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후 / 이승희
밤이 되면 집은 불을 밝혀 물속으로 돌아간다
비로소 물속에도 꽃이 피고
안과 밖이 서로를 붙들고 좋아서 혼절하는 중이다
나는 바깥을 견디지 않아도 좋았고
슬픔은 슬픔을 견디지 않아도 좋았고
세탁소 골목을 지나가는 몇의 물고기들이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황홀하고 아름다운 밤이
편의점 불빛 아래에서
천천히 흩어질 때
공원을 걷는 사람들
키 큰 나무들 가지와 가지 사이에
적당한 높이로 앉아 있다
똑똑 가지를 꺾어
없는 두 손을 만들고
없는 두 손을 오래 흔들고 있었다
마당에는 작약이 피었다
겹겹이 작약작약
작약이 피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잘 찾아올 수 있을 것인데
물은 고요하고
대문 앞 가로등이
작약의 낯을 보고 있다
오래 만지고 있다
물속을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같았다
ㅡ 계간 《열린시학》 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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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희 시인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7년 《시와 사람》 등단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9년 전봉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