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오후의 정선은 얼추 열흘치 장작을 준비하는 등의
일찍 마친 하루일과로 느긋하기만 한데
소나무숲 속을 걸어 단임골의 나무꾼이 또 홀연히 나타난다.
서울간 꽃순이 아주머니는 이러저러 상구 돌아오지 않고
아무의 방해도 없는 호젓과 함께 겨울여행이나 하자 나선 길이다.
어두워질세라 서둘러 나간 밭에서 뚱딴지라 부르는 돼지감자 한 바구니 캐어
밤늦도록 깍아 그 맛을 음미하며 저녁을 대신하고
동이 트니 나무꾼과 나그네는 신발끈 졸라매어
강릉을 바라고 북평 집을 나선다.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게 생긴 소나무들이 교정에 가득하고
건물은 오밀조밀 아담한 성산초등학교 앞에 선다.
학교 맞은편에는 면사무소 건물이
시골동네의 관공서답게 동네의 규모보다 커보이고
몇 집 오르면 파출소가 있다.
파출소 앞뒤로는 오래전부터 길손의 미각을 자극하던
대구머리찜 식당들이 하나둘 아침준비들을 하고
이른아침의 성산은 대관령마루에서 내려오는 세찬 바람이
길손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새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의 성산은
강릉에서 한양길로 가기 전의 고속도로 시발점이라
오래 전 강릉에서 한양을 가기 위해 고속도로에 오르자면
이 곳 성산을 지나야 했으니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 요기를 하거나 쉬어가는 곳이였으나,
이제는 새 고속도로가 생겨 훌쩍 고개를 넘으니
그저 한적한 동네가 되었고
대관령옛길도 있는 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칠십년대 중반에 개통된 옛 영동고속도로는
대관령마루에 올라 작은 동네 강릉을 굽어보며
동해 검푸른 바다를 향해 구불구불 내려닫는 운치도 있었으나,
이천년대에 들어 새로이 여러 개의 터널을 뚫어
그저 밋밋하기만 한 새 고속도로를 만들고 나니
동해 검푸른 물결을 볼 사이도 없이
언제 내려 왔는지도 모르게 강릉에 도착한다.
그리하여 옛 영동고속도로는 잊혀져가는 곳이 되고 말았으니
그 옛날의 운치를 잊지 못 하는 길손들만이 간혹 지나다니고
대관령산신을 모시는 강릉사람들은
신성한 대관령에 불경스럽게도 터널을 뚫었기에
곧이어 루사를 비롯한 물난리를 만났다고 지금도 수근거린다.
성산을 지나 십분 쯤 오르면 아담한 대관령박물관에 이른다.
그리 많지 않은 유물이지만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특이한 유물로 삼십분 여 시간이 아깝지 않다.
이 박물관 오른쪽을 돌아드는 길로 대관령옛길이 시작된다.
그 옛날 강릉사람들의 한양나들이가 시작되던
대관령옛길...
너무나 험하기에 대굴대굴 굴렀다 하여 애시당초 대굴령이라 불러
오늘날에는 대관령이라 한다는데
한 겨울의 대관령옛길은 찾는 길손도 없어
고즈녁하기만 하고
울창한 송림 사이로 오르는 길은
밀려드는 솔향기로 코끝이 싸아하다.
이마에 땀이 돋을 즈음해서 나서는 작은 고갯길엔
원울이재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멀리 한양 땅에서 관직을 제수받아 대관령을 넘어온 관원이
이 고개에서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여 울었고
떠날 적에는 이 고개에 올라 정든 강릉 땅을 굽어보며
차마 떠나기 어려운 발걸음에 또 눈물을 뿌렸다는 곳이다.
이 작은 고개를 넘으면
여러 채의 민박가옥이 어수선한 작은 동네를 지나고
나무를 때는지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지막 민박집을 지나면
비로소 옛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오솔길이 나선다.
길은 작아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부족한 작은 오솔길이
눈녹아 수량도 풍부한 맑디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오르는 길도 그다지 가파르지 않아 연신 물소리도 들어가며
푸르른 소나무의 아름다운 자태도 놓칠세라 눈에 담는다.
얼마 전의 폭설로 소나무들은 가지도 부러지고 아예 어떤 나무는 뿌리채 뽑혔으나
이도 자연의 일부이니 치우라 할 일도 없다.
천년의 이끼가 가득한 바위로 가로막힌 곳에는
어김없이 작은 폭포가 그림같이 펼쳐지며
그 밑 작은 소 바닥은
모래알도 헬 수 있도록 맑고 푸른 물이 가득 하고
산천어도 노닌다 하나
깊이 숨었는지 보이지는 않는다.
오르는 오솔길에는 수북한 낙엽이 눈에 젖고 길손들의 발길에 해어져
바스락 소리도 없이 푹신하기만 하고
길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얼기설기 얽혀진 다래덩굴에
갈 길을 찾을 수 없다.
예까지 오르는 길에도 인적은 바이 없어
내가 산이 되고
물도 되고
바람이 된 듯...
