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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10월28일(월요일) 해파랑길 32코스 탐방일정
회비 38,000원 10월10일 송금필, 27번 좌석 예약
탐방지 : 해파랑길 32코스
[해파랑길 32코스
해파랑길의 32번째 코스로 삼척 동해 구간 중 삼척시 근덕면에서 동해시 추암동을 잇는 구간으로 맹방 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삼척항, 광진산 봉수대, 삼척 해수욕장을 지나 추암 해변에 이르는 길이다.
탐방코스 : 맹방해변 입구~(2.5Km)~상맹방해변~(7.8Km)~죽서루~(8.4Km)~삼척해변~(3.2Km)~추암해변
[길이 21.9km, 소요시간 8시간, 난이도 보통]
시점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하맹방리 221-13 (맹방해수욕장 입구)
종점 :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 468-1 (추암역 오징어해우소 옆)
코스 개요
- 삼척 동해 구간 중 삼척시 근덕면에서 동해시 추암동으로 이어지는 길
- 맹방 해변 출발 상맹방 해변과 삼척항 거쳐 삼척, 추암 해변 촛대바위
- 바닷길과 오십천 강변길, 하천길과 산촌마을 등 다채로운 길을 지남
관광포인트
- 넓은 폭과 1.5km 이상의 길이를 자랑하는 삼척 제일의 해수욕장 삼척 해변
- 다양한 조형물과 야간조명이 아름다워 포토존으로 유명한 수로부인공원
- 삼척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증산 해변 촛대바위 일출
여행자 정보
- 오십천 제방길에서 바다와 하천의 수온이 비슷한 봄가을 은어 낚시 가능
- 삼척항 대게거리에서 대게 등 특산물 맛집이 많음]
탐방코스: [맹방해수욕장 입구~(1.2km)~하맹방 해수욕장~(1.7km)~상맹방 해수욕장~(4.6km)~오분동 고성산(해발 99.7m) 밑 ‘이사부 우산국 복속 출항지(異斯夫 于山國 復屬 出港地)’ 기념비~(1.6km)~삼척역~(0.6km)~실직군왕비릉(悉直郡王妃陵)~(2.0km)~죽서루~(3.1km)~삼척항 대게거리~(1.6km)~소망의 탑~(1.1km)~비치 조각공원~(1.5km)~작은 후진해수욕장~(0.8km)~삼척 해수욕장~(1.1km)~해가사의 터(임해정)~(0.4km)~이사부 사자공원~(0.9km)~추암 촛대바위~(0.3Km)~추암해수욕장 공영주차장]
[총 이동거리 22.5km, 난이도 보통]
일시 : 2024년 10월 28일(월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7시간 소요)
07:00~10:10 "좋은사람들" 버스로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근덕면 맹방해변로 228-201 번지에 있는 맹방해수욕장 입구로 이동 (260km) [3시간10분 소요]
10:10~11:30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근덕면 맹방해변로 228-201 번지에 있는 맹방해수욕장 입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방탄소년단(BTS)의 앨범 ‘버터’ 재킷을 촬영한 장소인 하맹방 해수욕장으로 이동
[하맹방 해수욕장의 방탄소년단(BTS)의 앨범 ‘버터’ 재킷 촬영장소에는 BTS 멤버 인원수에 맞춰서 7개의 선베드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앨범 재킷 사진과 똑같이 수박이 연상되는 파라솔과 줄무늬 선베드가 모래사장에 전시되어 있다.]
[하맹방 해수욕장(下孟芳 海水浴場) :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근덕면 하맹방리에 있는 해수욕장.
삼척에서 남쪽으로 7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상맹방 해수욕장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수심이 얕으며, 해수욕장 내에서 야영도 할 수 있어 가족 단위 피서지로 적합하다. 매년 7월 10일부터 8월 20일까지 해수욕장으로 운영되는데, 인근 마을에 민박촌이 형성되어 있고 삼척에서 하맹방까지 30분 간격으로 시외버스가 다녀 교통도 편리한 편이다. 승용차로 갈 경우 삼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삼척교·오분리·한치정상을 거쳐 한치밑·승공을 지나면 해수욕장이 나온다.]
