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276)- 아직은 갈 때가 아니라고 여쭈라
금요일 밤부터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비가 그치자 공활한 가을하늘이 눈부시다. 추석을 앞둔 주말,
사촌들과 고향선영에 들러 잡초를 뽑았다. 집에서 나설 때는 큰비가 내렸는데 현장에 이르니 일하기에
좋은 날씨, 뽑고 또 뽑아도 잡초의 생명력은 질기다. 세상살이에 힘든 이들이여, 산야에 무성한 잡초처
럼 거친 세파에 주눅 들지 말고 힘차게 헤쳐 나가시라.
고향 가는 길에 큰형님을 찾아뵈었다. 미수(米壽, 88세)이신 형님이 반기며 오래된 자료를 펼쳐 보이는
중 색 바랜 종이에 적힌 글이 마음에 닿는다. 옮겨 적은 후에 돌려드리겠다며 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가겠다고 여쭈어라
회갑(回甲) 六十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지금 안 계신다고 여쭈어라
고희(古稀) 七十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이르다고 여쭈어라
희수(喜壽) 七十七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지금부터 老樂을 즐긴다고 여쭈어라
산수(傘壽) 八十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이래도 아직은 쓸모 있다고 여쭈어라
미수(米壽) 八十八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쌀밥을 더 먹고 가겠다고 여쭈어라
졸수(卒壽) 九十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서둘지 않아도 된다고 여쭈어라
백수(白壽) 九十九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때를 보아 스스로 가겠다고 여쭈어라
프로그램 활동에 열중인 천헤결원 어른들
이 글은 노년에 이르러도 인생은 아름답고 세상은 살 만하다는 표현의 다름 아닐 터. 이와는 달리 소중
한 수명을 앞당겨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지난 10일은 세계 자살예방의 날이다.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8년 연속 이어가고 있다. OECD 회원국 대부분에서 자살이 감소하는 추세인 반면, 우리
나라는 1990년대 이후 계속 증가해 인구 10만 명당 31.7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1년에 1만
5906명(2011년 기준), 약 30분에 한 명꼴로 자살하고 있다.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이 이처럼 허망하게 사
라지는 것이다.
자살 예방의 날을 맞아 보건복지부는 정부와 언론, 종교, 시민사회와 협력을 강화해 범사회적 자살 예
방 안전망을 짜기로 하는 한편 언론에서 자살 관련 보도를 자제하도록 '자살 보도 권고 기준'을 개정, 발
표했다. 복지부가 발표한 자살 보도 권고 기준은 ① 자살 보도 최소화 ②자살이라는 단어를 자제하고 선
정적 표현 피하기 ③자살 관련한 상세 내용은 최소화 ④유가족 등 자살자 주변 사람 배려 ⑤자살에 대한
미화나 합리화 피하기 ⑥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수단으로 자살 보도를 이용하지 않기 ⑦자살로 인한
부정적 결과 알리기 ⑧자살 예방에 대한 다양하고 정확한 정보 제공 ⑨인터넷에서의 자살 보도는 더욱
신중할 것 등을 담았다.
자살현장을 처음 목격한 것은 10대 전반의 어린 시절이었다. 나보다 서너 살 위의 친척이 마을 뒤 놀이
터의 소나무 밑에서 꿩 잡는데 쓰는 약을 먹고 쓰러진 모습이 지금도 눈에 밟힌다. 청년 시절에는 군대
복무중인 일등병이 부대로 배달되는 연애편지를 수시로 뜯어보는 부대선임을 총으로 쏴 죽인 혐의로 사
형판결을 받아 각계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형이 집행된 것을 비관한 어머니가 한강에 투신한 소식에 마
음이 아팠다. 공직에 있을 때는 파견 상태로 몇 달간 함께 일한 젊은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
식을 듣고 안타까워 한 적이 있다(똑똑한 청년이었는데 술을 마시면 이성을 잃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근년에 빈발하는 사회지도층 인사와 유명인 자살 중에는 가까이 아는 분도 들어 있어서 자살관련 이야
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얼마 전 지인의 권유로 자살 예방상담 교육을 받았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사무소에서 관내통장과
지역사회인사를 대상으로 자살예방을 위한 생명사랑 캠페인의 일환으로 서구 정신건강센터가 마련한
자리에 아내와 함께 참가한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고 예방대책이 절
실하다는 보도를 자주 접하였지만 세 시간여 전문가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하여 그 실상과 예방의 중요
성을 새삼스럽게 깨치게 되었다.
