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시1장52절] 또 어느 날 상제께서 종이에 철도선을 그리고 북쪽에 점을 찍어 정읍(井邑)이라 쓰고, 남쪽에 찍은 점을 사거리라 쓰고, 가운데에 점을 찍으려다가 몇 번이나 망설이시더니 대흥리로 떠나실 때에 그 점을 치시고 “이 점이 되는 때에 세상일이 다 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
'井邑' 과 '사거리' 가 보인다....
이것은 "남조선배" 와 관련되어 있다....
(1) 남조선배
[교법3장30절] 또 가라사대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나니 치우(蚩尤)가 작란하여 큰 안개를 지었으므로 황제(黃帝)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치란하였도다. 난을 짓는 자나 난을 다스리는 자나 모두 조화로다. 그러므로 최 제우(崔濟愚)는 작란한 사람이요 나는 치란하는 사람이니라. 전 명숙은 천하에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
.................................
그 옛날 난을 짓는 사람이 있었고, 치란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때 치란하는 사람이 사용한 도구가 <指南車> 였었다..... "南 을 가리키는(= 指) 수레(=車)" 가 <指南車> 이다...이 수레(=車) 는 북쪽에서 육로를 통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은 <指南車> 로 알 수 있다.....이건 낙서의 중앙이 <5土> 인 것을 설명하는 단어가 된다......
崔濟愚 가 작란을 했고, 성사께서 치란하는 역할을 맡았다....성사께서 사용한 도구가 '남조선배' 인데....이 '남조선배' 는 <指南車> 와는 달리 가리키는 방향이 북쪽이다....즉 남쪽에서 출발하는 배 라는 뜻이다.....따라서 종착지는 북쪽이 된다......그리고 <5土> 즉, 육로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6水> 인 바다를 건넌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참고)
[공사1장18절] 상제께서 군항으로 떠나시기 전에 병선에게 “영세 화장 건곤위 대방 일월 간태궁(永世花長乾坤位 大方日月艮兌宮)을 외우라”고 명하시니라. 군항에서 종도들에게 물으시기를 “바람을 걷고 감이 옳으냐 놓고 감이 옳으냐.” 광찬이 “놓고 가시는 것이 옳은가 생각하나이다”고 대답하거늘 상제께서 다시 종도들에게 오매 다섯 개씩을 준비하게 하시고 배에 오르시니 종도들이 그 뒤를 따랐도다. 항해 중 바람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심하게 요동하는도다. 종도들이 멀미로 심하게 고통하므로 상제께서 “각자가 오매를 입에 물라”고 이르시고 갑칠로 하여금 종이에 싼 안경을 갑판 위에서 북쪽을 향하여 바다 위에 던지게 하였으되 그가 북쪽을 분간하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는지라. 상제께서 다시 갑칠을 불러들여 “왜 얼른 던지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시니 그는 그대로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번개 치는 곳에 던지라”고 이르시니 그는 다시 갑판에 올라가니 말씀이 계신 대로 한 쪽에서 번개가 치는지라 그곳을 향하여 안경을 던졌도다.
[공사1장17절] 김 광찬ㆍ신 원일ㆍ정 성백ㆍ김 선경ㆍ김 보경ㆍ김 갑칠ㆍ김 봉규 등 여러 종도들이 二월 그믐에 동곡에 모였느니라. 다음 달 이튿날 상제께서 공사를 보시기 위하여 서울로 떠나시면서, “전함은 순창(淳昌)으로 회항하리니 형렬은 지방을 잘 지키라”고 이르시고 “각기 자기의 소원을 종이에 기록하라”고 모여 있는 종도들에게 명하시니 그들이 소원을 종이에 적어 상제께 바치니 상제께서 그 종이에 안경을 싸시고 남기ㆍ갑칠ㆍ성백ㆍ병선ㆍ광찬을 데리고 군항(群港)으로 가서 기선을 타기로 하시고 남은 사람은 대전(大田)에서 기차를 타라고 이르신 후에 이것을 수륙병진이라고 이르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원일에게 “너는 입경하는 날로 먼저 종이에 천자 부해상(天子浮海上)이라고 정서하여 남대문에 붙이라”고 명하셨도다. 원일은 곧 여러 사람과 함께 대전으로 떠났도다.