[한류 성지순례 - 삼척 맹방해변과 부남해변
마침내, 음악과 영화의 성지된 두 곳
일요시사 기사 등록 : 2023.02.27. 10:00:56
강원도 삼척에는 한류 팬이 가고 싶은 명소가 두 군데 있다. ‘버터’와 ‘마침내’의 바닷가다. ‘버터’의 바닷가는 방탄소년단(BTS)의 앨범 ‘버터’ 재킷을 촬영한 맹방해변이다. 멤버 제이홉이 촬영 중에 “합성 같냐, 바다가”라고 감탄한 그곳이다. ‘마침내’의 바닷가는 영화 〈헤어질 결심〉 마지막 장면, 바위산을 촬영한 부남해변이다. ‘마침내’는 이 작품을 대표하는 마성의 대사다. 맹방해변은 햇빛이 찬란할 때가 좋고, 부남해변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 즈음이 낫다. 맹방해변은 방탄소년단의 멜로디처럼 달고, 부남해변은〈헤어질 결심〉처럼 마음에 아려 쓰다. 맹방해변은 동해서 손꼽는 해변이다. 보통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에 명사십리라는 수식이 붙는데, 맹방해변은 오래전부터 명사십리라고 불렸다. 이젠 ‘방탄소년단의 해변’이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생겼다. 2021년 3월 맹방해변에서 재킷을 촬영한 앨범 ‘버터’는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핫100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총 10주 동안 정상을 지켰다.
한류 명소
맹방해변 역시 한류 명소로 거듭났다. 2021년 7월 앨범 속 촬영 콘셉트를 재현했고, 지난해 10월부터는 재킷에 등장한 소품을 재정비해 여행자를 맞고 있다. 주황색과 초록색이 섞인 파라솔, 파란색과 노란색 줄무늬 선베드, 비치 발리볼 네트와 보드 등이 재킷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양새다. 그곳에서 앨범 사진 속 방탄소년단처럼 인증사진을 찍는 이는 ‘아미(BTS 공식 팬클럽)’뿐만 아니다. 남녀 불문, 나이 불문이다. 선베드가 내륙을 향한다고 인증사진만 찍고 떠나선 곤란하다. 뒤쪽으로 펼쳐지는 바다는 방탄소년단의 노래처럼 청량하다.
유튜브 채널 ‘방탄TV’에는 그날의 스케치 영상이 생생하다. 2022 카타르월드컵 주제곡 ‘드리머스(Dreamers)’를 부른 멤버 정국은 “겨울 바다가 보고 싶었는데 못 온” 아쉬움을 달래고, “바닷소리가 참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게 좋다”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맹방해변의 겨울 바닷소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하지만 이내 ‘버터’가 귓가에 맴도는 건 어쩔 수 없다. ‘버터처럼 부드럽게(smooth like butter)’ 하는 콧노래가 흘러나오고, 모래밭을 걷다 보면 맹방의 황홀한 바다 빛이 순식간에 ‘당신의 마음속으로 몰래 침입(breakin’ into your heart like that)’하는 듯하다.
2021년 삼척 바다의 주인공이 맹방해변이라면, 2022년은 부남해변이다. 마을에서 관리하는 비밀스러운 해변은 이전부터 마니아가 적잖았다. 한 눈에 들어오는 소박한 해안과 남쪽 바위산이 영화적이다. 지난해 6월 박찬욱 감독의〈헤어질 결심〉이 개봉한 뒤, 마침내 이곳은 그 너비로 가늠할 수 없는 해준(박해일 분)과 서래(탕웨이 분)의 사랑이 깃든 장소가 됐다.
부남해변은 맹방해변 남쪽으로 6~7㎞ 거리에 위치한다. 국도7호선(동해대로)을 벗어나 부남2리 마을 길로 들어선다. 주차장에서 해변으로 가는 입구는 대숲 계단을 지나 꽤 극적이다. 계단 끝에서 정면 모래밭 건너편에 바위산이 보인다. 바위산 안쪽은 영화와 달리 당집이 하나 있고, 바위사이로 사나운 파도뿐이다.
삼척 바다의 주인공 맹방해변·부남해변
유황 든 온천수 사용하는 족욕체험장도
그 속으로 걸어가는 서래와 그녀를 쫓는 해준의 모습이 겹친다. 서래가 소중하게 간직한 <산해경>도 떠오른다. 산인 듯 바다인 듯싶은 그림과 탕웨이가 직접 썼다는 한글이 인상적이었는데, 부남해변의 바위산은 이를 재현한 것 같다.
그러므로 부남해변에서는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그리고 마침내, 서래와 해준이 되어 지난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걷는다. 바위산 곁의 모래밭 또한 작은 바위가 길을 막아 시적이다. 그 사이로 해변을 거닐다 바다에 시선을 던지면 애잔한 사랑이 밀물처럼 다가오고, 물결 위로 정훈희와 송창식이 부른 OST ‘안개’가 파도에 실려 번진다.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라는 가사를 다섯 자로 줄이면 ‘헤어질 결심’이고, 다시 석 자로 쓰면 ‘마침내’다.
