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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천에 근무할 때 주위의 동기생들은 인천은 은행의 아오지탄광과도 같다고 하면서 너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고 했다.
왜냐하면 선배 책임자가 여러명 이곳에서 여러 원인으로 직장을 그만두거나 징계를 당하여 진급에서 누락되는 등 불이익을 당하여 다른 곳으로 떠났으며 실제로 주안에 근무할 당시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3명의 신임 대리가 발령을 받았는데 얼마가지 않아서 1명이 구속되고 1명은 징계를 받아서 먼곳으로 좌천하는 등의 불행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여 인정을 받았으며 우리 동기중 가장 먼저 차장에 승진하는 영예도 얻었다.
또한 나는 그 당시 딸이 2명이 있었는데 인천에서 우리의 귀중한 막내아들도 득남하는 기쁨을 누리게 됐으며 그 아들이 미국에 유학 가서 벌써 고등학교 3학년이 됐고 모범생으로 공부를 잘하여 명문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한다.
내가 제일 처음 인천에 갔던 1987년경에는 인천은 아직 개발이 덜된 낙후된 도시로서 한창 개발을 하려는 여명과도 같았다.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면 남동공단은 한창 공장을 짓기 시작하였고, 연수지구는 아직 터 닦기를 하는데 그쳐서 허허벌판에 염전만 곳곳에 산재해 있어서 나는 우리 아이들과 개울가에서 올챙이며 붕어를 잡아서 작은 어항에 넣고서 놀다가 동막골에 가서 조그마한 횟집에서 꽃게찜을(사실 아이들은 꽃게찜을 싫어함) 먹고 송도유원지에서 돼지갈비를 아이들에게 사주는 등 정말로 재미있는 생활을 했었다.
나는 그때 약 1년동안 화곡동 집에 거주하였는데 출퇴근시에는 김포공항에 가면 주안까지 운행하는 시외버스가 있어서 버스를 타고 1시간 가량 부천을 지나 인천에 도착하여 출퇴근을 하였으며, 얼마후 인천 구월동에 이사를 가게됐으며 그때부터 인천사람이 되어 차장 진급후 서울로 발령날 때까지 만 7년 이상을 인천에서 보냈다. 그때도 나는 인천을 떠나지 않으려고 집사람과 싸웠으나 교육을 강조한 집사람의 주장에 밀려서 서울 목동에 자리잡았다. 나는 지금도 인천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인천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 아들을 낳은 것 말고도 민주화바람을 타고 노태우정권시절인 6·10사태때 은행옆에 민정당 당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데모하던 학생을 경찰이 ?길래 은행의 지하 보일러실에 숨겨줬던 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가 도와주던 이원복 의원(현 한나라당 소속) 캠프에서 투표참관인으로서 밤새 개표관경을 지켜보았으나 2천여표차로 낙선돼 그 다음 날 밤새 운동원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일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며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추억이 됐다.
끝으로 나는 서울로 올라오면서 인천생활의 추억을 간직한 채 서울생활은 너무나 삭막하고 힘들었으며 은행대출과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는 등 아직도 지점장 임명을 받지못하고 어느덧 나이만 먹고 있는데 진정으로 바람이 있다면 인천 시민들의 도움으로 인천에 지점장 발령이 나서 근무할 수만 있다면 인천시민들의 손과 발이 되어 시민의 어려움을 함께 공유하면서 같이 생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아! 인천 그곳에 가고싶다. /이상용 국민은행서울 금천지점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