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의 장의사(외 1편)
김박은경
차가운 이마를 간지럽히는 마른 잎사귀가
여기 또 저기 어쩌자고 아직까지 매달린 거야
나뭇가지들은 나를 들추고 보채고 애써 적시고
가능한 구멍마다 파고들어
어쩌다 나는
나무의 아이를 낳고 또 낳고
천 개의 접시를 들고 가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눈을 질끈 감고는
언젠가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의 장의사가 되겠어
이 집 저 집 혹시
밤새 별 일 없습니까
아이들은 얼마나 명랑한지
노인들은 어찌나 유쾌한지
우리는 무한한 이 세계에서 작은 맹세들을 지키며
저마다의 신을 향해 누더기 성전에서도 행복하겠네
향긋한 소나무 관은
부드러운 생물들로 뒤덮이고
단정한 못들은 녹아 달라붙겠지
아아, 오늘도 아무도 죽지 않았어
큰일이야 달콤한 한숨을 쉬면서
느릿느릿 연해지는 걸음으로
목곽의 동산에 물을 주겠지
수생목(水生木) 목극토(木克土)
토생금(土生金) 금극목(金克木)
끝없이 끝말잇기나 할까 싶어
늦은 아침으로 사과 한 알을 달게 먹고
아무렇게나 씨앗들을 던져두겠지
순식간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드높아
뿌리는 뿌리를 감싸 안고 한데 얽혀서
만일의 환난에도 두렵지 않다고
불에도 타지 않고 발굽에도 밟히지 않는
단단한 덩이들이 끝도 없이 차오른다고
누군가 그리워 안부를 물어 온다면
우썩우썩 자라는 가지들을 흔들며
나는 이렇게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럴 때면 작고 빛나는 것들이
하늘하늘 떨어지겠지
검은 열매를 먹던 새들도
맵차게 또 멀리 날아가겠지
심정의 세계
대칭의 세계가 허물어져
밤낮으로 밤이 된다면
모든 밤이 낮의 꿈이라면
스발바르제도,
빛이 사라지는 네 달과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네 달이며
이미 어두워 어둡다는 말이
무의미해지는 땅이라면
서둘러 얼어붙은 당신의
심정과 어울릴까
저장고 가득한 씨앗들이 기어이 풀려날 때
당신의 입으로 눈으로 손과 발과 둥근 몸 위로
붉고 흰 꽃들이 만발할까
늦은 유언이 향처럼 번질까
돌아올 거야
돌아올 거지
그러나 떠난 적 없는 나라의
돌무더기 속을 헤집는 자는 누구인가
녹슨 왕관을 쓴 자는 누구인가
누덕누덕 기운 걸인은 누구인가
다 잃고 떠도는 자는 누구인가
수백 수만 나의 얼굴들은 누구인가
무수한 저것들을 합하면 내가 될까
분간이 사라진 너와 나를 우리라고 불러도 될까
우리들을 나라고 나를 너라고 너를 다시 나라고 불러도 될까
너를 조르면 내가 아프고
너를 감추면 나를 들켜버리는
이 세계는 왜 이렇게 빛이 납니까,
어린 아이들은 자꾸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시집 『사람은 사랑의 기준』 202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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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은경 / 서울 출생. 2002년 《시와 반시》로 등단. 시집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사람은 사랑의 기준』. 산문집 『홀림증』 『비밀이 없으면 가난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