이때 마침내는 분명 ‘드디어 마지막에는’이라는 의미일 텐데, 입 밖에서는 그저 작고 아름다운 해변에 대한 감탄이 되고 만다. 부남해변은 부남2리 마을에서 관리한다.〈헤어질 결심〉을 개봉한 뒤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 주간에는 대체로 개방하나 안전 문제로 닫아두는 경우도 있다. 입구가 닫혔을 때는 삼척시청 관광정책과(033)570-3074)에 문의하면 마을에 연락해서 열어준다.
이사부사자공원은 가요 ‘독도는 우리 땅’에도 등장하는 신라 장군 이사부의 개척정신과 얼을 기려 조성했다. 정상부에 삼척그림책나라가 있다. 그림책 작가들이 직접 참여해 꾸민 공간을 다섯개 전시관으로 구성했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그물놀이터와 정글짐, 벌집놀이터 등이 아이들의 흥미를 돋운다. 빅북존과 그물침대에서 그림책을 읽는 경험도 재미나다. 전문 교육을 받은 도슨트가 상주해 책 읽기와 체험을 돕는다. 입장은 하루 3회(09:30, 13:00, 15:30), 회당 입장 인원 100명으로 관리한다.
야외에는 ‘삼척 문어와 용왕 이야기’ 조형물이 반기며, 해변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운치 있다.
삼척시 정하동에 위치한 벽너머엔나릿골감성마을은 골목과 벽화가 아기자기하다. 나릿골은 ‘나루가 있던 마을’을 뜻한다.
1970~1980년대 어촌 산동네 풍경이 남아 있고, 골목을 걷다 돌아보면 삼척항과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부 길은 집 마당과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니 주민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돌아볼 일이다.
유황온천
주차장이 마을 곳곳에 있는데, 보통 나릿골말랑이수퍼와 나릿골안내센터가 있는 삼척항대게거리 쪽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삼척 내륙의 가곡이나 도계 쪽을 여행한다면 가곡족욕체험장도 겨울 여행지로 알맞다. 가온밸리 휴양마을에서 운영하며, 유황이 든 온천수를 사용한다. 족욕 전에 목과 어깨에 유황 제트 겔을 바르고, 온천수에 20~30분 발을 담근 뒤, 소금으로 발을 문지르고 아로마 오일을 바르는 순서로 진행한다. 창밖으로 가곡천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와 몸과 마음이 한층 편안하다. 이달 중에는 족욕체험장 옆에 유황온천장이 개장할 예정이다.]
11:30~11:55 상맹방 해수욕장으로 이동
[삼척시청에서 5km 가량의 근거리에 위치한 곳으로서 일명 승공 해변이라고도 불리우는 이곳은 평균 수심 1~2m 정도이며, 물이 맑고 깨끗한 백사장을 보유하고 있고, 송림이 울창하여 가족 단위 피서지로 적격이다. 특이한 것은, 인접지에 6홀 규모의 골프연습장이 있어 스포츠와 바캉스를 같이 할 수 있다. 또한, 삼척시의 자매도시인 서울 성북구 주민들의 하계수련원이 설치되어 도농간 친목 도모 및 농수산물 직거래에도 기여하는 곳이다.]
11:55~13:05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오분동에 있는 고성산(해발 99.7m) 밑 ‘이사부 우산국 복속 출항지(異斯夫 于山國 復屬 出港地)’ 기념비로 이동
[오분동 고성산은 육백지맥의 말단이다.]