[행록4장17절] 무신년 四월 어느 날 또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ㆍ풍신(風身)ㆍ풍골(風骨)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 하셨도다.
(2) '井邑' 과 '사거리'
[예시1장52절] 또 어느 날 상제께서 종이에 철도선을 그리고 북쪽에 점을 찍어 정읍(井邑)이라 쓰고, 남쪽에 찍은 점을 사거리라 쓰고, 가운데에 점을 찍으려다가 몇 번이나 망설이시더니 대흥리로 떠나실 때에 그 점을 치시고 “이 점이 되는 때에 세상일이 다 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
'井邑' 의 한가운데에 '사거리' 즉 十 이 놓여지면 이것을 井田圖 라고 한다.....
지금 성사께서는 十 의 북쪽(=목적지)과 남쪽(출발지) , 즉 天地 에 점을 찍고 그 한가운데에 점을 찍으시는 중이다........대흥리는 井邑 에 있다.....그러면 이 한 가운데에 뭐가 있을래 몇 번이나 망설이였을까?.....
이 한가운데에는 선천의 중심인 <5土> 와 후천의 중심인 <6水> 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3) <5土> 와 <6水>
[공사3장22절] 상제께서 어느 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
[행록5장31절] 상제께서 二十三일 오전에 여러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제 때가 바쁘니라. 너희들 가운데 임술생(壬戌生)으로서, 누이나 딸이 있거든 수부(首婦)로 내세우라.” 형렬이 “수부로서 저의 딸을 세우겠나이다”고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세수시키고 빤 옷으로 갈아입혀서 데려오라” 하시니라. 형렬이 명하신 대로 하여 딸을 상제 앞에 데려오니라. 상제께서 종도들로 하여금 약장을 방 한가운데 옮겨 놓게 하시고 그의 딸에게 약장을 세 번 돌고 그 옆에 서게 하고 경석에게 “대시 태조 출세 제왕 장상 방백 수령 창생점고 후비소(大時太祖出世帝王將相 方伯守令蒼生點考后妃所)”를 쓰라 이르시니라. 경석이 받아 쓸 제 비(妃)를 비(妣)로 잘못 쓴지라. 상제께서 그 쓴 종이를 불사르고 다시 쓰게 하여 그것을 약장에 붙이게 하고 “이것이 예식이니 너희들이 증인이니라”고 말씀을 끝내고 그의 딸을 돌려보내시니라. 상제께서 경석에게 그 글을 거둬 불사르게 하셨도다.
[공사2장20절] 상제께서 “선천에서 삼상(三相)의 탓으로 음양이 고르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거주성명 서신사명 좌상 우상 팔판 십이백 현감 현령 황극 후비소(居住姓名西神司命 左相右相八判十二伯 縣監縣令皇極後妃所)”라 써서 광찬에게 “약방의 문지방에 맞추어 보라”고 이르시니라. 그가 “맞지 않는다”고 아뢰니 “일이 헛일이라”고 말씀하시기에 경학이 “여백을 오려 버리고 글자 쓴 곳만 대어보는 것이 옳겠나이다”고 말하기에 그대로 행하니 꼭 맞으니라.
[교운1장54절] 상제께서 十一월에 대흥리 경석의 집에 계시면서 포덕소(布德所)를 정하는 공사를 보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황극수(皇極數)를 보신 후에 종도들을 모으고 각기 소원을 물으셨도다. 경석은 상제께서 재차 묻는 말씀에 “유방백세(遺芳百歲)를 못하면 유취만년(遺臭萬年)이 한이로다. 열지(裂地)를 원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병부가 마땅하니라” 하시니 경석은 불쾌히 여기는지라. 상제께서 “병권은 직신(直臣)이 아니면 맡기지 못하므로 특히 너에게 맡기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
[교운2장50절] 갑오년 三월에 도주께서 안 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
[공사3장22절] 에서 淸國光緖帝 에게 응기하여 있던 皇極神 을 옮겨왔다....이 皇極神 이 <5土> 이다.....이 皇極神 이 필요했던 이유는 선천을 마감하고 (=終) 후천을 열기(=始) 위함이다....후천을 여는 것은 [행록5장31절] 의 后妃 가 한다....이 后妃 가 <6水> 이다.... 皇極神 에서 后妃 로 바뀌는 중간과정에 [공사2장20절] 의 皇極後妃 가 있다......이 皇極後妃 를 [공사3장39절] 에서는 <腹中八十年神明> 이라 표현했다......