한낮이 지나니 바람은 자고 날씨마저 푸근해지며
개울물도 돌돌돌 소리내어 옛이야기나 하자 부르는 듯 하여
몇 겁을 흘러내린 냇물에 씻겨 백설기같이 하얀 속살을 보이는
넓직한 반석에 등을 대고 누우니
물 위로 뻗은 푸른 솔가지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지나며
구름은 없어도 눈이라도 데려올 듯 바다 쪽으로는 해무가 자욱하다.
반석 밑으로는 천 년의 소리인 듯 물소리가 또랑또랑 들려오니
한 동안 물소리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래, 오늘은 영마루를 넘어 횡계에서 하룻밤을 묵고,
그래도 시간이 되면
월정사에서 묵을 예정이니 재촉할 일이야 있는가...
눈 속에 홀로 푸른 소나무를 바라보니
아등바등하던 지난 날들이 주마등같이 흘러간다.
결국은 바라던만큼의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 하고
지나온 세월이며,
결국은 내 인연이 되지 못 하여
애태우면서도 놓을 수 밖에 없던 인연들...
덧없고도 허랑하고나.
그래도 그 때에는 그 것이 최선이었다고 믿었으나
이제 보니 한 줄기 바람임을 알겠고
결국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음에 따른
상대적인 공허임을 이제는 알겠다.
이제라도 알고 난 이상은 더 이상 연연하지 말고
남은 인생은 자연으로의 귀의 밖에 더 할 일이 없음을...
어느 덧 발길은 옛 주막터에 닿는다.
사철 푸른 산죽 한 무리가 주막터 한 곁을 자리하고,
간혹 무너져내리는 돌담길을 따르니
옛날에는 여러 가호가 살아 주막을 경영하였음을 알겠다.
여름에는 흐드러지게 열린 오디로 길손의 호기심을 자아내던
뽕나무 여러 그루가 이제는 고목이 되어 여름을 기다리고
산수유와 함께 봄의 전령이라 불리우는 생강나무에는
벌써 앙증맞은 동그란 움이 터 있다.
신새벽에 강릉을 떠난 길손들이 허위허위 오르다
허기가 질 즈음해서 당도하는 곳이 이 주막터인지라
이 집 저 집 주막에서는 국밥올리는 김이 서리고
향기좋은 동동주로 산 중의 사람사는 세상이었을게다.
이제는 군데군데 평평한 집터하고도 개복숭 돌배나무들만이
사람이 심어 생명을 이어왔음을 알겠다.
주막터에 오래 앉았으려니 한기가 들어 다시 오르는 길은
조금씩 가팔라지고
어디선가 불쑥 봇짐을 진 나그네와 마주칠 것만 같은
온갖 나무가 울창한 오솔길을 한참을 오르니
강릉과 횡계의 중간지점인 반정을 만나고
그 곳에서부터는 옛 고속도로길로 올라선다.
간간히 앞서고 지나는 차량이 없다면 더욱 좋은 길이 되겠으나
예까지만도 그 옛날의 정취를 찾기에는 충분한 터...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한양길을 나선 신사임당도 이 고개에 이르러
강릉 땅을 돌아보고 시 한 수를 읊으니 지금도 전해진다.
늙으신 어머님 강릉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떠나는 마음
때때로 고개돌려 북평쪽 바라보니
흰구름 사이로 저녁산이 푸르구나...
이윽고 당도한 영마루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멀리 강릉 작은 동네가 옅은 안개로 아스라이 보인다.
풍력발전기 커다란 날개는 영마루의 세찬 바람에 쉼없이 돌아가고
채 녹지 않은 눈은 골짝을 덮었다.
해무와 함께 나즈막한 구름도 깔린 동해바다에는
점점이 작은 고깃배가 보일락말락하고
바다와 인접하면서도 장대한 산마루에는 숲이 우거져 사람의 발길이 어려우매
예로부터 신성한 곳임을 알겠다.
횡계를 바라고 내려서니 이미 한낮은 기울어
어스름은 영마루에서부터 나리는데
진부에 도착하여 정선으로의 행로가 수월하니 월정사는 후일로 하고
늦은 밤에 당도한 북평 집에서의 또 하루가 지나니
나무꾼은 새벽을 도와 또 다시 단임골로 올라
긴 여행의 자취는 이미 없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욕심이라면 지도를 곁들였으면 더욱 운치를 감상할듯...수고하셨습니다.
저도 아쉬운 일 중의 하나랍니다. 감사합니다.
대관령이 너무나 험하기에 대굴대굴 굴렀다 하여 애시당초 대굴령이라 불러 오늘날에는 대관령이라 한다는데, 그냥 훌쩍 넘기에는 그런 고개지요,
지금의 고속도로는 그저 편하기만...
대관령이라면 머루 포도주가 연상 되는데 맞는지 모르겠어요...ㅎㅎㅎ글을 좋아 하시고 많이 써 보신 분 같아요...나무 우거진 대관령 구경 잘 했습니다...
글은 취미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