[삼척시는 1,500여 년 전 신라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독도를 정복하기 위해 출항했던 삼척시 오분동 고성산 밑 이사부 우산국 정복 기념비에서 매년 이사부(異斯夫) 장군 숭모제를 봉행한다. 고성산 요전산성 아래 바닷가에 ‘이사부 우산국 복속 출항지(異斯夫 于山國 復屬 出港地)’ 기념비와 나룻배 한척이 전시되어 있다. 이사부는 512년 삼척에서 출항하여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
[삼척 요전산성(오화리산성)
기자명 안병철 기자
대경일보 기사 입력 : 2021.07.28 19:43 수정 2021.07.29 09:37
강원도 삼척시(三陟)는 강원도 동해안 최남단에 있다. 서쪽으로 태백산맥이 이어져 1000m 이상 고위평탄면을 이룬다. 동쪽은 급경사 해안평야를 형성한다. 삼척시 원덕읍 노경리와 동해시 북평동 구호마을, 발한동 택지개발지역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적이 많아 그 시기부터 인구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 이후 진한의 소국중 하나인 실직국이 들어선다. 인근에 울진의 파조국(波朝國,또는 파단국(波但國)), 강원도 대부분의 동예와 공존했다. 서기 50년 경, 실직국이 파조국을 합병한다. 60년 경, 동예의 침공을 받자 안일왕(安逸王)은 일시 나라를 파조국으로 옮긴다. 102년 경 동해안일대로 대거 세력을 확장한 실직국은 경주시 안강읍 음즙벌국과 분쟁을 벌였다. 오랜 분쟁으로 양국이 지친데다 결말이 나지 않자 결국 진한 종주국인 신라의 중재를 요청한다.
그러나 신라는 오히려 중재과정의 사건을 빌미로 두 나라를 침공해 음즙벌국과 인근의 압독국을 합병한다. 이어 신라는 서기 104년 실직국도 합병한다. 신라는 이를 계기로 강원도일대까지 세력권을 확장한다. 삼척 일대가 강원도에서 유일한 신라 영역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실직국은 자치권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481년 장수왕대 고구려의 남침을 받아 신라가 포항일대까지 영역을 빼앗기면서 실직국도 자치권이 박탈된다. 그리고 국명 대신 실직군(悉直郡)이라는 군 단위 고을로 전락시킨다. 국가로서 완전히 멸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지증왕6년(505년) 실직국을 다시 빼앗아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북방진출 군사적 거점을 만든다. 이 때 신라 실직주 군주(軍主)로 부임해 7년간 다스린 인물이 이사부(異斯夫) 장군이다. 이사부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서라벌에서 이끌고 온 경군(京軍)과 현지인으로 구성된 병력을 합쳐 국경 군사력을 양성한다. 그리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고 북쪽 하슬라주(강릉)로 영역을 확대한다.
삼척에는 이 시기에 쌓아 조선시대까지 오랜 기간 활용된 산성이 있었다. 삼척시 오분동 해발 99m 고성산 정상부에 토축 흔적이 남아 있는 요전산성이다. 고성산 주변 동남쪽은 해안, 서쪽은 가파른 절벽이 둘러싸고 있다. 해안 절벽은 동해안에서 가장 험한 지형이 형성돼 있다. 북쪽으로는 태백산맥에서 발원한 오십천이 발 아래 흐른다. 하구 폭이 넓어 건너편 정라진과 간격이 멀다. 넓은 강폭은 성곽에서 해자역할을 한다. 사면이 하천과 바다, 협곡, 절벽으로 둘러싸인 만큼 천혜의 요새다. 남쪽으로는 영동과 영남 해안을 잇는 교통망이 형성돼 있다. 산성 남쪽은 조선조 역참 사직역(史直驛)이 있었다. 산성 아래 오분동에는 과수군기지 오분진이었다. 산성 주변 모두 군사전략적 요충지로 손색없다.
문헌에는 고려 우왕 10년(1384년) 초축, 조선 세조 8년(1462년) 관찰사 허종이 증축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조 책임자는 수군만호(萬戶)였다. 영동 해안 수군이 주둔해 왜구들을 감시하거나 방어했다. 규모는 둘레 560여m, 우물 1곳 등으로 기록돼 있다. 계승루, 진동루 등 누각과 망루도 있었다. 기록은 없지만 신라 이사부 장군 우산국 정벌 출항지란 얘기도 있다. 또 고려조 문신 이승휴(李承休)의 시문집에도 등장한다. 그는 삼척 출신이었다. 1253년 어머니를 뵈러 왔다가 몽골이 고려조정 강화도로 진격해가자 그대로 이곳에 머문다. 이 때 지은 시가 망무릉도행(望武陵島行)이다. 시 구절에 진주부 요전산성(眞珠府 寥田山城)이 있다. 산성에서 몽골군에 대항해 수비 중 지었다고 한다. 이 때도 중요한 군사요새로 활용됐던 것이다.