(참고)
[공사3장39절] 상제께서 공사를 행하실 때 대체로 글을 쓰셨다가 불사르시거나 혹은 종도들에게 외워 두도록 하셨도다.
天下自己神古阜運回
天下陰陽神全州運回
天下通情神井邑運回
天下上下神泰仁運回
天下是非神淳昌運回
佛之形體仙之造化儒之凡節
道傳於夜天開於子 轍環天下虛靈
敎奉於晨地闢於丑 不信看我足知覺
德布於世人起於寅 腹中八十年神明
(하략)
(4) <腹中八十年神明>
[교운2장50절] 갑오년 三월에 도주께서 안 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
石門 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렸다는 표현은 <腹中八十年神明> 즉, 황극신의 배(腹) 속에 80년 있었던 神明 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태극진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5) 태극진경
79
2월에 청주에서 안상익 포감방면 임원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니라. 당초에 지난 몇 년간 충주방면 안상익 · 박한경 · 유철규 등 임원들은 관하 도인들을 경쟁하듯 매월 수십 호씩 중부로 이주시키니라. 이로써 조치원역(鳥致院驛)은 도인들의 이삿짐 수송에 몹시 바빠 다른 일을 처리 못 할 정도였으며, 도인들이 많이 살던 동네에서는 그들의 재산정리에 따른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니라. 개중에는 도인들이 "부산에 가야만 도를 믿을 수 있다."느니 "도만 믿으면 되지 재산은 무엇하느냐?" 하더라는 등 사실무근한 소문이 유포되니라.
80
이러한 소문이 와전(訛傳)되어 마침내는 도인들이 재산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이주하는 행위가 휴전 직후 불안한 시국에 혹세무민하는 유언비어 또는 용공분자의 소행과 비슷하다는 혐의를 받게 되니라. 충북도경에서는 소문의 근거를 찾으려고 형사들이 수개월 간 임원들을 미행하며 내사(內査)하였으나 지목된 안상익 · 박한경 · 유철규 · 김영하와 이갑성(李甲性) · 오득표(吳得杓) · 안영국(安永國) 등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니라. 이달 정기집회일인 18일 밤에 청주 서운동(瑞雲洞) 소재 포덕연락소에 모여 회의하고 영하가 상제님께서 하교하신 풍랑시(風浪時)의 항해법을 교화하던 중 한경 · 철규 · 영하 · 갑성 등 임원들이 도인 20여 명과 함께 형사들에게 체포 압송되어 도경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고문 · 취조를 당하니라.
81
이때 갑성은 혹독한 고문으로 장시간 기절하였다가 다음 날 겨우 깨어나 기동을 못하면서도 그러한 사실이 없음을 극구 주장하여 3일 만에 다른 도인들과 함께 석방되니라. 그러나 한경 등은 고문에 못 이겨 자신들의 혐의를 시인하고 상제님의 행재까지 진술함으로써 도경의 형사주임(刑事主任) 송달헌(宋達憲)과 형사 여러 명이 부산도장에 급파되니라.
82
21일 아침에 상제님께서 평일처럼 산정 공부실에서 도수를 보시고 잠시 쉬실 때 형사들이 급습하여 방자하게 추궁하였으나 상제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며칠간 수십 명의 중부도인이 진술한 바로는 아무런 혐의사실이 없으니라. 다만, 이미 입건 구속된 한경 철규 등의 혐의를 소명하자면 상제님께서 친히 충북도경 근처 사관까지라도 거둥하셔야 함을 말씀드리니 윤허하시고 청봉 등 세 자제분과 도인 정운교(鄭雲敎) 등의 시위를 받으시며 25일 청주 북문로(北門路) 북일여관(北一旅館)에 임어하시니라.
