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을 지날 때였나. 이십 대 초반의 패기는 사라지고 슬쩍 사회의 맛을 보고 애매해진 청춘의 시기를 보내던 그해 여름. 여전히 대학가 자취방에 살던 한 친구의 집은 자연스레 우리의 아지트가 됐다. 주말이면 네다섯 명이 모여 편의점 싸구려 와인을 왕창 사다 물컵에 콸콸 부어 마시며 느낌 있는 영화들을 틀어 놓고 별소리 다 지껄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본 투 비 블루>를 보고는 한동안 "재즈만이 음악이다!"라고 외치며 밤새 재즈를 들었고, <월 플라워>가 그린 위태로운 청춘의 모습에 각자의 사연을 꺼내 보기도 했으며,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을 본 날에는 당장 여행을 떠나자며 비행기 표를 주야장천 검색했다. 그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텅 빈 스크린에 비친 우리의 표정을 보면 왠지 씁쓸하고 민망해져 벌떡 일어나 자취방 앞 골목에서 한참 쭈그리고 앉아 새벽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들. "안 되겠다. 우리 뭐 사고라도 치자!" "나 그냥 퇴사한다? 호주가서 한 몇 년 살다 올까 봐." "내가 봤을 땐 우린 인생에 고난이 부족해. 그니까 폼이 안 나지." "인생 영화처럼 한 번쯤 살아 봐야 하는 거 아냐? 청춘이라면." 새벽에 골목에서 한참을 그러고 있는 모습은 비행 청소년이라 하기엔 낡았고, 어른이라 하기엔 너무 초짜인 그 어디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실행할 사람은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시 평일이 오면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갈 것도. 사고치고 싶다는 친구는 도서관으로 가 시험 준비를 하고, 퇴사할까 하던 친구는 착실하게 회사 다니며 자격증까지 따고, 고난이 부족하다던 친구는 대학원에 다니며 누구보다 안정을 꿈꿨다. 그리고 영화처럼 살아 보고 싶다던 나는 작은 회사에서 쉼 없이 작은 이야기들을 쓰며 간신히 먹고살았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이상했다. 심지어 사흘 내내 각자 집에도 가지 않고 함께 먹고 자며 붙어 있기도 했다. 세상 온갖 이야기를 다 떠들고도 무슨 이야기가 더 남았는지 밤을 새우며 수다 떨기 일쑤였다. 밤공기가 조금 쌀쌀해진 어느 밤, 누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올여름은 이제 끝! 앞으로 바빠져서 자주 오지 못할 거야." 그 말을 시작으로 하나둘 "너도? 나도!"를 외쳤다. 저마다 바쁜 일 끝내고 보자고, 늦으면 내년이 될지도 모른다고, 올여름을 그리워할 거라고 한마디씩 보태며 그 동네를 빠져나왔다. 요상한 아지트 모임의 마지막이었다.
시간은 흘러 30대가 됐다. 이상하게도 '청춘'의 순간을 떠올리면 그 여름밤들이 스쳐 지나간다. 대단히 멋진 무언가를 하지도 않고, 사고도 치지 않으며, 생산적이지도 않던 그 밤들. 어두운 방을 비추는 영화 불빛 속에서 방바닥에 내려놓고 마시던 와인들, 보라색 입술을 하고 끊임없이 떠들어 대던 얼굴들. 영화처럼 배경이 멋지지도, 고민이 심도 깊지도 않았으며, 기억할 대화도 하나 없었다. '내 청춘의 장면들은 별로 낭만적이지 않은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올랐다. 현대에는 낭만이 없다던 주인공은 과거의 파리로 건너가 동경하던 옛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들 또한 지금은 낭만이 없다며 과거를 선망하는 모습에 무언가 깨닫던 장면.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도 빗댈 수 있지 않을까. 보잘것없게 느껴지던 내 청춘의 장면이 갑자기 멋져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친구들은 지금 다들 각자 자리에서 밥벌이를 하며 조금은 어른이 됐다. 전화를 걸어 봤다. "그 여름 기억나지?" 한마디에 곧바로 웃음이 터진다. 우리 그때 뭐 한 걸까, 왜 매주 모여서 그러고 있었을까. 그러다 한 친구의 답에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때 난 뭘 해야 할지 몰랐는데 그냥 다들 같이 있어 줘서 좋았어." 내게 청춘의 순간들은 늘 누군가와 함께일 때였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불안할 때도 있었지만 모든 순간을 함께 지나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에 비로소 내 청춘의 장면이 완성됐다. 무엇을 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아도 그때의 우리 목소리는 향기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보다 어렸지만 더 단단하며 덜 성숙했던 목소리로. 매 순간 함께한 우리에게 그 시절은 말을 걸어온다. 우리 청춘의 명장면이었다고. 이나은 | 드라마 작가
2016년 웹 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으로 데뷔한 이나은 님은 <연애미수), 미니시리즈 <그 해 우리는) 등을 썼다. '자신에게 솔직한', '지금만 할 수 있는', '현재'의 이야기를 쓰려 한다. 때로 너무 작은 이야기를 쓰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지만, 사소한 것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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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소중한 멘트 감사드리며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하는
좋은 하루보내세요
~^^
반갑습니다
사랑천사 님 !
공유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하는 행복한
나날들보내세요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좋은 글 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무더위에 건강 조심 하시고
시원한 나날들 보내세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
고운 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희망과 설레임 가득
좋은 하루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