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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을 중히 여기는자 vs 중히 여기지 않는 자
로마서에서는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든 마음으로 확정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만약 이 날이 샤밧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마음으로 확정하라고 하기 보다는 말씀으로 확증하라고 했을 것이다. 아니, 이미 말씀에 너무 분명히 나와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확증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날과 저날은 결코 샤밧을 말하는 것이 아닌게 분명하다.
다음 구절에 힌트가 되는 말이 나온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있다.) 즉, 우리가 겉 모습으로는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의 중심을 확증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날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중히 여기다'의 뜻은 '날에 집중하고 주목하는 것'이다. 날에 집중하는 것과 집중하지 않는 것은 마음의 중심을 살펴야 옳은 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우리가 예배를 드려도 마음의 중심을 보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 처럼 판단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눈으로 보기에는 모두 옳아 보이나 중심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말과 같다. (롬14:5,6)
2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킨다?!
바울은 두가지 범주의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 종노릇하는 자와 유업을 얻을 자이다. 이들이 종노릇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에게 종노릇하는 것일까?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의 어원은 '사람뿐 아니라 사물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아니라 '것'으로 읽는다면 어떻게 이해될까? 히브리어는 이 단어를 '것(미)'으로 번역했다. 왜 유대인들은 이것을 사물로 이해한 것일까? 물론 이 단어도 사물과 사람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대체로 사물의 의미를 가진다.
만약 '하나님이 아닌 것들'로 이해하고 읽으면 좀 더 이 말씀이 이해하기 쉽게 다가온다. 이들이 종노릇한 것은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은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다. 하나님에 대한 것들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초등학문을 천박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이기 때문에 '빈약한'의 뜻을 '천박한'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다지 좋은 번역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 세상의 초등학문이고 하나님에 대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것에 사람들이 종노릇하고 있는데... 마치 하나님처럼 우상시되어 사람들을 종으로 삼고 본질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린 당시 상황과 지금을 잘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 있다. 구원을 얻기 위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면 이 사람은 옳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일까?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교회라는 기관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구가 오히려 섬김을 받을 때 그것의 종이되는 것이다. 어린 신앙일 때는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기관이나 관련된 사람에게 종노릇할 수 있다. 이처럼 그 때도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날과 달과 절기와 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 영광을 자신을 위해 쓰고, 그렇게 가르친다면 오히려 그런 자들의 종이 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 곧 하나님이 아닌 자들인 셈이다.
30절에 두 범주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이스마엘과 이삭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이방신의 날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정한 날들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의 초등학문도 토라로 시작한다. 토라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키느냐에 따라 이삭이 되기도 하고 이스마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확증할 필요가 있다. 예슈아 당시 많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안식일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어 본질에서 벗어났고 책망을 받았다. 분명 종은 유업을 받을 수 없다. 즉, 어린 아이 신앙은 죄를 이기지 못하고 불법을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토라의 종이 되는 것은 토라를 너무 열심히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교리, 관습, 전통)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토라를 가르치는 서기관들이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했던 것 처럼' 초등학문이란 사람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린 신앙을 말한다. 초등학문은 토라라고 하지만 사람의 전통을 의미한다. 즉,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어린 아이는 엄마가 말하는 대로만 할 뿐이다. 종도 명령만 따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군가가 말하는 대로 따르는 자가 아니라 장성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따르는 자를 원한다. 그것도 자유 의지로 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된 마음으로 온전한 순종, 본질을 따라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스마엘처럼 지키지 말고 이삭처럼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갈4:3-30)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믿음이 연약하여 날에 주목하든 주목하지 않든 자신의 마음이 옳은지는 스스로 마음을 확증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이다. 사실 날에 집중하기 보다 그 날을 주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안식일이라는 날에 집중하게 하는 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교회에 집중하는 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구분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교인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지 사람을 향하는지, 또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도구들을 향하는지 항상 마음을 정검해야 한다. 말씀의 본질은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자랄 때 깨닫게 된다. 어린 신앙은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럼에도 비판하지 말고 그를 세우실 하나님을 소망하라고 로마서는 말하고 있다. (롬14:1-7)
3 안식일에 어떠한 짐도 옮기지 말고 어떤 일도 하지 마라
여호와께서 안식일에 어떤 짐도 지지말고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오지 말며 뿐만 아니라, 집에서 짐을 가지고 나가거나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샤밧이 과연 여호와께 어떤 의미이길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심지어 쉬라고 해도 목이 곧아서 듣지 않고 여호와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책망하고 계시다. 결국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목이 곧아서, 교만해서 여호와의 가르침에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우린 이럴 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말이 말같지 않냐?" 우리가 서로의 말을 잘 듣지 않아도 무시받는다고 느끼는데 우린 하나님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렘17:21-23)
4 안식일이 예루살렘의 존재 이유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하는 것은 그 날에 일하지 않고 짐을 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과 그 주민들은 영원할 것이고 여호와의 성전도 온 열방으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안식일과 예루살렘과 성전은 어떤 연관성이 있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여호와의 거처인 성전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마땅히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예루살렘에 영원한 샬롬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식일과 예루살렘, 과연 그 관계는 무엇일까?(렘17:24-26)
5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지 않으면 불이 꺼지지 않는다.