그때 적은 메모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알려진 연간 자살자는 15,000여명(실제로는 20% 정도의 알려지지 않은 숫자만큼 더 많다고
한다.), 자살충동을 느끼는 숫자는 그 40배인 60여만 명(전주시민 숫자만큼), 자살의 영향을 직접 받는
자는 충동자의 6배인 360여 만 명(부산시민 숫자만큼)이다.
자살예방을 위한 상담기법 중에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기술적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물어보
아야 한다.(* 정말 힘들어 보이네요, 혹시 죽고 싶은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며
공감하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도록. 폭력이나 따돌림에 시달리는 학생에게 '내가 애들에게 말하겠
다. 쓸데없이 신경 쓰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자살은 못난 아이들이나 하는 거야'는 식의 도식적인 선생
님의 설득이나 충고는 오히려 자살 충동을 유발할 수 있다.)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 상담의 기본으로 잘 관찰하고 열심히 듣고 진심을 담아 말하는 사례를 구체적으
로 기술한 '보고 듣고 말하기 역할극 대본'도 유익하였고.
예배를 마치고 요양원의 어른들을 돌아보던 중 82세의 할머니가 3층의 유리창 옆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라는 직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요양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분이어서 낯이 설다. 다리에
힘이 없어 걷기가 어렵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어른들의 힘들고 서글픈 심리를 헤아린다고 말
씀드리니 표정이 많이 누그러진다. 예방교육에서 터득한 내용의 실제사례가 주변에도 있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자살예방과 관련하여 전문가가 기고한 글을 살펴보자.
'최근에 연세대 의과대학의 한 교수가 '자살 및 위기 상황에 놓이면 언제든지 원하는 교수의 이메일이
나 24시간 가능한 연락처로 연락 주십시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라는 글을 강의실 뒤편에 붙
여 놓아 화제가 된 바 있다. 그 게시물에는 이 대학 병원 정신과학교실 소속 정교수 7명의 휴대전화 번호
와 이메일이 적혀 있었다. 진료와 수술로 바빠 명함에도 휴대전화 번호를 적지 않는 의대 교수들이 학과
모든 학생에게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다.
얼마 전 자살 예방 상담 교육을 받았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끈을 쥐어주게 하는 일
을 누군가가 해야 한다는 것을 체험한 기회였다. '공감하기→신뢰 쌓기→대안 제시' 방향으로 상담을 진
행하는 것이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죽고 싶은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살 충동과 살고
싶은 욕망이 뒤엉킨 상태에서 한순간 극단적 상황을 벗어나고 삶을 되찾으려고 한다. 자살 예방은 반짝
대책이 아니라 국민적인 지혜를 모아 지속적인 대책을 시급히 마련하고 또 실행해야 한다.'(조선일보
2013. 9. 10 최용, 이인(利人) 학교폭력방지연구소장의 글에서)
지난달 중순, 한강에서는 뇌물 비리와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던 전 국회의원의 시신이 발견됐다. 경찰
은 이 사건을 자살로 종결했다. 유서와 더불어, 인근 선착장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그의 신발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자살자들이 신발을 벗어놓는 것은 자신이 여기서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마지막 단서를
남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가족에게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죽음을 알리는 사례도 많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남기는 문자메시지가 생에 대한 미련과 살아남고 싶은 마지막 희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
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평소에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표현
을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입시와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소년 자살, 자녀뒷바라지와 생활고에 허덕이는 중년층 자살,
만성 질병과 고달픈 노후를 견디기 어려운 노년층 자살 등에서 앞자리를 차지한다는 소식이다. 국민행
복시대를 표방하는 정부나 아름다운 인생을 꿈꾸는 우리 모두 자살률 상위의 부끄러운 기록을 깨뜨리는
일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