83
도경에서 한경 등이 고문에 못이겨 분별없이 시인한 내용은 개인적인 사기 · 횡령 등 혐의와 함께 유언비어 유포, 용공단체 조직 등 국가보안법 위반의 혐의이며 또 이 모두가 상제님의 명으로 범행한 사실처럼 인정되어 있었으나 조사 결과 그 실제가 아님을 판명되니라. 그러나 한경 등의 개별적인 혐의가 완결되지 않아 상제님께서는 환어하지 않으시고 1개월간을 북일여관에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며 간간이 수사에 응하시니라. 이때 도경 사찰분실장(査察分室長) 김두길(金斗吉)의 집요한 추궁에도 사건은 더 확대되지 않았으나 한경 등 3인은 법원에 구속 · 기소되니라.
84
3월 27일, 양력 4월 29일에 상제님께서 도장으로 환어하시는 길에 청주 화양동(華陽洞)으로 행행하셔서 도수를 보기로 하시니라. 화양동은 본시 백두대간에 속한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중간 산골인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리의 계곡으로서 사적과 명소가 많고, 중국 무이구곡(武夷九曲)과 흡사한 절경지지(絶景之地)라 하여 예로부터 화양구곡(華陽九曲)으로 유명하니라. 그 제3곡에 송우암(宋尤庵)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 · 의종(毅宗)에 대한 보은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만동묘(萬東廟)를 짓게 제향을 드리게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철폐한 것을 유생들이 중창하였더니, 왜가 다시 철거하여 훼손한 묘지(廟趾)와 묘비(廟碑)만 남아 있으니라.
85
제4곡에는 우암이 은거하며 학구(學究)와 교도(敎導)에 힘쓰던 암서재(岩棲齋)가 있고, 제5곡에는 우암이 문인(門人)들을 시켜 명나라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큰 문자를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작은 문자와 함께 첨성대(瞻星臺) 아래 석벽에 새기니라. 그 좌측에 "배신 민정중(陪臣閔鼎重) 봉지(奉至) 여송시열등(與宋時烈等) 근배수계수(謹拜手稽首) 모륵(摸勒) 시사십칠년(時四十七年) 갑인 사월 일야(甲寅 四月 日也)"라는 작은 문자를 새겼으며, 우측에는 암벽에 세로로 석함(石函)을 파서 석개(石蓋)를 하고 이를 "석문(石門)"이라 이름하니라. 석문 아래에는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는 큰 문자와 "차팔자(此八字) 배신 송시열(陪臣宋時烈) 상서(嘗書) 여인자야(與人者也) 정의어차산중(正宜於此山中) 근모이륵(謹摸以勒)"이라는 작은 문자를 새겨 놓으니라.
86
이날 하오에 상제님께서 청봉과 정운교 · 안상익 · 윤금현 등 시종을 거느리시고 승용차로 화양동에 거둥하셔서 만동묘(萬東廟)의 묘지와 묘비를 친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곳 청주 화양동은 명·청 양국(明淸 兩國)이 공존하는 곳이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와 '대신문도수(大神門度數)'를 보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암서재(岩棲齋)를 친감하시는 동안 해가 저물므로 "화양구곡을 다 볼 것은 없지마는 온 김에 제5곡까지 보고 가려 하였으나 해가 저물었으니 신도(神道)로써 공사하리라." 하시고 환어하시니라.
87
환행 중로인 청천(靑川) · 미원(米院) · 주성(朱城) 등지는 해가 지면 공비(共匪)의 출몰이 잦은 곳으로서 야간 통행금지와 군경의 경비가 삼엄하고 검문 · 검색도 심할뿐더러 도로 사정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으니라. 시종들이 야간행행을 만류하였으나 계속 차를 타시고 보은 남일여관(南一旅館)에 임어하시니 자정(子正)이 가까우니라.
88
미원이 고향인 금현은 상제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싶었으나 감히 상고하지 못하고 시종만 하면서 행로의 검문 대응에 많은 시간을 지체하였을 뿐 아니라, 여관을 잡고 때늦은 수라 준비 등에 애를 쓰니라. 자정이 되어서야 수라상을 올리고 시좌하였는데 상제님께서 수저를 상머리에 한번 정저(整箸)하시자 그 순간 갑자기 뇌우전벽(雷雨電霹)이 천지를 진동하므로 시종들과 여관 사람들이 모두 무섭고 두려워서 몸 둘 바를 모르니라.
