζωῆς.
주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환난과 궁핍을 겪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이제 고생이 끝나고 평안과 형통과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앞으로 고난을 더 받을 것이고 심지어 마귀가 교회 성도들 중에서 몇 명을 옥에 던지는 더욱 극심한 시험을 겪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신다. 게다가 그러한 마귀의 10일 간의 극심한 시험에서 딱히 건져내 주신다는 말씀도 없으시고 그저 좌절하거나 변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더욱 강력한 명령을 내리신다. 이런 주님의 단호하신 명령에 어떤 이들은 너무 냉정하고 무정하신 것이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뜩이나 힘겹게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다독여주시지는 못할망정 암울한 말씀만 하고 계신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용맹한 전사에게는 작은 부상을 입었다고 해서 더이상 전장에 투입되지 못하게 되고 불쌍히 여김 받는 것이 용납할 수 없는 수치이고 차라리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 것이 자신에게나 주군에게나 명예와 영광이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환난과 궁핍에 맞서 싸우기를 즐겨하는 용맹한 전사로 여기시기 때문에 작은 고난에 연연해하지 말고 더욱 큰 고난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장렬히 전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명예와 영광의 상급을 받으라고 권면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서머나 교회는 이런 주님의 강력한 편지를 받고서 복음을 위한 자신들의 싸움이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로 인정해주시며 설령 환난과 시험과 궁핍으로 인해 육의 생명은 잃게 되어도 주님께서 개선장군처럼 맞이해주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영적 전투를 위한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 동족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복음을 위해 싸우기는 했어도 피흘리기까지 싸우지는 않았다고 책망했는데, 이는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더욱 강력한 순종을 요구하신 것과 일맥상통한다.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공중권세 잡은 자와 싸우는 것은 이 땅에서의 육체의 생명이 다 할 때 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령한 영적 전투라고 해서 겉으로 보기에 웅장하거나 드라마틱하거나 단번에 확연하게 승부가 갈리는 것이라 여길수는 없다. 도리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될수록 눈에 띄지 않게 교묘히 조용하게 치러지고 점점 교회적인 규모에서 개인적인 규모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마치 군대와 군대가 맞서 총력전을 치르던 것에서 군사 한 명 한 명이 뿔뿔이 흩어져 산지나 숲속을 헤매면서 스스로 생존해 나가고 적을 만나면 사살해야 하는 유격전으로 바뀌게 된 것과도 같다. 교회와 성도 각자가 복음을 위해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고 해서 누구한테 드러낸다거나 하소연 할만한 것들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진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겉으로만 본다면 굳이 성도가 아니더라도 통상적으로 겪는 어려움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교회와 성도의 형편과 삶이 점점 나아지리라는 기대도 서머나 교회가 받은 주님의 편지에 따르면 타당하지 않다. 교회와 성도의 신앙은 계속해서 점점 성화되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감당해야 하는 신앙의 의무와 시험거리도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 수록 쉬워지고 편해진다고 느끼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신앙의 연차가 높아질수록 걸리적거리고 거슬리는 것과 불편한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서머나 교회는 단지 10일간의 마귀의 극심한 시험을 받았겠지만 오늘날의 성도들은 평생동안 은근한 시험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이들은 차라리 서머나 교회처럼 짧고 굵게 신앙을 지키는 것이 더 화끈하고 모양새도 좋지 않나 싶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주님께서 오늘날의 서머나 교회와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비록 드러나는 모양새도 없고 고질적인 만성 질병처럼 평생동안 은근하게 지속되는 마귀의 시험을 복음으로써 이겨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설령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온것이 맞는지 의아해지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겨낸 것에 대해 생명의 관을 주실 것이다.
11 귀 있는 者는 聖靈이 敎會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者는 둘째 死亡의 害를 받지 아니하리라
Whoever has ears, let the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The one who is victorious will not be hurt at all by the second death.
Qui habet aurem, audiat quid Spiritus dicat ecclesiis : Qui vicerit, non lædetur a morte secunda.