심지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예루살렘 성에 불을 놓아 삼키게 할 것이며 그 불이 꺼지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예루살렘과 성전의 존재 목적과 조건이 안식일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안식일은 영원한 예루샬라임과 성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면 가장 먼저 '샤밧을 거룩하게 준행해야' 할 것이다.(렘17:27)
6 예슈아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셨는가?
예슈아께서 회당에서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때 18년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 있던(묶여 있던) 한 여인을 불러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하시며 손을 데시니,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때 회당장이 예슈아께서 안식일에 일한것을 보고 화를 냈다. 나머지 6일에 병을 고치거나 고침을 받을 것이지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과연 우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예슈아께서는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고 병을 고치시는 일을 하셨다. 그럼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은 일이 아니고 병을 고치는 것은 일인가? (병을 고쳤다기 보다는 축사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물(생명수)이므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수를 먹여 살리는 것과 같다. 말씀을 전하는 일도 생명을 살리는 일인데 그것은 괜찮고 축사로 살게하는 것은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안식일에 허용하는 일의 개념이 무엇이냐가 당시에 큰 문제였다.(눅13:10-14)
7 안식일에 합당한 일을 하셨다.
예슈아께서는 이들의 가식적인 면을 책망하셨다. 이웃을 자신의 가축만큼도 사랑하지 않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자신의 소나 양을 외양간에서 풀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여 살도록 한다. 하지만 그 일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심지어 아브라함의 딸이 18년 동안이나 사단에게 매여있었고 그 매임을 풀어주어 살게 했는데 그것이 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되겠는가! 예슈아의 변론을 듣고 이들은 망신을 당했고(부끄러워 했고) 온 무리는 예슈아께서 하시는 영광스러운 일로인해 기뻐하였다. 이처럼 안식일은 무조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영광스러운 일을 하는 날이다. 그리고 예슈아께서는 안식일에 해야 하는 영광스러운 일을 무엇인지 몸소 보이시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또한 안식일(샤밧)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지키는 것이다. 이처럼 모두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어떤 이들은 안식일이라는 날에 집중하지만 본질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샤밧의 의미를 모르고 오히려 준행자들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업을 얻는 자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날을 거룩하게 지킨다. 현상은 같은 듯하나 다르다. 그러나 결과는 크게 다르다. 종들은 결코 유업을 얻지 못한다.(눅13:15-17)
8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 vs 들어가지 못하는 자
일곱번째 날은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일곱번째 날은 여호와의 샤밧(안식일)이다. 동시에 어떤 자들은 여호와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경고하고 계시다. 이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복음을 받았으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약속을 받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다) 다윗의 글에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서 오늘은 예슈아의 초림의 때를 말하고 있다. 예슈아께서 오셨지만 (여호수아라고 번역했으나 어원은 예슈아가 맞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안식이 주어지진 않으셨다. 모든 원수가 발등상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의 때, 하나님의 안식의 나라가 임하는 때는 아직 우리에게 성취되지 않았다. 예수아께서 재림하셔서 통치하시는 천년 왕국이 안식의 나라이다. 6천년동안 세상 왕들이 다스렸다면 마지막 7천년째는 예슈아께서 아버지의 법도로 가르치실 때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안식의 나라이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도 물론 안식의 나라이다.
