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걸 崔英傑(1893 ~ 1922)】
"북간도 훈춘한민회에 가입해 청산리대첩에 참여"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93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최걸(崔傑)이다. 훈춘한민회(琿春韓民會, 이하 한민회) 소속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한민회는 1919년 4월 북간도 훈춘현(琿春縣) 4도구(道溝)에서 설립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독립군단(獨立軍團) 설립 주도자 중의 한 명이자 성립 초기 군무부장에 선임된 최경천(崔慶天)의 조카다. 이때 한민회에 가담하여 소속 독립군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한민회는 훈춘 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독립군단이었다. 구성원들의 기반은 이동휘(李東輝) 계열의 기독교인들이었으며, 초대 회장은 이명순(李明淳)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윤동철(尹東喆)이 후임회장이 되면서 체제도 갖추어져, 부회장 장학년(張學年), 참사 최정국(崔正國), 군무부장 최경천을 비롯해 재무·경호·교육·체신 등의 부서장이 임명되었다.
한편, 한민회를 비롯해 1919년 만세운동을 전후해 서북간도에 설립된 많은 독립군단들은 체재가 갖추어지는 것과 동시에 소속 독립군들을 국내로 진입시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국내로 진입한 독립군 유격대들은 일제의 주재소·면사무소·금융기관 등을 공격해 파괴하고 이들 기관에 소속되어 한인들을 괴롭히는 일본인 관리와 친일파들을 처단하였다. 한국 독립군의 공격에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1920년 10월 약 20,000명의 일본군들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이 침략군의 목표는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친일의 무리만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이같은 침략을 사전에 탐지한 독립군들은 일시적 피전책(避戰策)을 택해 백두산록 서쪽 삼림으로 부대를 이동할 계획을 세워 이를 실행하였다. 한민회도 북간도의 여러 독립군단들과 연락을 취하며 백두산 서쪽을 향하였다. 1920년 10월 하순경 허룽현(和龍縣) 2도구 부근에 도착했을 때,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비롯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국민회군(國民會軍) 등 다른 독립군단들도 그 부근으로 이동해 왔다. 그런데 이동 중의 독립군들이 허룽현 2, 3도구 부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군 아즈마(東)지대가 이곳을 향해 공격해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이었다. 한민회군은 북간도에 근거지를 둔 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단(義軍團)·신민단(新民團) 등과 연합부대를 결성해 2도구 부근의 완루구(完樓溝)와 어랑촌(漁郞村)에서 10월 22, 23일 대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시기 한민회 소속 독립군으로 청산리대첩에 참가하였다.
청산리대첩 후 한민회군은 다른 독립군단들과 함께 북만주 미산(密山)을 거쳐 소련의 연해주로 갔다. 그리고 1921년 중반 경 한민회는 훈춘과 가까운 소련지역인 추풍(秋豊)과 송전관(松田關)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이곳에서 한민회 독립군들은 북간도에서 같이 활동하다 옮겨 온 국민회군(國民會軍)과 그 지역에 근거지를 갖고 있던 빨치산 한인부대 등을 연합해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을 조직하였다. 총사령관에는 이중집(李仲執), 부관에는 이응순(李應順) 등을 선임해 최고 지휘부를 구성하고, 그 아래 집행·무기·경호·통신·조사부 등을 편성하였다. 이들 부서중 무기부의 과장에 임명되었으며, 삼촌인 최경천은 조사부장을 맡았다.
그런데 정식편제에서는 무기과장을 맡았으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 신영칠(申永七)·한경서(韓京瑞)·진희준(陳希俊)·강석훈(姜錫勳)·최두철(崔斗哲) 등과 별도로 각각 하나씩 유격대를 편성해 그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지휘관이 이끄는 유격대는 송전관 주변의 연해주와 훈춘, 그리고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침략기관을 공격하는 활동을 빈번히 펼쳤다.
1921년 12월 하순 8명으로 유격대를 편성해 그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신영칠 유격대와 함께 국내진입 작전계획을 세웠다. 유격대는 함경북도 웅기(雄基)에 있는 일제의 경찰서와 금융기관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경찰서를 공격해 일제의 무력기관에 타격을 주고, 금융기관에서 군자금을 확보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격대는 1922년 1월 4일 두만강을 넘은 후 계획을 변경하였다. 훈춘의 사도구(四道溝)·호룡구(虎龍溝) 등을 거쳐 중국군의 감시망을 피해 험난한 지형을 골라 이동해 강폭이 좁은 지역을 선택해 국경을 넘었다. 그런데 도착한 지역은 웅기에서 거리가 꽤 떨어진 지역이었다. 일제의 국경수비대를 뚫고 도착지부터 웅기까지 이동하기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랐다.
따라서 유격대는 목표를 도착지에 바로 있는 일제의 신건주재소(新乾駐在所)와 신건수비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유격대는 1월 4일 밤 함경북도 경원군 동원면(東原面) 신건동(新乾洞)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월 5일 오전 1시 밤이 더욱 깊어지자 두 개 조의 유격대는 각기 주재소와 수비대를 한 개씩 맡아 동시에 기습 공격하였다. 주재소를 공격한 유격대는 일본인 순사 마쓰자키 야스타로(松崎安太郞)를 사살하고 주재소 건물과 숙사를 파괴시켰다. 다른 한 조의 유격대도 방심하고 있던 국경수비대를 공격해 크게 파괴시켰다. 이때 앞장서 작전 지휘를 하던 중 적탄을 맞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