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은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라고 사념하라
저 병이 있는 보살은 응당 다시 이런 사념을 해야 합니다. ‘나의 이 병은 (인연이 화합하여 허깨비처럼 나타난 병 상태이지) 진실한 것도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이, 중생의 병도 진실한 것도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彼有疾菩薩,復應作是念,如我此病,非真非有,眾生病亦非真非有。
병이 있는 보살은 병이 나있을 때에 ‘응부작시념(應復作是念)’, 응당 다시 이런 사념을 해야 합니다. 중점은 이 ‘염(念)’자에 있습니다. 입으로 염불한다는 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염의 일종의 표현일 뿐입니다. 당신이 병이 났을 때에, 예컨대 머리가 아플 경우 당신은 아프지 않기를 바라고 편안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 감수(感受)를 당신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게 바로 ‘염’입니다. 당신이 감기가 들었다면 당신의 생각은 여전히 예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몸이 괴롭다는 것을 감각하는 것은 결코 생각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염입니다. 반드시 무엇이 염인지 또렷이 인식해야 합니다. 만약 염을 심리의 보통상태로 여긴다면 틀린 겁니다. 심리의 보통상태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제가 말을 하고 있고 여러분들은 듣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학 명칭으로는 망념(妄念)이라고 합니다. 망념은 수면위에 떠 있는 한 층의 기름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물이 유동하는 것은 표면의 한 층일 뿐, 깊은 층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표면에서 떠 움직이는 것은 망념입니다. ‘망(妄)’은 그것이 허망하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망념을 없앨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망념에 대하여 겸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예컨대 당신은 지금, 한편으로는 제가 말하는 것을 듣고 당신의 생각은 집중할 수 없으며, 한편으로는 또 많은 일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망념입니다. 그것은 멈추지 않기 때문에 ‘망(妄)’입니다.
그 진정한 염(念)은 당신이 없애지 못합니다. 예컨대 방금 말했듯이 당신이 병이 났을 때의 편안하지 않은 감각인 그 염두는 없애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여전히 망념입니다. 하지만 망념과 비교하면 그것은 염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염은 제6의식의 분별념(分別念)이요, 제6의식이 의식의 뿌리[根]인 제7의식에 접근한 것입니다. 염은 귀찮은 일입니다.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은 하는 말마다 염불해야 한다고 하는데, 왜 다들 염불을 해도 득력(得力)을 하지 못할까요? 모두 망념의 염이지 진정한 염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염불하는 정염(正念)이 일으키는 염은 아미타불 네 자의 부처님 명호조차도 없습니다. 마음 마음 생각 생각에 걸려 있는 것, 그것을 염이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빚을 졌다거나 혹은 채식을 하는 사람이 마늘 등의 매운 음식을 먹고 싶으면서도 먹기가 거북하여, 당신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지 말자고 한다면, 이 생각이 실재로는 마음에 걸려있는 것인데, 이게 바로 염입니다. 또 부처님을 배우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기는 명예도 바라지 않고 이익도 바라지 않다고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대부분은 여전히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 자신은 알지 못하는데, 그것을 염이라고 부릅니다.
37보리도품은 4념주(四念住)를 근본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4념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수지(修持)방법도 4념주를 근본으로 합니다. 4념주는 귀납하면 두 가지 것인데, 생리와 심리입니다. 몸의 감수가 고통스러움을 사념하는 것과, 마음의 생각이 무상한 것을 사념하는 것이고, 그 아래는 모두 해석으로서, 실제로는 몸과 마음이라는 두 가지 것을 사념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 두 가지 것을 합하면 바로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리를 닦으려면 이 일념(一念)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염(念)자를 해결했으니 이제 원래의 경문 구절로 돌아가겠습니다. ‘저 병이 있는 보살은 응당 다시 이런 사념을 해야 합니다[彼有疾菩薩, 應復作是念].’, 병이 나 있으면서 도를 닦는 사람은 마땅히 이 관념을 ‘새롭게[復]’ 해야 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이 났을 때에 몹시 고통스러울 경우 어떻게 이 관념을 새롭게 할까요? 이게 바로 절실한 공부입니다. 즉, 지난 번 언급했던 천왕 도오선사는 다른 사람에 의해 물속으로 던져졌지만 물속에서 여전히 떠올랐는데, 뒷날 죽음을 앞두고는 왜 또 아프다고 했을까요? 이 이면은 하나의 큰 문제이니 다들 이 부분에서 참구하기 바랍니다. 선종에는 이러한 전고(典故)가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조사들은 도를 깨닫기 전에는 정좌하고 있을 때 온갖 새가 꽃을 물고 날아와 공양했으며 천인이 음식을 보내주었습니다. 도를 깨닫고 난 뒤에는 이런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 생각대로라면 도를 깨닫는 것은 비교적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도를 깨달으면 도리어 그런 대신통이 없습니다.
천왕 도오선사는 임종 때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는 아프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아야! 아야! 라고 소리치는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 그대들은 잘 참구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병이 났을 때에 아픔을 감각하고 몹시 괴로울 때에 당신에게는 아프지 않고 괴롭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자기가 몹시 괴롭다고 ‘느끼는 그것’은 염(念)입니다! 괴로움에 있지 않고 병에 있지 않고 고통에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은 이 부분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비로소 불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여기에 한 학우가 있는데, 그는 줄곧 몸이 좋지 않고 병이 있다고 느껴왔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는 병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는 어느 곳에 병이 있을까요? 그의 생각에 병이 있습니다. 자기가 병이 있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말로 하면 심리적인 병입니다. 저는 그에게 병이 없다고 단정하지만 그더러 병원에 가서 건강검사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늘 의원에서 결과보고를 가지고 왔는데 아무 병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갖 것은 유심으로 지어진 것[一切唯心所造]입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공부는 바로 어떻게 이 염의 힘을 전환할 것인가에 있으며, 비로소 부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8만4천 법문은 바로 이 한 번에 있으며, 이것이 진정한 공부입니다.