이로써 안식일은 안식의 나라, 천년 왕국, 하늘 예루샬라임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우리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전에 우리가 그분의 안식일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 결국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앞에서도 말씀하신 순종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순종이었다. 그러니 안식일은 안식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중요하며 영광스러운 가치를 가지고 있겠는가? 계시하지 않으셨을 때는 묻지 않으실 수 있으나 샤밧을 회복하기 원하시는 이 때에는 우리에게 순종을 물으실 수 있다! 물론 안식일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을 소망한다면 여호와의 안식일을 지키지는 당연하지 않을까?!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 두려운가? 그것은 자신의 거절감과 두려움을 다루어야지 쉬운 구원을 교리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구원은 그분의 권한 아래 있다. 그리고 안식일은 안식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중요한 표증의 날이다. 무슬림 사이에 살거나, 북한에 사는 성도들에게 안식일을 요구하실 수 없다고 해서 우리에게도 묻지 않으시겠는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히4:4-9).
9 구원받는 이가 적으니이까?
예슈아께서 각 도시마다 가르치시며 여행하실 때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주여 구원받는 자가 적습니까? 여기서 '적다'의 어원은 '거의 없는, 아주 적은'등의 뜻이다. 즉,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적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이 질문은 분명 예슈아의 가르침을 듣고 한 질문이다. '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서 하는 질문인 것이다. 이때 예슈아께서 좁은 문(어원은 곧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투쟁하고 전쟁하고, 싸우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기가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 있는가? 구원을 얻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고 애쓰고 힘써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투쟁하고 전쟁하고 싸우고 노력하는 것이 '힘쓰다'의 뜻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구하지만 얻을 수 없는 이유이다. 결국 애쓰고 힘써 노력하여 이기지 못한다면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쉬운 구원을 가르치는 사람은 성경과 완전히 다른, 방종케하는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지금까지 가르친 구원은 애굽에서 종으로부터의 출애굽을 말한다. 그러나 그 구원을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성취로 착각한 다면 그날에 가슴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유월절 출애굽 신앙에서 장막절 신앙으로 장성할 때 하나님의 장막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그것이 안식의 나라이다.(눅13:22-24)
10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
그날에 집주인이 문을 닫으면 어떤 사람들이 "주인이시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소서"라고 청할 것이고 예슈아께서는 이들을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이들은 제 시간에 오지 않았다. 문이 닫힌 후에야 왔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호와의 때를 알지 못했고 놓쳤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정해진 때를 살지 않았던 이들은 그날에 예슈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인 다섯 처녀들처럼 말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먹고 마셨던 그리고 가르침을 받았던 자들이다. 즉, 함께 성찬을 하고 말씀을 배웠던 교인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분명 말씀은 임재안에서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았던 자들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안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행악하는 자들은 예슈아의 거룩함에 들어갈 수 없다. 그분은 거룩하시니 부정한 자들은 분리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거룩하다'라는 말씀은 부정한 누구도 함께 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거룩함은 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악'은 '법적으로 불의함, 불법'등의 의미이다. 즉 불법한 자, 불순종하는 자들은 예슈아의 가르침을 받았을 지라도 그분을 모르는 자들이며 안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슈아의 가르침을 받을 지라도 결국 사람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분을 모르는 자이고 사람의 종인 것이다. 그것이 다른 것에 집중하여 본질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인 것이다. 어린 아이일 때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의 가르침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종된 자이다. 그러나 장성한 믿음이 되었을 때는 더이상 사람의 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젠 말씀의 본질로 돌아간다. 그러한 진정한 하나님의 종들에게 유업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눅13:25-27)
11 그날을 준비하자
그날에 하나님의 나라, 안식의 나라에 동서남북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한다. 먼저 된 자도 있고 나중된 자도 있다. 만약 나중된 자인데 그날에 맨 앞에 있는 영애를 얻게 된다면 얼마나 기쁘고 가슴뛰는 일이겠는가? 그날에 그곳에 있을 줄 알았던 자녀들이 그곳에 없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슬프겠는가? 그곳에 자신이 없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할 것이다. 그러니 그 날을 준비하자. 그러기 위해 안식의 날을 거룩히 지키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자. 그래서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고 유업을 얻자. 그리고 부모를 통해 배우는 자녀들을 위해 더욱 그렇게 하자. 그런 자가 가장 행복한 자이다.(눅13: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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