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31일 ‘발해 1300호’라고 이름 지어진 뗏목 하나가 한겨울의 동해를 향하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떠났다.
그 뗏목은 물푸레나무를 엮어 길이 15미터, 폭 5미터로 만들고 그 위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동이족의
영웅인 치웅천황이 그려진 돛을 달아 배모양을 갖추었다. 네 명의 젊은이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12월 초에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대장인 장철수가 뗏목을 제작하는 도중에 부상을 당해 20여일 정도가 지연됐다. 그는 결국 손에 깁스를 한 채로 떠났다. 동해의 겨울바다는 무서웠다. 몰아치는 북서풍은 파도를 일으키고, 바다를 사납게 헤매던 물결들은 뗏목을 사정없이 때리고, 위로 타 올랐다. 금방 돛줄이며
난간은 하얗게 얼음덩어리로 변해버리고 뗏목은 얼음배처럼 변해갔다.
대원들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돼야 정상이고, 조상들의 역경과 힘을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복원하려면 어쩌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잊혀진 나라, 잃어버린 역사인 발해를 이 시대에 복원하고 민족의 힘과 진정한 의지를 상실한 이 암울한 현실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뗏목 탐사를 시도했다.
1998년은 발해가 건국한 지 꼭 1300주년이 되는 해다. 발해는 우리의 역사였고, 발해의 땅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닌 우리 땅이었다.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였고 동북아 최대의 강국이었지만 못난 후손들을 둔 탓에 오랫동안 역사에서 버림받아 왔다. 최근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각각 자기 나라의 역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반해 우리의 연구 수준과 국민적 인식은 형편없다. 그러나 발해 1300호는 젊은이의 확신에 찬 도전과 적극적 의지로 발해의 역사를 당당히 복원시키려 한 것이다.
발해가 만주 일대는 물론 연해주 일부, 최근에는 하바로프스크 지역까지 통치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문화도 매우 뛰어났으며 무엇보다 해양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특히 고구려의 동해 항로를 계승하여
200년 동안 일본과 36회나 교섭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실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광대한 바다를 무대로 펼쳐진 발해인의 역사와 정신이건만 우리는 그것은 뒷전에 둔 채 중국과 일본의 문화만, 서구의 역사만을 배워온 것이다.
발해 1300호의 젊은이들은 발해가 우리 역사임을 우리와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발해가 지닌 21세기적 의미가 너무나 소중하고 절박했기에 그것을 몸으로, 생명으로 알리고자 했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가 그랬듯이 21세기에는 해양력을 바탕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민족적 현실을 모두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 모질고 길고 힘들었던 준비기간을 거쳐 발해호는 드디어 작년 12월 31일 옛 발해인들이 일본으로 출발했던 크라노스키노 근처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떠났다. 그들은 초인적인 의지로 겨울 바다의 추위와 폭풍우, 불안감과 외로움을 극복하며 동해를 종단했고, 마침내 16일째인 1월 15일에는 울릉도 근해까지 왔다.
겨울 바다에서의 항해는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발해호는 얼음으로 뒤덮였다. 폭풍우와 찬 바닷물로 인한
체감온도는 우리의 상상밖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들 가운데서 한겨울의 동해바다에 뗏목을 띄운 사람들은 그들뿐이기 때문이다.
1차 목표를 달성한 탐사대는 울릉도 근해에서 최종 목적지인 부산으로 향하다가 후포 근해에서 강한 서풍을 만나 17일부터는 계속 동진하였다. 사람들은 얼마나 안타까워 하였는지 모른다. 나도 그들과 계속 교신을 하면서 생각했다.
‘아, 얘들이 평소에 마음 먹은 대로 오키섬으로 가는구나’하고. 대장인 장철수나 선장인 이덕영 씨, 이용호와 임현규는 모두 현장에서 독도 문제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곳에 가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렇게 떠나간 지 며칠 후, 출발 24일째인 1월 23일 오후 4시 16분. 발해호는 드디어 일본 열도 오키 제도의
도고섬 8킬로미터 전방까지 접근했다. 오키 제도는 옛부터 신라나 울릉도 사람들이 건너가 정착했고, 지금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세력의 핵심 지역이다.