89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태연히 수라를 진어하시므로 금현과 운교는 물러날 수도 없어 묵묵히 시측(侍側)하고 있으니라. 뇌전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마침내 벼락 치는 소리가 그 부근 일대를 때려 부수듯 한번 진동하더니 이내 그치고 소나기만 내리는데 상제님께서 상을 물리시며 혼자 말씀으로 "이제야 신문공사(神門公事)를 마쳤으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겠구나. 과시 보은지지(報恩之地)로다." 하셨으나 시종들은 어의를 깨닫지 못하니라.
90
보은에서 유어하시고 시종들에게 "내가 이번 길에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를 보고 가려 하였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그대로 돌아가니 금현은 다음 치성에 올라오되, 그전에 이곳 일을 살펴서 포감을 통하여 나에게 자세히 고하라." 하시며 청봉과 운교를 승용차에 동승시키시고 부산도장으로 환궁하시니라.
91
며칠 뒤 청주 일대에 "화양동 제5곡의 석문이 열렸다."라는 소문이 자자하니라. 금현도 소문을 듣고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인근 도인 윤석현(尹錫鉉) · 오병하(吳炳夏) · 박동한(朴東漢) · 김진협(金鎭協) 등과 화양동으로 가니 마침 상제님께서 파견하신 박종순을 만나 함께 그곳에 사는 빈재로(賓在老)를 만나니라. 재로는 본래 만동묘 창건 시에 청국에서 파송된 묘지기의 9대손으로서 대대로 봉직하다가 묘가 철거된 후에는 묘지 옆에서 농사와 주점으로 생계하는 사람이니라.
92
재로가 일행에게 말하기를 "우암이 석문을 만들며 그 속에 무엇을 어찌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그 후 비전(秘傳)되는 전설로는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하리라.' 하더이다. 만동묘를 철거한 왜경이 그러한 전설을 말살하려고 석수를 시켜 석문을 정으로 쪼아 열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갑자기 청천벽력이 일어나므로 혼비백산하여 중지하고 그 흔적을 양회로 때우는 것을 내가 직접 목격하였나이다. 또 지난 3월 27일 밤 자정에는 번개와 함께 뇌성이 울리며 비가 쏟아지더니 석문 쪽에서 벽력이 크게 일어 첨성대가 무너지듯 진동하므로 전율경악(戰慄驚愕)하고 이튿날 아침에 가 보니 석개가 열려 암벽 아래에 깨진 채 떨어져 있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석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나이다." 하니라.
93
금현 일행이 신기하게 여기며 그곳에 가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이 세로 3척 1촌, 가로 1척 9촌, 두께 5촌쯤의 석개가 두 동강으로 갈라져서 떨어져 있으므로 맞추어 보니 "옥조빙호(玉藻氷壺)"라는 큰 문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이라는 작은 문자의 음각(陰刻)이 완연하니라. 금현 등은 그제야 이 일이 증산 상제님께서 청도원에서 대신문(大神門)을 여시는 도수를 짜신 공사와 부합되며, 또 상제님께서 "신도로써 공사하리라." 하시고 석문이 열릴 그 시각에는 "이제 신문공사를 마쳤으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리로다." 하신 비의(秘意)를 깨달으니라.
94
4월 초에 임규오가 도장에 올라가 상제님께 배알하고 금현으로부터 들은 "화양동 석문 열린 일"을 상고하니 용안에 미소를 띄우시고 침묵하시니라. 규오가 다시 "이는 필시 증산 상제님께서 청도원(淸道院)에서 짜 놓으신 황극신도수와 대신문도수가 풀림이 아니오니까?" 하고 아뢰니 "오직 결자(結者)와 해자(解者)는 동체니라." 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시니라.
................................................
도주께서는 北一旅館 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南一旅館 에서 2개의 도수 즉, '황극신도수' 와 '대신문도수' 를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天地가 <一陰시생>하고 <一陽시생>하는 자리가 북쪽과 남쪽인데...여관이름도 北一 과南一 이라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또한, 도주께서 강조한 곳이 <5곡> 이었고, 이 곳에 해당하는 2개의 도수를 마친 것으로 말씀하신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예시1장52절] 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
|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vT4rrEnV_aA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