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의 자연관으로 바라본 환경윤리
2023101237 철학과 정시우
오늘 날 이산화 탄소와 메탄, 프레온가스 등의 온실가스 과다배출과 계획적으로 소비를 유도하는 생산방식 이른바 ‘계획적 구식화’를 원인으로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는 지구의 기온이 증가하여 해수면 상승과 해양 산성화, 기후이상 등 환경문제를 일으킨다. 이러한 환경문제를 일으킨 지구온난화, 지구온난화를 가속화시킨 대상은 바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구의 기온 그래프를 봤을 때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인류 문명의 큰 변화인 근대 산업혁명 시기이기 때문이다.
근대 산업혁명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의 성장, 노동 계급 탄생을 낳았고 이러한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도 이어진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현대에 들어서서 심화되어 무한경쟁 사회 분위기를 형성했고, 이러한 사회가 가져다 준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가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기후이상을 감지한다든가, 기후 우울을 느낀다든가)을 줄 정도로 심각해졌다. 극적인 기후변화를 가져온 근대에 들어서서 시작된 역사적 흐름은 바로 근대 서양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대 서양의 철학을 살펴보자면, 일반적인 근대 서양의 사상은 물리적 실재가 질량과 운동으로 즉 기계적인 원인들로 완전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보는 기계론을 전제로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철학적 체계를 수립하였다. 이런 체계에 따라 세계는 인간의 이성 안에서만 파악되었고 인간-세계는 주체-객체 관계로 정립된다. 또한 이러한 합리주의와 다른 방향으로는 실험하고 관찰하는 경험의 결과(과학적 사실)를 중시한 경험주의가 생겼다. 경험주의도 마찬가지로 실험과 관찰을 행하는 인간은 지배자이고 실험과 관찰이 행해지는 자연은 피지배자로 생각했다. 이러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얻어진 과학적 사실을 점진적으로 구축하여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앞에서 말한 기후변화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근대 서양의 사상인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합리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이분법 사고에서부터 시작해 지배-피지배로 나누어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 인간이 세계의 축이며 궁극적인 목적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를 초래했다. 우리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서양 전통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도가의 생명관을 설명하고 서양 전통의 사고와 비교하여 우리는 앞으로 기후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 인지 서술하겠다.
도가에서 말하는 도는 천지 만물의 근원이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변화 법칙이다. 만물의 근원인 도는 만물의 존재와 생성 변화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는 세계를 유기적인 통일체로, 부쟁과 조화 원리로 묶는다. 즉 도가 사상의 중심은 생명이었으며, 생명의 작동을 본능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서양철학 사상의 기계론적 사고 방식은 생명체 심지어 인간을 일종의 기계(수동적인 존재)로 보았다. 그나마 인간만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는 맹목적인 프로그램이 되어진 생존 기계로 다른 생물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 단지 유전자를 재생산하고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여기서 의문을 갖게 된다. 생명체가 단지 기계와 같은, 수동적인 존재라면 진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위 생명체의 정의로는 설명할 수 없다.
도가에서의 생명체란 이렇다. 생명체는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질서를 이루고(자균) 자발적으로 변화한다(자화). 그러므로 진화는 생명체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운동과 변화를 통해 환경에 적용한 결과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가에서는 변화에 따르기에 막힘이 없으며 막힘이 없기에 변화에 대하여 역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선호한다. 이 유연하면서 동시에 활발함을 ‘유약’이라고 한다. 유약은 ‘열린 구조’로 설명할 수 있는데, 열린 구조는 자기 원인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외부와의 관계성을 통해서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 ‘생성관’ 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생물체에 적합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는 환경과 고립되어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립물의 상생.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에서 기인한다.” 고 한 거처럼 대립물은 본래에 있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 기인하여 동시적으로 생겨났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게다가 대립물이란 것은 고정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닌 시간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유약은 영원히 유약한 것이 될 수 없으며 시간의 변화 속에서 강대한 것으로 변할 수 있다. 즉 도가의 생성관에서는 그 어떤 보편의 원리도 상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실제라고 보았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는 도가 중심이고 유기적인 대생명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만물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원리는 세계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어서 선악이나 시비, 미추, 생사 등의 경계가 존재하는(갈등과 대립이 존재하는) 또 내가 문제삼은 인간과 자연의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기준의 문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세계를 위에서 말한 하나의 원리로 통일하는 것에 비롯된 이분법으로부터의 해방과 인간과 자연의 일치 강조는 오히려 자율성과 다양성을 확보해준다.
나는 환경문제가 이분법적인 사고,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연을 무분별하게 이용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당연히 자연을 아끼고 보존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현대로 들어서면서) 환경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지고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현대에 들어선 극단적인 자본주의는 원인과 결과가 강한 상호작용이 되어 순환(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원인이 되는)한다. 그 순환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자연을 더 무분별하게 이용하게 된다.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무분별하게 이용하는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아직 인간을 자연보다 우위에 두고 자본주의에 맹목적으로 따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에서 정당성을 부여한 행위들을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인지 모르고 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어떠한 이유이든 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고립된 세계가 아닌 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에너지를 예로 들어보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는 세계 안에서 일정하게 보존되는 것이 아니고, 에너지를 사용할 때마다 또는 시간에 따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유용하지 않은 에너지)인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무한한 자원을 제공하는 헌신적인 대상이 아니며, 나아가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어떤 것을 바라면 안 된다. 우리는 인간은 엄연히 자연에 속해 있다. 자연의 끊임없는 변화에 인간 또한 변화하고, 인간의 인위적인 변화에 자연 또한 인위적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기후변화와 기후위기를 대응하기 위해 인간과 자연의 일치, 즉 인간과 자연은 변화하는 원리로 통일된 유기체적 통일체(대생명체)이며 인간이 자연에 속해 있음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또 기후변화의 궁극적인 원인은 인간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당연하다고 느낀, 어쩌면 인간중심적인 습관이나 편견들로 인한 행위들이 너무나도 인간중심적인 행위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시작으로부터 인간중심적이었던 행위를 대체가능한 행위를 행함으로써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후위기는 전지구적인 문제로 나 혼자만이 혹은 개인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결코 아니다. 개인과 집단, 단체, 기업, 사회, 국가 모두가 기후변화에 인식하여 경각심을 가지고 행위의 변화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참고서적 : 노자 생명사상의 현대적 담론(김경수)
첫댓글 오늘날 서구의 환경론자는 서구의 편협한 인간중심주의가 환경파괴의 원인으로서 기후위기 등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생태주의자들은 조금 다르게 보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환경 위기에 대한 해결방안 모색과정에서 원인을 진단하다보니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꼭 틀렸다 옳다를 말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양철학이 서구의 편협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환경 보존과 개발을 이항대립시키는 것도 문제지만, 도가나 불교를 환경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다보면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가나 불교에서는 확장된 형태의 인간중심주의로 해석될만한 요소가 있습니다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더구나 개발, 산업화 등이 지연된 곳에서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에도 제국주의적인 이분법 논리가 적용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