성곽 답사 길은 세 갈래다. 하지만 해안가는 절벽으로 너무 험하다. 옛 7번국도 한티에서 완만한 능선을 타고 오르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 잡목과 덤불이 우거져 있기 때문이다. 서쪽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지은 집들이다. 그 사이 계단과 비좁은 산길이 가장 수월하다. 육백산맥 종주 등산객들이 주로 택한다고 한다. 계단과 산길은 지그재그로 나 있다. 멋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날 즈음 너른 터(현재 밭)가 띈다. 뒤로 동해바다가 펼쳐진다. 산세를 보니 다산 정약용이 ‘민보의’에서 밝힌 산성 입지요건 네 가지가 떠오른다. 고로봉, 산봉형, 마안형, 사모봉형이다. 그중 마안형은 말 등에 얹는 안장처럼 생긴 지형이다. 요전산성은 마안형이다. 너른 터는 말안장 움푹 꺼진 부분에 해당한다. 양쪽 산봉우리와 함께 보면 영락없는 말안장 형태다. 정상부는 북동쪽이다. 동쪽은 해안절벽이므로 성벽은 남서쪽에만 쌓았다. 내성 형태로 내곽을 둘렀다. 거의 유실됐지만 형태는 짐작된다. 정상부 평탄지 문터에 성 돌이 나뒹군다. 계단식 평탄지는 분묘들이 차지하고 있다. 과거 건물 터였을 터인데... 망루 터는 최정상 너른 단 위에 있다.
장방형 단 위에서는 사방이 조망된다. 북쪽은 정라진항, 오십천 하구, 동쪽은 망망대해, 남쪽은 근덕면 해안이다. 서쪽은 옛 7번국도와 고속도로, 철도 터널 등이다. 하산 후 남서쪽 봉우리로 향한다. 너른 터를 지나니 아름드리 소나무가 두 줄로 자란 성벽 흔적이 보인다. 동해를 막아선 성곽아래 평탄지마다 시누대가 울창하다.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다. 대숲마다 산성을 지켰던 선인들의 고역이 흠뻑 배인 듯하다.]
13:05~13:10 사진촬영
13:10~13:35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중앙로 13 번지에 있는 삼척역으로 이동
[삼척역(三陟驛)은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사직동에 위치한 삼척선의 철도역으로, 삼척선의 종착역이다. 삼척선(三陟線)은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의 동해역과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의 삼척역을 연결하는 한국철도공사의 지선철도 노선이다. 2024년 12월 30일 동해선이 개통되면 동해선과 직결된다.]
13:35~13:43 강원 삼척시 사직동 213-5 번지에 있는 실직군왕비릉소(悉直郡王妃陵所)로 이동
[실직군왕비릉소(悉直郡王妃陵所)(강원도 기념물)
경순왕의 손자(경순왕의 8자인 삼척 김씨의 시조 삼척군(三陟君) 추(錐)의 아들이며 실직군왕(悉直郡王)인 김위웅(金渭熊)의 비 밀양박씨의 릉으로 실직군왕(悉直郡王)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 경순왕의 복속을 받아들이고 실직군왕으로 책봉하여 예우한 것이다.
조선 현종 4년(1838년) 가을에 김학조, 김홍일 등이 삼척부사 이규헌에게 간청하여 지석(誌石)과 유적을 찾으려고 갈야릉(葛夜陵)【실직군왕릉】과 사직릉(史直陵)【실직군왕비 릉】을 발굴하여 두 릉을 확인하였다. 1937년 삼척김씨 종중(宗中)에서 수축(修築)할 것을 결의하고 석의(石儀)를 갖추어 릉으로 봉하였다. (실직군왕비릉 안내문에서)]
13:43~14:15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죽서루길 37 번지에 있는 죽서루(竹西樓)로 이동
[삼척의 죽서루(竹西樓)는 관동지방을 대표하는 누정이다. 고려 시대 건립된 죽서루는 관동팔경 가운데도 으뜸으로 쳤다. 죽서루가 돋보이는 것은 자연적인 지형 조건을 그대로 활용한 누각이라는 점이다. 자연석 암반 위의 1층 기둥은 높낮이가 제각각이고, 2층 누각은 기둥 사이에 벽이나 창문 없이 모두 개방되어 사방의 경관을 즐기기 좋다. 오래된 연륜과 명성만큼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누정기와 누정제영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고려 시대 건립된 죽서루는 총석정·경포대와 같은 관동팔경 가운데도 으뜸으로 쳤다.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오십천(五十川), 그 물줄기를 내려다보며 병풍처럼 둘러친 절벽 위에 자리한 죽서루, 정말 천혜의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시대 허목이 지은 「죽서루기」를 보면 죽서루의 경관을 잘 묘사하고 있다.
관동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다.
그중에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이니……
그 중에 죽서루를 제일로 손꼽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죽서루는 동해와 마주하며 높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는 벼랑에 있다.
