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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89회>
씬 1 왕건의 집 사랑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사람들은 심각하게 서로를 보고 있다.
왕건 다시 말해보게. 지금 뭐라고 하였는가? 바람의 전쟁? 남동풍?
태평 그렇사옵니다.
왕건 이 사람아 나는 선대로부터 바다에서만 살아 온 사람일세. 황해 바다에서 겨울에 어떻게 남동풍을 찾는단 말인가? 겨울에는 북서풍 밖에는 아니 불어.
태평 그렇사옵니다. 견훤왕은 우리가 바람을 안고 싸우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육지 쪽에 등을 대고 배수의 진을 친 것이옵니다.
왕건 그럴 것이야.....(한숨)
어찌한단 말인가?
태평 손자는 병법에서 말하기를 아군이 적군보다 세가 불리할 경우 절대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하였사옵니다.
왕식렴 그렇다면, 이번 전쟁을 포기 하자는 것이오?
태평 적어도 방법을 찾기 전에는 함부로 전함과 군대를 움직여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유금필 허허, 그게 말이나 되오?
주군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지금 나주에서는 우리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소이다.
능산 작전이란, 그러나 중요한 것입 니다. 태평군사의 말이 일리는 있사옵니다. 대책 없이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박술희 .......
왕건 어찌되었거나 현지 사정이 하나같이 우리에게 불리하구먼. 그렇다면 어쩌면 좋겠는가?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씬 2 동 집 안채 방
두 유씨는 심각하게 앉아 있고, 오씨는 나주로 갈
차비를 하느라 부산하다.
유씨 이야기가 길어지시는 모양일세.
오씨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전선에 모든 것이 불리하다고 하옵니다.
수인 (바쁜 오씨 보며) 어찌되었든 작은 형님께서는 서방님을 따라 가신다하니 참으로 기쁘시겠사옵니다?
오씨 기쁘다마다.... 설마하니 서방님께서 이렇게 챙겨주실 줄은 몰랐네 그려. 얼마만에 가는 친정인지 모르겠네.
수인 ........(질투 같은).......?
유씨 부럽네. 아무튼 잘 다녀오게나.
수인 다음에 충주 쪽에 전투가 벌어 지면, 아마도 이 아우 차례가 되겠사옵니다, 형님? 아니 그렇사옵니까?
유씨 이치대로라면 그렇게 되겠지.
오씨 호호호, 이 사람아 충주 쪽에는 이미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가? 자네는 아마 영영 이 철원에서 살게 될게야.
수인 예? 아니, 형님?
유씨 왜들 이러는가? 농담도 지나치면 섭섭해지는 법이야. 아무튼 준비 단단히 하게. 그곳은 전쟁터야. 놀러 가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오씨 염려 놓으시오소서. 그 옛날에 서방님과 함께 나주 일대를 누볐던 저이옵니다. 저는 답답한 집안 보다는 전장터가 좋사옵니다.
수인 세상에.... 정말로 전장터가 좋습니까?
오씨 그렇다니까 그러네.
자네도 한 번 해보게. 말을 타고 검을 차고 달려보란 말일세. 그 즐거움이 상상을 초월한다네. 호호호....
두여인 ...........(벙찐 표정)
씬 3 다시 동집 사랑
회의가 계속되고 있다.
모두의 표정이 어둡다.
능산이 도리질을 한다.
능산 말도 아니되는 소리오.
남동풍이라니? 그것이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리오? 혹시 또 모르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공명이 여기에 있다면 그런 바람을 빌려 올 수 있을까?
박술희 그렇지요. 제갈공명은 동남풍을 빌려다가 적벽대전에서 수십만 조조군을 잿더미로 만들었지요.
왕신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옵니까?
태평 하늘이 도와만준다면 어찌 불가능하다고만 할 수 있겠사옵니까?
왕건 (그런 태평을 크게 눈을 떠본다)...?
왕식렴 (묘하게 태평을 본다)
태평군사께서는 뭔가 한가닥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씀을 하시옵니다? 그런 것이옵니까?
태평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간절하게 한 번 하늘에 빌어보자 하는 것이옵니다.
왕신 (실망한 듯) 어허, 그것이야말로 너무나 막연한 말씀이 아니오이까?
왕건 자, 자..... 어찌되었든 우리는 황제폐하의 영을 받았네.
모두들 ........
왕건 일단 출병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태평군사와 능산 아우는 이 식렴 아우와 함께 군사들을 점고하게나.
그들 예, 주군.
왕건 그리고, 금필아우와 술희아우는 병부의 영대로 떠나도록 하게.
그들 예, 주군. (사이) 언제 또 뵈 올지 모르겠사옵니다?
왕건 그대들이 좋은 장수가 되기 위하여 더 넓은 곳으로 경험을 쌓으러 가는 것일세.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야. 잘들 다녀오게.
그들 주군께서도 몸조심 하시오소서.
왕건 음.... 잘들 해보세.
자, 들 가세. 나는 안채에 좀 들어가봐야겠네.
왕건이 일어선다.
그들 모두 일어서서 왕건
에게 예를 올린다.
왕건의 뒤를 왕신이 따라 잡는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씬 4 동 집 마당
장수장과 가병들이 집안을 경계하고 있다.
그 앞에는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군졸들과 마필
들이 문 앞에 보인다.
씬 5 다시 동집 안채
세 여인이 함께 해 있다. 그 옆으로 왕신과 장수장이 함께 서있다. 오씨는 이미 출발 차림이다.
왕건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나는 이번에 전선으로 갑니다. 나주 부인께서는 여러가지로 이 사람을 도울 일이 많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유씨 알고 있사옵니다, 서방님.
오씨 .........(미소) 아우가 온 지 그리 오래 안되었는데 나만 서방님을 뫼시고 가서 섭섭하겠네 그려.
수인 위엄한 전장터로 가시는 두 분이시옵니다. 어찌 섭섭할 리가 있겠사옵니까?
왕건 이번 전쟁은 지금까지 이 사람이 겪은 어느 전투보다도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렇게들 아시고 (유씨에게) 부인이 집안 단속을 잘 좀 해주시기를 바라오.
