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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이름으로
마태복음 1:18-2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대림절 넷째 주일이다. 오는 토요일은 12월 24일 성탄 전야이다. 저녁 8시에 고요한 밤 기도회로 모인다. 색동교회의 소중한 전통이다. 그날을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부른다. 이브는 ‘이브닝’, 곧 저녁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성탄은 저녁이란 어둠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어둠이 아직 깊은 전날 밤을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부른다. 성탄 전야는 여전히 캄캄하지만, 그런 어둠과 아픔 때문에 고요한 밤이 되었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자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성경에는 없다. 다만 성탄의 의미를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땅과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어둠이 가장 깊고 짙은 동지가 지나고 낮의 길이가 밤보다 길어지는 날, 성탄을 맞이 한다. 이렇듯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빛으로 오신다. 지금 가장 깊은 어둠을 의식한다면 내 삶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 내 삶의 짙은 그늘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빛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은총의 빛을 맞이하는 2022년 성탄이길 소망한다.
1)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기에 앞서, 그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다. 사람의 이름을 통해서 역사의 내력을 소개한다. 그리고 나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18).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가 동거 전에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요셉은 약혼자의 권리로 율법에 따라 마리아를 재판에 넘길 수도 있었다. 그것이 율법적 정의라면, 정의란 마리아에게 얼마나 가혹한 짓인가?
그런데 요셉은 정혼을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관계를 끊으려고 하였다. 마태복음은 그런 행위를 하려는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율법대로 하지 않은 그가 의롭다니, 무슨 의미일까?
누가복음에는 그 진상을 자세히 설명한다.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준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이를 가브리엘 천사의 유명한 ‘수태고지’라고 부른다.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으로 숱한 작품들을 남겼다.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20대 초에 수태고지 작품을 그려 무명이던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우리가 수요일마다 ‘누가가 그린 예수님’을 공부하는데, 역사적으로 화가들이 가장 많이 남긴 성화 작품이 바로 수태고지 장면이다. 왜 화가들은 이 장면을 주목했을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수태고지는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하여 아기 출생의 비밀을 말한 것이라면, 마태복음에서 수태고지는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 아기 출생의 진위에 대해 알려 준 것이다.
천사가 말해주는 태중의 아기에 대한 비밀은 이렇다.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된 것이고, 태중의 아기는 이미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바로 그 아기이며, 이 아기는 자기 백성을 구원할 메시야라는 것이다.
천사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 아기의 구원자로서의 운명에 대해 설명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23).
요셉은 주의 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그가 분부한 대로 실행에 옮겼다. 즉시 어머니와 태중의 아기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한 것이다. 약혼자 마리아를 데려와 아내로 삼았고, 아기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
복음서는 요셉의 행위를 의롭다고 평가한다. 여기에서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여 이해하는 ‘사랑의 계명’으로 해석한 것을 의미한다.
본문은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의 입을 통해 아기의 정체를 보여주고 있다.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이고, 또 임마누엘로 불린다는 것이다. 본문에는 메시야에 관한 두 가지 이름이 담겨있다. 구원자는 예수와 임마누엘 두 가지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먼저 ‘예수’라는 이름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1).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이다. ‘예’라는 발음에는 하나님의 의미가 담겨있다. 예수는 헬라어이며, 히브리어로 부르면 예수아, 긴 꼴은 여호수아이다.
시편에서는 오실 메시야를 이렇게 예언한다.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시 130:8).
바울은 로마서 머리글에서 자신이 전하는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한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며,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롬 1:3-4).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라는 이름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 그 자체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나의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2)
두 번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매우 역사적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선지자 이사야는 무려 700년 전에 이렇게 예언하였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마태복음은 이 예언이 무려 약 700여 년이 흘러 실현되었다고 전한다. 그 세월은 얼마나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을까? 시편은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을 이렇게 비유한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임마누엘은 성경 전체의 주제이다.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함께 한 인물들,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직접 계시라고 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쓴 책이라고 한다. 곳곳에 나타난 임마누엘은 성경의 비밀을 푸는 열쇠와 같다.
마태복음은 임마누엘로 시작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예수님의 탄생 비밀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개입이 담겨있다.