그들은 일본 해안보안청에 도움을 청했고, 저녁 8시 58분에 해안보안청의 배와 조우했다. 바람과 파도에
밀려 해변의 150미터 앞까지 접근한 발해호는 안정을 위해 닻을 내렸다. 그러나 날씨는 더욱 나빠졌다. 초속 23미터의 엄청난 강풍이 불고, 파도의 높이는 6미터나 됐다.
순시선 세 대와 헬기가 떠서 밤새 구조작업을 벌였지만 강풍과 눈보라 때문에 시계가 불량하고 헬기가 쉽게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헬기에서 구조대원을 내려보내려고 했으나 앞뒤 마스트 사이에 쳐진 안테나선 때문에 구조작업이 쉽지 않았다. 두 번의 작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헬기가 다시 세 번째로 날아왔을 때 그들의 뗏목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이때가 새벽 4시 30분을 전후한 시각이다.
발해호가 전복되는 순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인적인 항해를 성공시킨 그들은 안타깝게도 25일째인
1월 24일 미명(未明)에 모두 희생되었고, 뗏목은 부서지고 전복된 채로 바닷가에 얹혀버렸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위험한 일을 꼭 해야만 했었느냐고. 심지어는 비판을 하거나 비웃기까지 한다. 이미
고인이 된 그들은 답변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선배인 내가 대신 세상에 반문하고 싶다.
도대체 무엇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가?
역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힘을 바탕으로, 숱한 극한 상황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민족은 그야말로 개척과 탐험정신이 충만했다. 지구상의 최소한 6∼7개 방향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갖은 고난을 물리치며 전진해 온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 바로 지금 우리의 터전이다.
또 외부로 진출도 많이 했다. 고구려인들은 만주와 몽골의 일부까지 점령하고, 발해는 오늘날의 흑룡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네 나라는 험난한 바다를 건너 경쟁적으로 진출하여 오늘날의 일본을 이루었다. 때문에 우리 역사 속에는 적극적인 의지와 강한 힘이 가득 차 있으며, 그러한 에너지가 입력된 유전인자가 우리들의 혼과 피 속에 흐르고 있다.
그런데 이제 또 절망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우리는 한동안 너무 안이하게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생명을 바친 발해호의 탐사대원들처럼 진정한 용기를 갖고 위기를 극복할 때다.
나는 다시 세상에 묻는다.
우리 역사의 진실은 누가 밝히는가?
역사를 가벼이 여기고 민족적 열등감에 빠져 있는 이 나라에서 잃어버렸고 또 잊어버린 역사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때로는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역사의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닌가.
왜 한겨울인 12월 31일에 출발했느냐고 질책하고, 겨울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느냐며 무모하고 경솔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번 뗏목 탐험을 나선 경험자로서, 해양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로서 말하건대 출발 시기나 출발 장소는 문제가 없었으며, 그들은 고증에 충실했다. 설사 무모했다 하자. 하지만 진실을 찾기 위해 생명을 건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용기란 결국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해
보이는 행위다.
탐사대는 겨울 바다에서 뗏목을 타고 추위를 이겨내며 일본까지 항해해서 성공을 했다. 다만 최후에 희생당했을 뿐이다. 그들은 정말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갔다. 잊혀졌던 발해가 한층 더 가슴 깊이 다가왔고, 그들이 해양활동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가, 이현세의 만화가 더 재미있을 수는 있어도 이와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발해 1300호는 이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역사에 책임의식을 느끼고, 진실과 의미를 위해 생명을
거는 삶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뗏목을 타고 겨울의 일본해(?)를 건너온 그들의
시신을 보고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키섬 사람들마저 그토록 경외심을 가지고 지성으로 시신을 대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일본과 우리의 차이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기억하자.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우리 모두 이야기 하자. 그들의 의지를, 그들의 처절한 최후를, 새로 만들어진 우리의 역사를. 그리고 그들의 진정한 용기와 힘을 수혈받아 이 땅을 뒤덮고 있는 불안과 나약함, 위기 의식을 떨치고 다시 일어서자.
글·윤명철(동국대 사학과 교수, 탐험문화연구소장)
사진자료 발해 1300호 기념사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