서쪽으로 두타산과 태백산이 우뚝 솟아 있어 아스라이 산봉우리가 보인다.
큰 시내가 동해로 흐르며 꾸불꾸불 50리길 여울을 이루고
그 사이에 울창한 숲과 사람 사는 마을이 있다.
누각 밑에 겹겹이 싸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하얀 여울이 그 아래로 감돌아 맑은 소를 이룬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서진다.
인간 세계가 아닌 듯 아름다운 경치는 큰 바다의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
유람하는 사람도 이런 경치를 좋아해 제일로 손꼽는 것 아닌가 싶다.
죽서루의 명칭은 죽장사(竹藏寺)라는 절 서쪽에 있는 누각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창건 시기는 명확하진 않지만 1266년(원종 7) 이승휴가 작성한 「죽서루기」가 있어 그 이전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 창건된 죽서루는 조선 시대 1403년(태종 3) 삼척부사 김효손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서루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자연적인 지형 조건을 그대로 활용한 누각이라는 점이다. 커다란 암반 위에 건립된 죽서루의 1층은 17개의 기둥이 서 있는데 그 높낮이가 다 다르다. 자연석 암반 위에 그랭이질하여 세웠기 때문이다. 누각을 오르는 길도 삐뚤빼뚤 자연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누각의 2층은 정면 7칸, 측면은 한쪽은 2칸이고 다른 한쪽은 3칸의 팔작지붕이다. 남원 광한루와 달리 기둥 사이에 벽이나 창문 없이 모두 개방되어 사방의 경관을 즐기기 좋다.
누각 정면에 ‘죽서루(竹西樓)’와 함께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고 크게 쓴 편액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숙종이 1711년(숙종 37) 죽서루에 들렀다가 삼척부사 이성조에게 쓰게 하였다고 한다. 누정에는 오래된 연륜과 명성만큼 이곳을 다녀간 유명 인사의 현판들이 즐비하다.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누정기와 누정제영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누각 안에 길게 걸려있는 ‘제일계정(第一溪亭)’은 1662년(현종 3) 삼척부사 허목이,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戲之所)’는 삼척부사 이규현이 이곳의 특별한 경치를 비유하여 쓴 글이다.
오래되고 알려진 누정에는 많은 시문이 걸려있다. 하지만 왕이 지은 어제시는 흔치 않다. 숙종은 죽서루의 경관을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노래한 시문을 남겼다.
우뚝 솟은 절벽 위에 백 척의 높은 누각
아침 구름 저녁 달이 그림자를 담아 맑게 흐르네
출렁이는 물결 속에 고기는 떠올랐다 잠기고
일 없이 난간에 기대어 백구와 친하게 지내네
이처럼 오랜 역사와 경관을 자랑하는 만큼 유명한 서화가들이 남긴 작품들도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정선·김홍도·강세황·엄치욱·허필 등이 죽서루를 다녀갔고, 그 경관을 그림으로 그렸다. 현재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는 삼척의 주민과 여행객이 누정에 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며 발 뻗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14:15~14:20 사진촬영
[삼척항대게거리를 생략하고 죽서루에서 소망의 탑으로 이동할 경우 이동거리가 4.7km에서 4.0km로 0.7km 단축된다.]
14:20~15:05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정하동 186 번지에 있는 삼척항대게거리로 이동
[조선시대 허균 선생의 "도문대작"에 소개되었을 만큼 삼척의 대게는 예로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삼척항 대게거리는 대게거리인 만큼 싱싱하고 맛있는 대게가 가득하다. 대게 직판장, 회 센터 등 다양한 음식점이 있어 대게뿐만 아니라 싱싱한 동해의 해산물을 먹을 수 있다.]
15:05~15:30 이사부길을 따라서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교동 81-2 번지에 있는 소망의 탑으로 이동
[새천년의 소망을 담아 2000년 삼척시에서 건립한 탑으로, 건립 후원자 33,000명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으며 3단 타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1단은 신혼부부의 소망석이며, 2단은 청소년, 3단은 어린이의 소망석으로 되어 있으며, 탑신은 소원을 비는 양손의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을 탑 아래에 묻어 두었다.]