그러므로 ‘저 병이 나 있는 보살은 응당 다시 이런 사념을 해야 합니다[彼有疾菩薩, 應復作是念]’, 병이 난 상태에서 수도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 관념을 새롭게 해야 하는데, 무슨 관념일까요? ‘나의 이 병은 진실한 것도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이, 중생의 병도 진실한 것도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如我此病, 非真非有, 衆生病亦非真非有].’ 이것은 감수 면의 문제입니다. 모두들 반야심경을 외울 줄 아는데, 맨 처음 부분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역부여시(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空即是色, 受想行識亦復如是).’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5음해탈(五陰解脫)입니다. 병이 나면 가장 고통스런 것은 수음(受陰)입니다. 이번 저의 감기의 경우 온 몸의 뼈마디가 모두 시큰거리고 꿈쩍만 해도 아팠습니다. 그런대로 괜찮아 저는 먼저 약으로 좀 폐를 보호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나이에 폐렴을 얻으면 틀림없이 못쓰게 되어버립니다. 비록 이렇더라도 이 온 몸의 고통은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수음(受陰)의 고통입니다. ‘수불이공, 공불이수, 수즉시공, 공즉시수(受不異空, 空不異受. 受即是空, 空即是受)’라고 관할 수 있다면 진정한 공부입니다. 이때에 상음(想陰)은 고통을 받지 않고 예전대로 작용을 일으켜서, 당신이 의사를 생각하고 약 먹을 것을 생각합니다. 그 고통의 감수는 수음에서의 것입니다. 즉, 이른바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苦受樂受]입니다. 병도 업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어떻게 해탈을 구하여 얻을까요? 염이 전환해야 합니다. 이것은 빈 이론이 아닙니다. 진실한 지혜의 관찰을 요구합니다. 이때에 당신은 무슨 주문을 염한다든지, 심지어 약사불의 사모님조차도 청하게 되는데, 아플 때에는 수음이 여전히 아픕니다.
그렇다면 어찌 불법은 영험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영험한 것입니다. 당신은 이때에 지관(止觀)의 관상(觀想)을 이용합니다. 어떻게 이 염의 감수를 전환할 것이냐가 유마경이 말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전환하라 할까요? ‘나의 이 병은 진실한 것도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이, 중생의 병도 진실한 것도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병고란 모두 감수 방면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한 시간 염불하고 나면 아주 청정하고 편안함을 느낀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수음 감각 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한 시간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여 탁한 기운을 소리쳐 내쫓고 번뇌도 소리쳐 물리쳤기에 힘이 없어져 몸이 청정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정함을 감수하는 것으로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많은 사람들이 임종에 이르렀을 때에 이 수음이 온통 고통 속에 있어서 부처님조차도 염하지 못합니다. 그런 모습을 제가 많이 보았습니다. 이때에는 무슨 공부가 없습니다. 당신이 평소에 정좌하여 염불하던 그 청정한 공부를 회복하려고 당신은 꿈꾸지 마십시오. 그 공부는 어디로 갔을까요? 공부는 병 속에 병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당신이 이 점을 또렷이 인식할 수 있다면, 성불할 수 있고 해탈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나의 이 병은 진실한 것도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如我此病, 非真非有]’라고 관해야 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병이 났을 때는 확실히 진짜입니다. 아픈 것은 어디까지나 아프고, 괴로운 것은 어디까지나 괴롭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그 병통은 ‘진실한 것도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非真非有].’ 당신은 자기의 심리를 관찰하여 이 감각에 호응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공부를 필요로 합니다. 완전히 병 속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 감수에 호응하지 않으면 그 감수는 서 있지 못합니다. 비록 서 있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병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한 번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원래대로 열이 높게 난다면, 당신은 이 수음의 감수를 떼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체온이 즉시 내려갑니다. 오늘날 의학 연구도 말하기를 병은 오직 30%이고 당신의 심리관념이 더해져서 100%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기의 이 병이 진짜가 아니라 4대가 임시 화합하여[假合]하여 조화를 이루지 못한 데서 온 것으로서, 공한 것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이것은 보살 경계를 말하고 있는데, 중생은 어떨까요? ‘중생의 병도 진실한 것도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衆生病亦非真非有]’, 모두 마찬가지로 평등합니다.
해탈 공부는 관(觀)을 짓는 데 있습니다. 자기의 심신의 상황이 한 생각에서 온 것임을 자세히 관찰해야 합니다. 이 한 생각이 해탈하면 병통도 줄어 가벼워집니다. 이것이 첫 번째 관을 짓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 관을 짓는 방법은, 만약 평소에 밀종이나 정토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경계를, 부처님의 경계를, 제6의식으로 관을 할 수 있으면 병의 고통이 줄어 가벼워지고 수음이 줄어 가벼워집니다. 그러므로 이 관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진정한 관찰이요, 하나는 관상을 하는 것입니다.
남회근 선생 유마경 강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