유씨 염려 놓으시오소서. 부디 몸조심하시고 꼭 개선하시오소서, 서방님.
왕건 고맙소이다. (수인에게) 부인도 집안 일을 잘 좀 배우고 신경을 써주시구료.
수인 예, 서방님.
왕건 그리고, 우리가 전장터에 있는 동안 신이 아우가 집안 일을 맡아서 하게 될 것이오.
그 점도 명심해두시구료.
왕신 형님들이 아니 계시는 동안 제가 이 집안과 형수님들을 뫼셔 올리겠사옵니다. 모두들 마음 놓으시오소서.
왕건 자, 그럼 (오씨에게) 가십시다.
그들 나간다. 유씨와 수인, 왕신들이 배웅하러 따라
나간다. 디졸브되면....
씬 6 저자 거리
매서운 찬바람이 소리내며 불어져 가고 있다.
그 추위 속으로 왕건이 군사들을 이끌고 가고 있다.
태평, 능산, 왕식렴, 배현경, 홍유, 김락, 염상, 천부장 들이 뒤를 따른다.
그 한켠에 오씨도 시녀와 함께 따르고 있다.
수많은 인파들이 그들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광치나 유천궁을 비롯한 장자1,2와 박지윤 부자, 그리고 복지겸과
강장자도 지켜보고 있다. 왕건들이 막 성문을 빠져
나가고 있다.
복지겸 (우울하게 보며) 이번 전선은 참으로 어렵다고 하옵니다.
유천궁 나도 들었소이다. 적의 군세가 만만치 않다면서요?
박지윤 견훤왕까지 나와있다고 하니 보지 않아도 알만하오이다. 잘 되어야 할 터인데....
장자1 그래도 왕장군이 가고 있지 않소이까? 왕장군은 백전백승의 장군이올시다. 지켜보아야지요.
장자2 암요, 아 지금 누굴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렵고 급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전공을 올렸습니까?
그 일각에서 강장자도 고개를 끄떡이며 보고 있다.
아지태가 그 옆에서 입전, 신방, 임춘길들과 함께 역시 보고 있다. 이들은 추운 듯 몸을 사리며 보고 있다.
아지태 허, 이 많은 신료들과 백성들을 보시오소서, 장자어른.
역시 왕장군이 한 번 움직였다 하면 참으로 대단하오이다.
강장자 글세올시다. 이번에는 모두들 힘든 전쟁이라고 하는데 과연 어찌 되려는지...? 두고봐야지요.
아지태 그래도 폐하께서 신임하시는 왕장군이올시다. 뭔가 해내겠지요.
강장자 사람들이 자꾸 그러니까 왕장군이 폐하의 위엄에 흠집을 내는 것이올시다. 아 군인이라면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오이까?
아지태 그렇고 말고요. 나도 그 점이 실은 늘 걱정이었소이다.
왕장군은 늘 자신의 분수보다도 더 높게 평가를 받고 있어요.
강장자 허허허, 이거 오랜만에 아학사 께서 옳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려.
아지태 천만의 말씀이올습니다. 그렇지않아도 기회를 봐서 차 한잔 모시려고 하였는데 언제 한 번 시간을 주시오소서.
강장자 허허허, 고맙소이다. 그리 하십시다, 아학사.
사람들의 환호성이 계속 되고 있다. 왕건의 모습은 이미 멀리 성 밖으로 나가고 있다.
씬 7 황궁 외경
엄청난 바람이 주변을 쓸어 가고 있다. 그 바람 소리...
씬 8 동 대전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궁예가 그 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를 듣고 있다가
혀를 찬다. 소주를 마신다.
궁예 최응아, 밖이 아주 추운 모양이다. 저 바람소리 좀 들어보거라.
최응 예, 폐하.
궁예 신료들이 모두 왕장군을 배웅 하러 나갔다지?
최응 그리 들었사옵니다, 폐하.
궁예 이 추위에 바다로 싸우러 떠나 간다니 안쓰럽구나. 그래도 역시 왕장군이 아니냐? 언제 어디서든 급한 일이 생기면 그 아우가 나가서 불을 끈단 말이야. 좋은 아우인데....
최응 ........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
온다.
대전내관 (E) 폐하, 내원께서 입시이옵 니다.
궁예 내원이? 들라하여라.
잠시 후 종간이 들어와
예를 올리고 앉는다.
궁예 어쩐 일이오, 내원께서?
종간 요 며칠 적조하신 것 같아 찾아뵈었사옵니다.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
궁예 그래요? 자 차나 한 잔 드시면서 얘기하십시다.
궁예는 최응이 바쳐준
찻 물에 차를 넣어 뚜껑을 닫으며 다시 묻는다.
궁예 뭐 무슨 일이라도.....
종간 그런 것은 아니옵고, 여러가지 국사에 관한 문제를 말씀드리러 왔사옵니다.
궁예 말씀하세요.
종간 왕장군은 이곳 철원을 떠나 일단 송악에서 잠시 군사를 정비한 후에 나주로 향한다고 하옵니다.
궁예 (차를 따라주며) 그렇겠지요. 전함들이 다 그곳에 있지 않소 이까?
종간 그렇사옵니다. 그런데로 바깥에 중요한 일은 왕장군이 다 처리를 해주고 있고, 국내의 일은 폐하께서 영을 내리시고 신과 아학사가 처리를 맡아오고 있사옵니다.
궁예 그렇지요. 자, 차 드세요.
종간 예, (마시며) 하오나 폐하 요즘 들어 신료들이 이동하는 상황을 보니 적지않이 우려되는 것이 많아서.....
궁예 무엇이 말이오?
종간 신료들을 움직이는 소임은 아학사가 하고 있사옵니다.
궁예 그런데?
종간 곳곳에 청주인이 아니 들어간 곳이 없사옵니다. 요즘따라 부쩍 그런 모습들이 노골적으로 밖으로 들어 나고 있사옵니다.
군을 움직이는 병부는 물론이고 법을 맡고 있는 의형대도 그렇고 세금을 관장하는 부서에도 온통 새로 자리를 잡은 청주인들 투성이옵니다.
