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시(舌詩)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로다.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안신처처로(安身處處牢):가는 곳마다 몸이 편하리라.
당(唐)나라가 망하자 천하는 불과 50여 년 만에 다섯 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혼란을 겪었는데 이 시기를 오대(五大)라 일컫는다.
이런 난세에서도 풍도(馮道)라는 정치가는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후덕(厚德)한 인품으로 후당 때부터 입신(立身)하기 시작해 오대에 이르는 왕조의 부침(浮沈)에도 아랑곳없이 높은 벼슬을 유지했다.
당(唐) 시대의 시(詩)를 모아 엮은 전당시(全唐詩)에는 풍도가 지은 ‘설시(舌詩)’라는 제목의 시가 (위와 같이)실려 있다.
풍도는 중국 역사에서 논쟁적인 인물이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서기까지 약 70년, '5대 10국'이라 불린 혼란기에 무려 다섯 왕조에서 열한 명 황제를 섬기며 고위 관리로 30년, 그중 재상으로 20여 년을 지낸 인물이 풍도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그의 양면을 기록했다. "풍도가 재상으로 다섯 왕조 여덟 성을 섬긴 일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가는 일과 매한가지다. 설사 그가 몇 가지 선한 일을 했다 한들 어찌 괜찮다 말하겠는가". 동시에 자치통감은 그가 행한 선한 일을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참모의 진심, 살아남은 자의 비밀은 냉엄한 시기에 관리로서 열한 명의 황제를 섬기기까지 풍도가 걸었던 길을 이야기한다. 풍도가 적을 만들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방법, 난세에도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오래 편안했던 비밀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말과 감정을 다스리는 태도이다. 풍도는 아버지의 젊은 부인을 간음하고 인육을 먹는 리더 유수광(당나라 노룡절도사, 연황제) 앞에서 결코 속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로 살아남았다. 유수광은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의 입을 막고 살을 발라냈다. 누구도 간언하지 못할 때 풍도가 나섰다. "관용의 마음으로 도량을 보여달라"는 한마디를 했다. 표정과 억양을 유지하면서 감탄사를 쓰지 않고, 속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는 풍도를 유수광은 차마 죽이지 못했다. 잠시 감옥에 가뒀다가 풀어줬다. 풍도의 태도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리더들은 그의 의견을 곧잘 받아들였다. 이런 처신으로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자리를 지켰다.
풍도는 상대의 그릇을 읽을 줄 알았다. 황제의 그릇을 살핀 뒤 바뀔 여지가 없다면 더는 강요하지 않고 물러났다. 한번은 잔혹한 황제 야율덕광이 "천하 백성은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무식했으나 중원의 문화만은 중시하던 야율덕광의 특성을 파악한 풍도는 "지금은 부처도 구할 수 없고 오직 황제만 구할 수 있다"고 답했다. 명예욕이 많은 야율덕광의 성향을 읽고 '당신은 부처와 같은 권능을 지녔다'고 말했다. 야율덕광은 즉시 약탈과 살상을 금했다. 권력 앞의 아첨 같아 보이지만, 많은 백성을 구한 처신이다.
http://www.kookje.co.kr/mobile/view.asp?gbn=v&code=0500&key=20170211.22012192259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47459
첫댓글 참고로 풍도 는 청렴했고 백성들에게 베풀며 그들의 삶을 안정시키는데 노력한 고위 관리로 평가된다고 하네요. 이 고사나 ‘설시’가 나온 역사적 배경을 잘못 이해하고 독해하면 연산군 처럼 내관들에게 풍도의 시를 적은 ‘신언패’ 를 차게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흥미있는 것은 거란을 중원으로 불러들여 연운 16주 사건으로 번지게 만든 후주의 ‘석경당’을 섬긴 이력도 알게 되었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
:)
불가에서 말한
아라한 경지에
오른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