Ὁ ἔχων οὖς ἀκουσάτω τί τὸ Πνεῦμα λέγει ταῖς ἐκκλησίαις. Ὁ νικῶν οὐ μὴ ἀδικηθῇ ἐκ τοῦ θανάτου τοῦ δευτέρου.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어떤 꿈이나 환상에서 육성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복음인 성경을 바로 깨닫게 하시고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주심으로써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을 들을 귀는 사람이 스스로 마련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셔서 거룩하게 하신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신령한 귀이다. 그러므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복음의 말씀인 성경을 사모하여 깨달아 알기를 원할 수 밖에 없고 아무리 결함과 부족함이 많아도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사모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목사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들을 귀는 반드시 복음에 대한 순종의 의지를 수반하게 되므로 들을 귀 있는 성도들은 깨달아 알게 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 선을 행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들을 귀가 있어서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알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한 멸망인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승리하는 성도일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요구하시는 것은 생명까지 내어놓는 철저한 충성의 순종이므로 오늘날 서머나 교회의 성도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에게 이런 충성심이 있는지를 수시로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20210211
#신명기 #Deuteronomy 4:2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여호와의 율법을 가감하지 말라는 말씀은 율법을 기록한 문자의 토씨 하나라도 벗어나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의 본래 취지를 자의적으로 입맛대로 멋대로 왜곡시키지 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린 아이를 처음 훈육할 때는 부모나 교사가 시키는 것만 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듯이, 구약의 이스라엘도 구속사역의 경륜으로 보자면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몽학선생이 초등학문을 가르치듯이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이가 장성해가면서 그 연령에 따라 조금씩 어려운 것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며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실천했던 것들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깨달아 가듯이, 이스라엘도 초반에는 무작정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 준행하던 것에서 조금씩 그것을 통해 여호와의 본래 의도를 알아가는 것이 마땅했던 것이다. 이렇게 문자적인 의미에서 합당한 의미들을 올바르게 유추해서 범위를 확장해 나가는 것은 율법을 가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장상한 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 시기에도 율법에 정통한 자였던 것이다. 또한 모든 율법은 예수님께서 어떤 서기관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갓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따라서 율법의 어떤 조항을 지키던지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이 빠져버리면 이는 율법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수구세력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를 마치 성경이 인정하는 유일한 이 땅의 제도라고 하는 것은 복음에서 하나님을 감하고 자기들의 목적을 가하는 범죄이다. 복음을 근거로 한다면서 교묘하게 이념체제로 몰고 가는 것은 신천지가 성경을 근거로 이만희가 구세주라고 결론을 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기독교 수구세력이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것은 이웃 사랑을 감하고 자기들만의 이념체제를 가하는 범죄이다. 전광훈 같은 이단자가 세력을 규합하여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국민들의 손을 통해 정당하게 세우신 국가 지도자와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는 짓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전부를 감하고 자기들의 더럽고 추한 탐욕을 가한 저주받을 범죄이다. 코로나 시국에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빌미로 이웃의 안전이 위협 받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정부의 방역 지침을 어겨가며 대면예배나 집회 등을 강행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둘 다를 감하고 자기 만족을 가하는 범죄이다.
성도의 신앙은 믿음과 순종, 내용과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 둘 중 하나라도 없는 것은 율법을 가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입으로는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 드러내지 않는다면 사도 야고보기 지적한대로 아무 효력없는 죽은 믿음인 것이다. 이는 행위를 감한 죄이다. 반면에 믿음은 없으면서 덕행만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께 아무런 공로로 인정받지 못한다.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교회에 모이기에 힘쓰지도 않고 합당한 헌금도 하지 않으며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신앙을 담을 형식을 감하는 죄이다. 반면에 아무리 모이기에 힘쓰고 많은 헌금을 하며 예배에 열심으로 참여한다 해도 그 심령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으면 형식이라는 그릇만 있고 아무런 내용물 없는 것과 같다.
목사들이 성경보다 자기 이야기를 설교하는 것은 자기 목적을 가하고 복음을 감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성경 본문의 가장 큰 주제를 외면하고 부차적인 교훈만을 부각시키는 것도 말씀을 가감하는 죄이다. 징계와 징벌을 외쳐야 할 때 은혜와 평화를 전하는 것이 말씀을 가감하는 죄이다. 회개를 외쳐야 할 때 회복을 전하는 것이 말씀을 가감하는 죄이다. 직분자가 직분자로서의 의무의 말씀은 외면하고 권리의 말씀만 받아들이는 것이 말씀을 가감하는 죄이다. 남자가 남자로서의 의무의 말씀은 외면하고 권리의 말씀만 받아들이는 것이 말씀을 가감하는 죄이다. 여자가 여자로서의 의무의 말씀은 외면하고 권리의 말씀만 받아들이는 것이 말씀을 가감하는 죄이다. 부모나 자녀나 어른이나 청년이나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다스리는 자나 다스림 받는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기들에게 유리한 말씀만 받아들이고 힘들고 불리한 말씀을 외면하는 것이 전부 율법을 가감하는 죄이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상이기 때문에 성도라면 말씀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것보다 자기가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챙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