궁예 ........(마시던 소주 놓으며 찡그린다)
종간 나라의 벼슬자리는 어느 한 집안이나 지역으로 편중되어서는 아니되옵니다. 특히나 아학사는.....
궁예 (말을 막으며) 아, 아... 이보 시오 내원.
종간 예, 폐하.
궁예 (한숨) 그러고 보면 결국 내원도 아학사와 다를 게 없어요. 언제였던가? 아학사가 내게 온 적이 있었소이다. 와서는 북벌 준비를 잘 해야 하는데 자신의 위엄이 서지를 않는다는 게야. 그래서 내게 그 위엄을 집행할 어검을 달라고 한 적이 있었어.
종간 예?
궁예 그때 내가 좀 나무래서 보냈소 이다. 혼자서 다 하려면 아무 것도 아니된다고 말이오. 그렇게 혼은 냈지만 나는 한편 으로 아학사가 하는 일을 은근히 도와주고 있소이다, 왜? 기를 너무 많이 꺾어 놓으면 눈치보느라고 일을 못하거든. 아니 그렇소이까, 내원?
종간 하오나 폐하,
궁예 어쨌든 아학사는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오. 뭐 크게 믿을 바는 못되지만 말이오.
종간 (그 말에) 그리 생각하시옵니까?
궁예 아학사 뿐만 아니오. 누굴 믿겠소이까? 내가 챙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돌아가는 게 없소이다. 왕건이라면 또 모를까.....
종간 하오나 폐하, 아학사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도 아니되겠지만 왕건장군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지금 왕장군은 분에 넘치는 폐하의 은혜와 신료들의 존경을 받고 있사옵니다. 차제에 단속하시고 경계하지 않으신다면 나라를 위해 걱정거리가 될 것이옵니다.
최응 ........
종간 굽어살피시오소서, 폐하. 그 누구도 폐하의 위엄을 넘어 서서는 아니되옵니다. 지금 왕장군과 아지태가 그 정도를 넘으려고 하고 있사옵니다.
궁예 ........(사이)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종간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속할 방안을 강구하셔야 하옵니다. 지금 나라가 어렵사옵니다. 이럴 때일수록 폐하의 위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요소들을 정리하고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셔야 하옵니다.
궁예 (한참 생각하다가) 나는 늘 나를 염려해 주는 내원의 그 정성이 고맙소이다. 헌데 말이오, 앞을 살피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나를 위해서 뛰고 있는 내원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종간 폐하.......?
궁예 걱정거리를 사서 만든단 말이오. 그래도 왕건아우는 나주로 떠나기 전 내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소이다. 내원과 상의하라고 말이오. 내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쉬어야 한다고 말이오.
최응 ..........
종간 왕장군이...... 왕장군이, 그렇게 말을 했사옵니까?
궁예 그렇소이다. 그런데도 내원은 왕장군을 자꾸 폄하시키고 있어요. 이러니까 조정이 될 리가 있나? 이러니까..... (머리를 저으며) 내원의 정성을 잘 압니다. 아닌 말로 누가 이 조정에서 내원만 하겠소이까?
허지만 주변도 좀 보시구료. 아학사도 그냥 좀 놓아두시오. 내원이 이래서야 아학사가 어찌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소이까? 내원 할 일만 하시라 이말이오. 아시겠소이까?
종간 (답답하다) 페하, 말씀드렸사옵니다만은 지금은 너무도 어려운 시극이옵니다. 이럴 때일수록 인사가 만사이옵니다.
사람을 잘 못 쓰신다면 밑에서 부터 뿌리 채 흔들리는 것이 정치이옵니다.
궁예 허허, 그만 하자고 하지 않았 소이까?
종간 폐하.......
씬 9 동 황후 전
연화가 상념에 잠겨 있다. 백씨와 슬이가 보고 있다.
백씨 (놀라며) 세상에.... 왕건장군이 다녀갔다고 하셨사옵니까, 마마?
연화 예, 어머님.
백씨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니 어쩌시려고 왕장군을 여기까지 오게 하셨사옵니까? 어찌 하시려고요? 세상에....
연화 사람들의 눈을 피했으니 그건 염려할 바가 못 됩니다.
백씨 그래도 그렇지요 마마....
연화 내가 실망스러운 것은 왕장군도 결국 변했다는 것입니다. (한숨) 아무에게도 기댈 데가 없습니다.
백씨 언제는 뭐 왕씨 집안이 우리한테 신의를 지킨 적이 있습니까?
연화 그래도 이 급박한 현실을 의논할 곳이 왕장군 말고 어디 있습니까?
백씨 급박하다니요? 마마께서는 늘 불안해하고 초조해하시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급하다는 것이옵니까?
연화 내가 황후라고는 하나 폐하의 용안을 뵌 지가 언제인지 모릅 니다. 무슨 의식이 있을 때마다 장식용으로 끌려 다닐 뿐 우리는 오래전부터 남남입니다.
슬이 황후마마 고정하시오소서. 어찌 그런 말씀을.......
연화 사실이 아니냐? 발작이 나실 때마다 사람이 죽어 나가거나 일이 터지는 이 마당이니라. 우리라고 영원히 무사할 줄 아느냐? 그건 잘 못된 생각이니라. 지금부터 방법을 찾지 않으면 우리도 무사하지 못해.
저 어리고 불쌍한 태자들 그리고 우리 집안 모두.....
백씨 아이고.... 이거 누가 듣겠사옵니다. 그만 좀 하시어요, 마마...
연화 (눈물) 그래도.... 그래도 왕장군이 그렇게까지 무정할 줄은 몰랐는데 결국 그렇게 그 사람도 변하였구나. 앞으로 어이할꼬... 우리 태자들은 어떻게 될꼬....
백씨 왜 자꾸 태자마마들을 걱정하시옵니까? 뭐가 어때서요?
연화 우리 태자들이 어떻게 사시는지 아십니까? 태자들은 보위를 이을 황실의 적자가 아니라 이미 스님이 다 되었습니다.
백씨 마마....