[이사부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해안도로이다. 삼척항에서 삼척해수욕장까지 푸른 동해를 따라 약 4.6㎞ 남짓 펼쳐지는 동해안의 해안절경과 자연이 깎고 다듬은 기암괴석, 우거진 송림이 어우러진 경관을 볼 수 있다. 해안도로 중간에는 잠시 차를 주차하고 편안하게 해안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새천년해안유원지는 새해 첫 희망을 빌어주는 소망의 탑과 부담 없이 쉴 수 있는 조각공원과 함께 삼척 주요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15:30~15:45 이사부길을 따라서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새천년도로 326 번지에 있는 비치 조각공원으로 이동
[비치조각공원은 새천년해안도로변의 주요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여름철은 물론 4계절 관광객이 찾아와 조각작품을 감상하면서 휴식 및 더위를 식히는 장소로 인기를 높다. 또한 여름철에는 공원 내에 있는 야외무대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특히 지하공간에 있는 "카페 마린데크"는 바다와 가장 가까이에서 차나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하다.]
15:45~15:50 사진촬영
15:50~16:15 이사부길을 따라서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새천년도로 467 번지에 있는 작은 후진해수욕장으로 이동
[삼척 시청에서 북쪽으로 1.5km 거리에 위치한 작은 후진해수욕장은 삼척해수욕장과 붙어있으며, 낮은 야산을 뒤로한 아담한 어촌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백사장 길이 150m, 수심 1~1.5m 정도이며, 옆에는 작은 항포구를 끼고 있어 가족단위의 피서지로 적합하다. 삼척항과 인접하여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으며, 자전거 도로 및 데크 조성되어 있어 원하는 곳에서 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다.]
16:15~16:25 이사부길을 따라서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갈천동 14-22 번지에 있는 삼척 해수욕장으로 이동
[삼척해수욕장(三陟海水浴場) :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갈천동에 있는 해수욕장.
백사장 너비 400m, 길이 1.5km이다. 1984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삼척 시내에서 북쪽으로 1.4km 지점에 있다. 삼척 제일의 해수욕장으로 해안선에서 약 150m까지는 수심이 1~1.5m로 얕고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다. 해수욕장 뒤편으로는 송림이 울창하며 가까이에 횟집을 비롯해 민박집과 호텔 등이 들어서 있다. 남쪽 해변에는 아담한 규모의 후진해수욕장이 있어 해수욕과 낚시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16:25~16:33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수로부인길 401 번지에 있는 해가사의 터로 이동
16:33~16:36 임해정(臨海亭)과 사랑의 여의주 드래곤볼과 추암 촛대바위를 사진촬영
[해가사 터인 임해정은 <삼국유사> 수로부인전에서 전하는 <해가>라는 설화를 토대로 복원된 곳이다. 문헌상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삼척해수욕장의 북쪽 와우산 끝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원래의 위치는 현재 군사보호시설지구로 개발이 불가하여 주변경관이 수려한 인접지역인 증산동 해변에 조성되었다. 임해정 좌우로의 해변은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삼척시에서 바다를 끼고 있는 유일한 정자이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임해정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다의 용이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남편인 순정공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막대로 언덕을 치며 해가(海歌)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니 용이 수로부인을 모시고 나타났다 한다. 설화를 토대로 복원한 임해정과 해가사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고 주변으로 수로부인공원과 주차장을 조성했다. 2006년 4월, 사랑의 여의주 드래곤볼을 설치했으며 사랑과 소원을 비는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사랑의 여의주 드래곤볼은 지름 1.3m, 높이 1.67m의 구형 석재에 ‘해가’와 ‘헌화가’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새겼다. 그림이 꽤 정교하고 자연 빛을 받아 오묘하다. 수로부인을 태운 용의 용맹한 자태가 돋보인다. ‘드래곤볼’은 눈으로만 보는 작품이 아니다. 조형물을 돌려서 용을 탄 수로부인 그림이 본인 앞에 멈추면 소망한 일이 모두 이뤄진단다. 사랑도 확인해보자. ‘헌화가’ 장면서 멈추면 연인의 사랑이 영원하고, ‘해가’ 장면이 나오면 마음에 묻어둔 사랑이나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거나 말거나, 새해니까 재미 삼아 한 번 돌려 볼 일이다.
해가사의 터는 동해의 일출 명소인 추암해수욕장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사진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해가사의터는 증산해변, 삼척해변, 이사부사자공원, 추암해변, 쏠비치 삼척 등 유명 관광지와 인접해 지나는 길에 들르기 편하다. 증산해변이나 추암해변, 추암 촛대바위서 해돋이를 감상하고 해가사의터에서 ‘드래곤볼’을 돌리며 소망을 기원하면 새해맞이 여행 코스로 완벽하다. 해가사의 터는 상시 운영하며(연중무휴), 입장료는 없다.]