마태복음은 임마누엘로 끝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예수님이 마지막 하신 약속에도 임마누엘의 언약이 담겨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성탄 소식은 임마누엘 그 자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경은 누누이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 1:8).
임마누엘은 내게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관계하시듯, 나와 함께 하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나와 하나님과 관계 맺음, 그것이 믿음이다. 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또 의지하는가?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고백하며 노래하였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풍랑 속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바울과 또 배에 탄 사람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음성을 듣는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 27:24).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소식, 곧 임마누엘 안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 임마누엘에 대한 믿음으로 내게 용기와 희망을 주신다. 그것을 내 안에 모시며 사는 것이 임마누엘 신앙이다. 성탄은 한 마디로 이 세상에 임하신 임마누엘 사건이다.
3)
예수님이 두 가지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내 죄를 용서하시는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름으로 영원한 언약을 받았다.
예수라는 이름은 가장 위대한 이름이지만, 사실 그 이전에는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 아마 구약시대 영웅 여호수아 이름이 유명하니, 사내아이를 낳으면 으레 여호수아, 예수아, 예수라고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그 이름 앞에 나사렛이란 출신 지명을 붙였다.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치유하였고, 기적을 행하였다. 그 이름은 얼마나 귀한가?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 이름으로’하고, 세례를 베풀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다. 그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기도에 귀 기울이실 분으로 믿는다는 것이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세례받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그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름은 얼마나 소중한가? 구약성경에서 세키나 사상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로 향하시고 그가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길이 된다. 하나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면 하나님은 몸소 거기 계신다.
우리도 이름을 갖고 있다. 그 이름은 내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이고, 또 내 삶의 의미를 설명하는 이름일 것이다. 신앙적으로 설명하면 나는 본래 ‘죄인’이란 정체성을 지녔지만, 은혜로 ‘의인’, ‘하나님의 자녀’, ‘성도’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이러한 신분의 변화는 내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새 이름을 받은 자로서, 자신에게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게는 산 자로 살아감이 마땅하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사람이 살아가면서 꼭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다. 사람 구실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밥값, 나이값, 이름값을 평가 받는다. 밥값을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그냥 밥벌레라고 놀린다. 나이 값을 못하면 철이 안들었다느니, 나이를 거꾸러 먹는다느니 비아냥을 듣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값이다.
탈무드에서 좋은 이름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보배이고 가장 최상품의 기름보다 귀중하다고 한다.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 한국인들은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소중히 생각한다. 첫 번째 이름에는 부모의 소망이 담겨 있다. 또 하나의 이름은 무엇인가? 내게 주신 두 번째 이름은 무엇일까? 그 이름은 직분이나 직책일 수도 있고, 소명의 이름일 수도 있다.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은 그 이름값에 어울리며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매금으로 부르시지 않는다. 단지 일반화된 말로, 한 묶음으로 나를 부르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고유한 이름으로 나를 부르신다. 나를 한 사람의 존재로 만나주신다. 내게 이름을 주신 주님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을 맡기신다.
그 이름을 찾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라. 논어에서 공자는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하였다. 이 말은 그 이름(名)에 부합한 실제(實)가 있어야 그 이름이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새 책을 내고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들었다. 책 제목이 뭐 그리 평범하냐? 하긴 <십자가>, <십자가 사랑>, <십자가 순례>, <상징> 내가 봐도 참 심심한 제목이다.
그런데 모르는 구석이 있다. 가장 커다란 진리는 가장 평범한 언어에 담을 수밖에 없다. 십자가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어떤 언어의 기교를 부려봐야 유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부러 가장 평범한 제목을 붙였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공감하더라. 그 이름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무게감이 느껴질 것이다.
마침내 요셉은 예수라는 그 이름과 임마누엘이란 그 이름에 의지하여 결국 아기를 낳았다. 마리아와 요셉은 ‘구원자 되시는 그 이름’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이름을 믿음으로 결국 아기 예수를 낳았다. 그것이 성탄이다.
당장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산다면 새 힘과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나 자신의 변변한 삶에 낙심할 때에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내 삶의 혁명을 꿈꾸어 보자.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그 예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기를 기도하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예수 그리스도와 임마누엘, 그 이름이 내 삶에 위로와 회복과 풍성함과 소망과 평화를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