연화 그나마 이 에미 조차 태자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게 한답니다. 늘 그래서 제조상궁이 가서 어찌 있나 보고 오곤 하지요.
이것이 사람 사는 것입니까?
씬 10 동궁(태자궁) 복도
제조상궁이 반쯤 열려진
문안으로 두 태자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승려 한 사람이 두 태자
(8살 정도)에게 선을 강의하고 있다.
승려 태자마마, 일찍이 폐하께오서는 미륵으로써 이 땅에 내려오셨사옵니다. 세상을 구하고 인간을 구하고 모든 우주를 극락정토로 만드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옵 니다. 아시옵니까?
두태자 예,
승려 폐하께오서는 일찍이 세달사에서 득도하시었는데 참선에 든 지 십여년만이옵니다. 그때 스스로 미륵이심을 아신 것이옵니다.
두태자 예,
승려 지금까지 두 분 태자마마께서는 모든 불법의 이치와 불경에 대하여 배우셨사옵니다. 자, 태자마마 아직도 폐하께오서 아버님이라고 생각하시옵니까?
두태자 아니옵니다, 스님.
승려 하오면 누구시옵니까?
두태자 대 미륵부처님이시옵니다.
승려 잘 하셨사옵니다. 참으로 영명 하신 태자마마님들이시옵니다. 허허허. 그래도 가끔 어머님이신 황후마마를 아버님이신 폐하를 뵙고 싶지 않으신지요?
청광 뵙고 싶사옵니다. 어머님이 뵙고 싶사옵니다.
승려 폐하께서는요?
신광 보고 싶지 않사옵니다.
저도 어머님이 뵙고 싶사옵니다.
승려 하하하, 혈연간에 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올습니다. 하오나 그 마음을 끊으셔야 하옵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뵙는 시간이 있지 않사옵니까? 자, 다시 입정하겠사옵니다. 눈들 감으시오서소.
승려가 눈을 감고 참선에 드는데, 청광이 훌쩍이며 운다.
청광 어마마마가 보고 싶사옵니다. 그래도 어마마마가 보고 싶사옵니다. 스님.....
승려 허허, 입정에 드시오소서, 태자마마. 입정에 드시어야 하옵니다, 마마.
청광 어마마마가 보고 싶사옵니다, 스님....
제조상궁이 그렇게 보고
있다가, 안타까운 듯 도리질하며 눈물을 훔친다.
그런 표정에서 디졸브....
씬 11 대전 외경
대전 쪽에 문이 활짝 열려있다. 방안에서 궁예가 밖을 보고 있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씬 12 동 방 안
그렇게 궁예가 밖을 보고 있다. 최응이 추운 듯 웅크리며 옆에 붙어 있다.
온통 바람소리가 극성이다.
최응 폐하, 너무 날씨가 차옵니다. 그만 문을 닫으시오소서.
궁예 오늘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몸에 열이 나는 구나.
최응 ........
궁예 지금쯤 왕장군이 송악에 도착을 했을까?
최응 아마도 한나절은 더 걸려야 할 것이옵니다.
궁예 아까 내원이 한 얘기를 들었느냐?
최응 예, 폐하.
궁예 너는 지난 번에 아학사가 한 이야기도 들었다. 네가 황제라면 어찌 생각하느냐?
최응 오늘 내원께 하신 말씀이 아주 적법하다 사료되옵니다.
궁예 뭐가?
최응 대학에서 이르기를 ‘군자는 혼자일 때 신중히 처신한다’ 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는 만인의 어버이시옵니다. 신중하지 아니하시고 어느 한쪽에 기우신다면 나라 전체가 기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
궁예 허허허, 도대체 너는 언제 그렇게 많은 글을 읽었느냐?
최응 황공하옵니다, 폐하.
궁예 그래 너는 아무리 보아도 성인 같구나. 더욱 더 많은 책을 읽거라. 세상 모든 진리가 책 으로부터 나오느니라.
최응 예, 폐하. 마음에 새기겠사옵니다.
궁예 우리 내원과 아학사가 화합하면 얼마나 좋을꼬...
거기다 왕건아우까지 힘을 합치면 이 나라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잘 뻗어갈 것인데.....
그것이 안되니....
씬 13 아지태 집 외경(밤)
씬 14 동 집 사랑
아지태가 입전, 신방, 임춘길을 비롯해 무려 십여명의 손님들과 앉아 있다.
(입전, 신방, 임춘길등
평복으로)
아지태 오늘따라 이 집안이 좁아 보이네 그려. 허허허...
임춘길 나으리께서 돌봐주신 조정의 중신들이옵니다. 모처럼 날도 춥고 하여 뜨끈한 약주 한 잔 내리신다하기에 함께들 왔사옵 니다.
아지태 잘들 하였네. 정말 날이 추워.
입전 그렇사옵니다, 나으리.
아지태 지난 번에도 내가 맡고 있는 내봉성에서 우리 청주인들을 대거 발탁해서 올렸네. 헌데 폐하께서 아무런 말씀도 아니하시고 모두 재가를 해주셨지.
신방 알고 있사옵니다, 나으리.
아지태 그만큼 나 아지태를 신임하시는 것이야. 이럴 수록 우리 청주인들이 하나로 뭉치고 잘들 해야 할터인데 말이야.
임춘길 그리 하고 있사옵니다, 염려 놓으시오소서.
아지태 사실 패서인들에 비하면 우리 청주의 세력은 참으로 약하이. 상당한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조정에 절반은 패서인들이야.
입전 그건 그렇사옵니다, 나으리.
아지태 그리고, 그들의 정신적 지주는 지금쯤 송악에 도착했을 왕건 장군이고....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부족해. 저 무서운 단결력 말이야.
임춘길 그렇사옵니다, 나으리.
아지태 이 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폐하 밑에 내원과 내군이 있기 때문 이야. 그들의 힘과 영향력은 막강해서 그 조직이 침투하지 않은 곳이 없어. 우리도 속히 그 발판을 마련해야 할 것일세.
모두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아지태 이 세상은 힘이 없으면 죽는 것이야. 비참하게 차이고 버림 받고 신음하다가 죽는 것이지. 그렇게 안되려면은 뭉치고 힘을 길러야 해. 그래서 오늘 청주 출신들을 좀 보자고 한 것이야. 알겠는가 들?
모두들 예.....
아지태 자, 많이들 마시게. 머지 않아 나는 폐하께 이 조정에 새로운 개혁을 주청 해 올릴 것일세. 그때 되면 우리 청주인들도 내군과 내원에 들어갈 수 있고 병부에서 지금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있을 것이야. 그렇게 되자면 모두 자신들의 힘을 갈고 닦아야 할 것이야.
모두들 예......
아지태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좋은 세상에 대한 구상이 지금 내 머리 속에 다 섰어. 그대들은 잘 따라만 주면 될 것이야. 자, 드세. 모두들 들어.
모두들 예........
씬 15 정주 포구/ 인서트
수많은 전함들이 바다에
떠있다. 많은 군사들이
이동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포구 곳곳에 불빛들이 휘황하다.
아직도 바람 소리는 여전하다.
씬 16 그 포구 일각
어둠 속에서 두 필의 말이 지나쳐 온다. 보면 그들은 왕건과 오씨이다.
바람 소리는 여기서도 극성이다.
오씨 서방님, 날씨가 몹시 험하옵니다.
왕건 그러게 말이오. 우리가 철원을 떠나올 때부터 내내 이랬소이다.
오씨 바람이 불고 이렇게 날이 찬데, 과연 무사히 뱃길을 뜨시겠사옵니까?
왕건 겨울이니까 바람이 있고, 또 겨울이니까 추운 것이 아니오이까? 하긴 요 이삼일은 좀 더 한 것 같기는 하오이다만은...
오씨 (먼 바다를 한참 보다가) 서방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이번 전쟁이 상당히 어렵다고 하셨습니다만은....
왕건 사실이오. 도무지 한치 앞이 안 보이는 그런 전쟁이오.
오씨 하오나 이렇게 정주까지 오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어차피 전함들이 저렇게 대기해 있고 또 군사들도 출전준비를 마쳤사옵니다. 뭔가 지시를 내리셔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왕건 지금 형편이 그렇지가 못하게 되었소이다.
오씨 예?
왕건 최악의 상태올시다. 아무리 둘러봐도 길이 보이지가 않아요.
오씨 그럼 전혀 계획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왕건 그렇소이다. 도무지 길이 보이 지가 않아요.
씬 17 포구 군영
수많은 군막들이 펄럭이며 서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치고 있다. 그 중 어느
군막으로 다가가면.
씬 18 동 군막 안
아무도 말이 없다.
상석인 왕건의 자리는 비어있고, 그 좌우로 태평, 능산, 왕식렴, 홍유, 배현경,
김락, 염상, 천부장 들이 앉아 있다. 모두들 분위기가 무겁다.
배현경 듣자하니 백제국의 견훤왕이 세운 해안 진이 너무도 완고하고 굳세어 밀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홍유 군사도 우리보다 갑절이 많고 우리와 싸울 전함들 또한 배가 많다고 하였는데 사실이오이까?
능산 사실이올시다. 병부에서 건네준 보고와 나주에서 전한 장계를 받아 보니 그렇게 되어 있소 이다.
김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주는 사실상 포위된 것이 아니오이까?
왕식렴 그렇다고 보아야 합니다.
염상 어찌되었든 우리는 싸우기 위해 출전을 했사옵니다.
정주에 이렇게 머물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나주로 배를 띄워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태평 물론 그렇소이다만은 지금은 날씨까지 좋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것이오.
배현경 총사께서는 대체 어디 계시는 게요? 출발할 때부터 아무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태평 아마도 밖에서 많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줄로 압니다.
홍유 예전에 총사시라면 이렇게 아니하셨습니다. 전선에 관한 설명을 충분히 해주셨고 또 명쾌한 전략을 세워 주셨소이다.
왕식렴 지금으로써는 그렇게 아니되어 있습니다. 바른대로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한동안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배현경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나주가 저들에게 포위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냥 보고만 있다니요? 왜요?
능산 말씀드렸지만 아직도 확실한 전략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보다도 훨씬 강한 저들을 뚫고 들어갈 전략 말입니다.
모두들 .........(웅성거린다)
홍유 전략이 없는 전쟁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소이까?
왕식렴 모든 것은 이번 전쟁을 책임 진 왕총사님께서 영을 내리실 것입니다. 아무튼 두고 보시지요.
그러나, 장수들은 웅성거리며 고개를 갸웃한다.
카메라 태평의 굳은 표정으로 다가가면서 디졸브....
씬 19 그 포구 바닷가
해일이 높게 일고 있다.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바람 소리와 함께 파도가 높이 치솟고 부서지기를 반복한다. 마치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릴 듯한 바람이다.
씬 20 왕건의 군막 외경
씬 21 동 군막 안
왕건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홀로 서성거리며 밖의 바람소리를 듣다가는 다시 한숨을 쉬며 지형도를 본다. 거기에는 백제의 지형도와 마찬가지로 백제군의 전함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영산강 일대와
금성산성 일대에 백제군의 공격군이 표시되어 있다. 왕건이 고심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휘봉으로 짚어 보고 있다. 화살표가 백제군 앞까지 그려져 있다.
그림으로 보아서는 왕건의 배들이 육지로 들어가는 쪽에 모두 견훤왕의 배들로 막히게 된다. 왕건이 도리질을 한다. 그때 태평의 소리가 들려온다.
태평 (E) 계시옵니까, 주군?
왕건 들어오시게.
태평이 들어와 예를 올리다 말고 왕건과 그 지형도를 바라본다.
태평 뭐 좋은 방안을 찾아내시었사옵니까?
왕건 아무리 머리를 짜도 묘안이 없네 그려. (지형도 가리키며) 적은 화공을 준비하고 있어, 이것 보게. 자네 말 그대로이야. 우리는 이렇게 통과해서 나주와 접선하고 그 연합 병력을 운영 해야 하네. 허나 바람이 이렇게 밖으로 불고 있어.
태평 그렇사옵니다. 바로 그 북서풍이옵니다. 바람이 바다 쪽으로 불고 있기 때문에 저들이 불화살을 날리면 아군의 배는 순식간에 모두 잿더미가 될 것이옵니다. (방향을 가리켜 보인다)
왕건 속이 타네.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낸 나이지만, 이번 경우는 참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들어가자니 나주가 절단이 나겠고, 무리해서 밀고 가자니 승산이 없고. 어찌하면 좋겠는가?
태평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의논에 의논을 거듭하였사옵니다.
왕건 좋은 의견이 있었는가?
태평 그렇다면 지금껏 아무 말이 없었겠사옵니까?
왕건 (한숨) 어떻게 한다? 도대체 어떻게.....
왕건은 군막 안을 맴돌며 계속 중얼거린다.
왕건 나주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태평 당분간은 별 일이 없을 것이옵 니다.
왕건 어째서?
태평 견훤왕은 지금 주군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저들이 섣불리 나주로 공격해 들어간다면 지금의 병력이 분산 될 것이고 앞뒤로 저항에 부딪치게 되옵니다.
그러기보다는 먼저 주군을 유인하여 끌어 들여서 화공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힌 다음 여유를 갖고 천천히 나주를 도모하려는 생각 같사옵니다.
왕건 나도 그렇게 보고 있네. 그런데 우리는 저들의 작전을 알면서도 그것을 돌파할 묘안이 없어. 방법이라고는 오직 하나 뿐이 아닌가? 바람이 있어야해, 북서풍이 아니라 그 반대로 불어야 하는 남동풍 말일세.
태평 그렇사옵니다, 주군.
왕건 헌데, 이보게 태평이.
태평 예, 주군.
왕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그 제갈 공명은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해서 바람을 빌려 왔을꼬? 어떻게 사람이 신의 힘을 빌려 바람을 빌릴 수 있단 말인가?
태평 ......(미소)
왕건 아니 그런가?
태평 허나, 그런 일이 분명히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사옵니까?
왕건 그러게 말일세. 도대체 어떻게 그리 하였을까? 신풍이라.... 정말 하늘의 신이 그 바람을 빌려 주었을까?
태평 글세올습니다. 문제는 정말로 하늘이 바람을 주었는지 아니 주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갈공명이 그 바람을 찾아냈다는 것이옵니다. 사람들은 그 바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지 못하였으나 제갈공명은 그것을 보았고 가져왔다는 것이옵니다.
왕건 무슨 소린가 그것이?
태평 소인도 제갈공명처럼 한 번 그 신풍을 빌어보려고 하옵니다.
왕건 뭐라? 태평이 그대가 말인가? 그것이..... 찾아 지겠는가?
태평 소인도 아직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그러나, 그 이치는 알 것 같사옵니다.
왕건 이치를 알아? 어떻게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바람을 빌려 올 수 있단 말인가? (반갑다) 이 사람아 그렇다면 일말의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태평 육도삼략을 연구하고 또 손자병법을 연구해온 소인이옵니다. 하오나 천문에 대해서는 아직 무지하기 짝이 없사옵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시오소서.
왕건 얼마나?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가?
태평 나흘만 주시오소서.
왕건 나흘? 정말로 그 나흘 안에 남동풍을 빌려올 수가 있겠는가?
태평 남동풍을 빌린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다. 제갈공명의 이치를 확인해보려는 것이옵니다.
왕건 나흘이라, 나흘이라....
간절하게 태평을 보는 왕건의 표정에서.......
바람은 모든 것을 날려 버릴 듯 더욱 극악스럽게 불고 있다. 그 바람소리.......
씬 22 정주 포구 외경
삭풍이 그렇게 포구와 바다를 휩쓸어 가고 있다.
그 엄청난 바람과 파도가 서서히 수그러들면서...... 길게 디졸브.......
씬 23 정주 포구(아침)
평온한 아침이다.
갈매기 떼가 수없이 하늘을 덮고 있다. 금빛 바다로
어선들이 줄지어 나가는 것이 평화로워 보인다.
그 한켠에서 태평이 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그는 넋 잃은 듯 먼 수평선을 바라본다. 고기를 잡기보다는 그는 그렇게 바다만 보고 있다. 그러다가 태평은
놀란 듯 한쪽을 본다.
멀리 전함들에서 펄럭이는 깃발들이 그대로 멈추고 서있다. 바람이 없는 것이다.
씬 24 그 포구 군영
많은 배들이 정박되어
있고, 군사들은 한가롭다. 이곳에서도 햇살은 눈부시다.
씬 25 동 어느 군막 안
능산과 왕식렴이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있다.
그 한쪽에서는 김락과 천부장, 배현경, 홍유, 염상이 술을 마시고 있다.
홍유 허허, 이거 원.... 진중에서 전투도 아니하고 술을 마셔보기는 처음인 것 같소이다.
배현경 허허, 총사께서 허락하신 일이올시다.
김락 거 참 이상하지 않소이까? 여기서 꼭 나흘을 있다 간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일까요?
홍유 우리가 알겠소이까? 다만 총사 께서는 무슨 생각이 있는 듯 하셨소이다. 그저 기다려 볼 수 밖에요. 허....한쪽에서는 바둑 두고 또 한쪽에서는 술을 마시고 밖의 날씨도 아주 그럴 듯 합디다. 그렇게 며칠 춥고 바람이 불더니 .....아주 따뜻하고 구름 한 점 없소이다.
씬 26 왕건의 군영
왕건이 차를 마시고 있다. 오씨가 보고 있다.
오씨 오늘은 종일 날씨가 아주 따뜻 하옵니다.
왕건 그러게 말이오. 그렇게 극성이 더니 허허허...
오씨 아무리 보아도 이번 전쟁은 참으로 이상하옵니다.
왕건 이상할 것 없소이다. 그나저나 부인.
오씨 예, 서방님.
왕건 우리는 이틀 후면 여기서 출항을 하여 막바로 바닷길로 내려가 백제군과 접전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오씨 그렇사옵니까?
왕건 순탄한 길이라면 부인과 함께 가려고 했는데, 그렇지 않을 것 같소이다.
오씨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왕건 이번 전쟁은 짧고도 격렬한 전쟁이 될 것이오. 그리고, 피아간의 희생이 아주 클 것이오. 부인은 작은 배를 타고 돌아서 나주로 가도록 하시오. 그런 샛길은 열려 있고 안전하다고 들었소이다. 그렇게 하시구료.
오씨 서방님. 소첩은 서방님을 따라 나주전투를 훌륭하게 치루어 냈사옵니다. 무엇이 못 미더워 보내려 하시옵니까?
왕건 이번 만은 내 말대로 하시구료. 상상외로 위험하고도 큰 대 전투가 될 것이오.
오씨 모든 것이 하나같이 의문 투성 이옵니다. 소첩에게도 좀 알려 주시면 아니되옵니까?
왕건 그리 큰 비밀도 아니올시다. 우리는 지금 그 옛날 제갈공명이 불렀던 남동풍을 찾고 있소이다. 그것을 찾는 데로 여길 떠날 것이외다.
오씨 어떻게 바람을 빌려 올 수가 있사옵니까?
왕건 더 이상 묻지 마시오.
아무튼 이곳을 먼저 떠나도록 하시오. 준비해 놓았소이다, 어서요.
오씨 서방님.....
왕건 먼저 가셔서 하실 일이 많을 것이오. 서두르시오, 부인?
오씨 ......?
씬 27 그 포구(석양)
여전히 태평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물결은 잔잔하고 석양이 지고 있다.
바다가 그림처럼 석양에
물들고 있다.
태평이 끄떡이며 미소를
짓고 있다. 하늘을 보고 또 바다를 보고 끄떡인다.
뭔가를 본 것이다.
전함에서 보이던 그 깃발들이 반대로 펄럭이고 있다.
그는 날씨의 변화를 알아 챈 것이다. 그의 표정에서 희열이 넘친다.
씬 28 황궁 외경(밤)
궁예 (E)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게야?
씬 29 동 황궁 대전 안
궁예와 복지겸, 종간이
마주 해 있다.
궁예 아니 정주에 도착한 왕건 아우의 군대가 떠나지를 않고 그대로 눌러 앉아 있어?
종간 그렇다하옵니다, 폐하. 아마도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사옵니다.
궁예 사정이라니? 음...... 그래 떠날 때부터 날씨가 아주 사나웠지. 한 사흘 그랬지 않았는가?
복지겸 그렇사옵니다.
종간 감군으로 내려보낸 내군의 전령 보고에 의하면 벌써 며칠 째 장수들은 술 마시고 바둑 두고 도무지 전투에 나아갈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사옵니다.
궁예 허허허허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바둑 두고 술을 마셔? 아니 왕건 아우가 말이오?
종간 왕장군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장수들이 그러고 있었다 하옵니다.
궁예 하하하하. 뭔 이유가 있겠지?
작전을 연구 중이거나 그도 아니면 뭔가 위계를 쓰는 것이 아닐까? 적을 속이기 위해서 말이야.
복지겸 그럴 수도 있사옵니다. 하오나 출전을 한 군대가 한 곳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옵니다. 한 번 더 사람을 보내 알아 보겠사옵니다.
궁예 그만 두시구료. 그럴게 뭐가 있어? 아 왕건아우가 누구요? 천하무적이고 백전백승의 장수야. 일단 장수가 싸움터로 떠났다면 우리가 더 관여할 게 뭐가 있어? 그냥 놔두시오. 다 무슨 속셈이 있을 것이야. 재미있군, 허허허 ....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꼬.....
씬 30 정주 포구
어둠 속의 바다는 물결이 잔잔하다. 곳곳에 횃불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씬 31 그 포구 어느
전함 갑판
갑판 위에서 태평과 왕건이 먼 바다를 보고 있다.
깃발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다.
왕건 지금 뭐라고 하였는가?
이보게, 태평이 자네가 남동풍을 보았다고 하였는가? 남동풍을 보았어?
태평 예, 주군.
왕건 언제 어디서?
태평 말로써 설명을 드리기가 어렵사옵니다. 아무튼, 이제 출전하셔도 좋을 것 같사옵니다.
왕건 출전?
태평 예, 주군. 그리고 주군의 지휘함에 제단을 설치해주시오소서. 하늘에 기도를 드려 바람을 빌어야 하옵니다.
왕건 바람을 빌어? 자네가 말인가?
태평 그렇사옵니다. 남동풍을 보았으니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주군께서도 저와 함께 제를 올리시오소서. 전 장졸이 모두 마음을 다져서 함께 하늘에 빌어야 할 것이옵니다.
왕건 ..... 기도....기도를 해야 한단 말이지?
태평 그렇사옵니다. 제단 주변에 잡인을 금해주시고 제의를 마련해 주시오소서. 앞으로 칠일 후면 남동풍이 한 시각에서 두 시각 가량 불 것이옵니다. 그 때를 틈타 일제히 공격해 들어가 전장에 기선을 잡으셔야 하옵니다.
왕건 남동풍이 분다고......? 자네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하는가?
태평 남동풍은 꼭 올 것이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소서.
왕건 남동풍.....남동풍을 빌린다? 남동풍......
태평 꼭 그렇게 될 것이옵니다. 지금 나주 쪽으로 내려가시면 사흘 째 되는 날에는 백제의 견훤왕과 마주할 것이옵니다.
왕건 그렇겠지.
태평 그리고, 또 사흘을 바다에서 대치하며 시간을 끄시오소서. 그 사이에 주군과 제가 하늘에 기도 드려 남동풍을 끌어 올 것이옵니다.
왕건 (기가 막히다) 태평이 정말 그 남동풍이 불겠는가?
태평 믿어주시오소서, 주군.
어서 출항 하시오소서.
왕건 (끄떡인다) 알았네. 천부장은 듣거라. 전 전선의 지휘장수들 에게 전하여 출전을 알려라. 북을 울려라! 전 함대는 출항 한다. 이것을 지휘장수들에게 알려라, 전 함대는 출항한다.
천부장 예, 총사.
갑자기 포구는 소란스러워 진다. 소라 소리가 울고, 북소리는 계속 된다.
왕건은 경이스러운 듯 그런 태평을 보고 있다.
씬 32 바다(낮)
바다 위를 왕건의 대 함대가 나아가고 있다.
씬 33 왕건의 전함
북소리가 은은한 긴장을 더해주는 가운데 흰 장막으로 제단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서 역시 흰 제의
차림의 태평이 머리를 풀고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번쩍 든 채 하늘에 기도하고 있다. 왕건이 제주로써 앉아 있다.
씬 34 그 다른 전함
많은 전함들 속에 섞여
가고 있는 배현경의 전함
에서 홍유와 배현경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배현경 태평이라는 군사가 지금 총사와 함께 하늘에 제를 올리고 있다고 하오.
홍유 아니 느닷없이 왠 제사란 말입 니까?
배현경 아 못들었소이까? 바람을 부르고 있다는 거예요. 남동풍을 부른다는 것이예요. 아 어떻게 북서풍의 바람을 반대로 만든다는 말입니까?
홍유 소장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올시다. 허나, 아무튼 배는 이미 포구를 떠났소이다. 이틀 후면 백제의 함대들과 마주치게 되어 있어요. 기다려 보십시다.
배현경 아 이게 도대체 무슨 답답한 일이란 말인가 저렇게 해서 어떻게 바람이 온단 말인가?
씬 35 또 다른 배
왕식렴과 김락, 염상 등이 타고 있다.
김락 갈수록 수수께끼올시다.
아니 무슨 수로 바람을 바꾸어 불러들입니까? 태평군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라도 된답니까?
왕식렴 아직 기도 중이올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기다려 보시지요.
김락 허, 태평 군사는 그렇다하더라도 총사께서도 함께 제단에 앉아 계신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 인고....?
염상 허허, 사람이 바람을 부른다? 사람이 바람을 부른다?
그들은 왕건의 모함 쪽을 그렇게 보고 있다.
북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씬 36 인서트/ 수평선
씬 37 그 바다(밤)/
왕건의 전함
태평의 기도는 계속 된다. 어둠 속에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신비하기까지 하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달무리를 지으며 스쳐간다.
바람은 없다. 군사들은 숙연하게 주변을 지키고 있다. 왕건 또한 숙연하게 그렇게 앉아 있다.
씬 38 압해도 해안(낮)
수많은 견훤의 배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씬 39 그 해안 언덕
견훤의 군영
견훤이 제장들과 함께 갈대 밭 군영에서 먼 바다를 보고 있다. 그들의 군세는 끝도 없이 이어져 있고,
웅장하기만 하다.
견훤 뭐라? 드디어 왕건이의 배들이 움직였어?
수달 그렇다 하옵니다, 폐하. 생각대로 해로를 따라 우리들이 포진하고 있는 이 압해도 쪽으로 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견훤 하하하하. 드디어 호랑이 입 속으로 들어오고 있구먼 그래. 암, 아니 오고 베길 수가 있겠 는가? 나주는 급하고 우리는 이렇게 노리고 있고. 와야지. 와야 하고 말고.....
최승우 (걱정스럽다) 하온데, 폐하.
견훤 왜 그러는가, 파진찬?
최승우 이미 우리가 화공으로써 저들을 물리친다는 것을 노련한 왕건이 모를 리가 없사옵니다.
견훤 그런데?
최승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오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대비책이 마련되었기 때문이 아니옵니까?
능애 대비책은 무슨 대비책이란 말이오? 나주는 급하고 보고 있을 수는 없고 그러니까 오는 것이 아니 오이까? 그물에 고기가 걸리고 있소이다. 우리 생각대로 맞아 떨어지고 있어요.
견훤 적은 얼마나 된다 하는가?
수달 백여척의 전함과 삼천의 군사라 하옵니다.
견훤 하하하, 가엾도다. 병력도 우리 절반 밖에 아니되는 구나. 이번에야말로 싱거운 싸움이 되겠구먼. 모두 전투준비를 하여라. 왕건이의 저 수군부터 괴멸시켜 놓고 마군과 기병이 금성산성과 영산강 중류를 일제히 공격해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겼다. 군사도 적고 전함도 적고 또 바람까지 저들 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다. 저들이 어떻게 우리를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가 제장들?
모두들 그러하옵니다, 폐하.
견훤은 의기양양해서 먼
바다를 보고 있는데,
한 필의 기마가 달려와
말에서 내려 군례를
올린다.
전령 폐하, 방금전 바다에 나가 있는 척후선에서 온 보고이옵니다.
견훤 무엇이야?
전령 해안 쪽으로 내려오던 마진군의 전 함대가 더 이상 전진을 하지 않고 바다에 닻을 내린 채 멈추어 있다 하옵니다.
견훤 그래?
공직 아무래도 우리의 군세를 본 것 같사옵니다. 그러니까 감히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견훤 ........(생각이 많다)
전령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폐하.
수달 무슨 소리냐 그런 것이 아니라니?
전령 마진국의 수군은 항해를 멈춘 채 바다 위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하옵니다.
견훤 제사? 무슨 제사? 그건 무슨 해괴한 소리야? 제사라니.... 이곳까지 다 와 가지고 전투는 할 생각을 않고 제사를 올리고 있어? 제사라...제사라...?
씬 40 왕건의 그 바다
배 위에서는 여전히 태평의 제사가 한 참 진행 중이다.
그 옆에 왕건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풀어 하늘을 보고 있다.
태평 비옵니다. 일월성신과 바다의 용왕 신에게 비옵니다. 하늘에 구름을 모으고 바람을 일으켜 주시오소서.
정의를 지키고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일으킨 하늘의 군대이옵니다. 이 군대에게 바람을 주시오소서. 하늘이시여.
우리 주군에게 남동풍을 주시오소서. 남동풍을 주시오소서. 하늘이시어....
그렇게 절규하듯 부르짖는 태평의 간절한 모습에서...
< 89회 끝 > (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