16:37~16:45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수로부인길 333 번지에 있는 이사부 사자공원으로 이동
[신라장군 이사부의 개척정신과 얼을 이어받은 가족형 테마공원으로 동해안의 아름다운 절경을 가장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물썰매장이 있어 어린이는 물론이고 가족, 친구, 연인들에게 동심을 안겨준다. 여름철 야간에는 추억의 명화도 감상할 수 있다. 공원 내 조성된 삼척 그림책 나라는 그림책을 테마로 23명의 그림책 작가가 조성한 공간으로 평면적인 책의 내용을 다양한 소재와 표현기법으로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린이 놀이터가 있고 바닷가를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마련돼 있다.
공원 내에는 [영웅의 한 세기]라는 제목의 황금사자 조형물과 ‘나무 사자 전국 공예대전’ 수상작 1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사자 조형물이 많은 이유는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복 당시 사자 목우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사부 장군이 신라시대 우산국, 지금의 울릉도와 독도를 복속할 때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해안으로 다가가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고 알렸다.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즉시 항복하였다고 한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다.]
[이사부(異斯夫) - 지혜로서 천하를 거머쥔 신라의 정치가
이사부는 우산국 곧 지금의 울릉도를 신라 땅으로 만든 장수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의 공적을 말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막 커가던 신라의 성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사부는 지혜로웠으며, 그 지혜로 권력의 중심에 다가가는 방법을 알았다.
신라를 키운 ‘리베로’
이사부(異斯夫)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삼국사기]가 선두에 선다. [삼국사기]는 열전에 이사부를 설정하고 그의 생애를 간추려 소개하였다. 성은 김 씨이고, 내물왕의 4세손이라고 하였다. 그가 살았던 지증왕과 진흥왕 때의 활약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변경의 관리가 되어 가야국을 빼앗았다. 둘째, 우산국을 병합하였다. 셋째,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이 가운데 우산국 병합 사실은 신라본기 지증왕 13년 6월 조에, 도살성과 금현성의 함락 사실은 진흥왕 11년 3월 조에도 각각 기록되었다. 그리고 가야를 빼앗은 일은 열전의 사다함 조에 더 자세히 나온다.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야국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 때 나이가 십오륙 세인 사다함은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나섰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 하여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요청이 간절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비장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낭도 가운데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
이렇게 본다면 이사부는 지증왕과 진흥왕을 거치는 동안 한참 커가는 신라의 정복 전쟁에서 선봉장이었던 셈이다. 신라가 지증왕에 이르러서야 나라의 격을 갖춰 나가는데, 이사부 같은 이가 있어서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사부는 신라를 키운 리베로였다. 그의 발끝에서 시작한 정복 전쟁의 공이 굴러, 마지막으로 김춘추라는 스트라이커에게 골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다만 한 가지. 이사부의 주요활동으로 소개한 세 가지 일이 모두 지증왕과 진흥왕 때 벌어진 점이다. 가운데 법흥왕 때를 건너뛰고 있다. 병부령이 되고 국사를 편찬하자고 제안한 일도 진흥왕 때이다. 거기에 혹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머리를 써서 이기는 전쟁
어쨌건 그 활약상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먼저 정리해 보자. 이사부는 힘만 지닌 장수가 아니었다. 그의 전쟁은 대체로 꾀를 써서 이긴 싸움이었다.
진흥왕 11년(550)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물고 물리는 상황,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이용하리라 생각했다. 곧 이사부에게 명령하였다. 군대가 출동하여 그들을 쳐서 두 개의 성을 빼앗았다. 이어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다. 뒤늦게야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쳤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도리어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물론 이사부 혼자의 작전이 아니라 진흥왕과 이사부의 합작품이라 하겠지만, 이 같은 정보와 아이디어를 낸 이는 이사부였을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는 싸움은 더 놀라운 지략의 한 판이었다.
지증왕 13년(512)이었다. 이사부는 아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울릉도)을 병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곳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 받기 어려우나, 꾀를 써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해안으로 다가가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고 알렸다.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는 이 싸움이 있기 7년 전에 나라 안의 주, 군, 현이 정해졌고, 이때 설치된 실직주에 이사부가 군주로 앉았다고 적었다. 실직주는 지금의 울진, 삼척 일대인데, 군주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예이다. (신라본기, 지증왕 6년) 아마도 그런 다음 아슬라주의 군주로 옮겼던 것 같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섬사람들이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신하된 도리를 하지 않자, 왕이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라고 썼다. 성과 이름이 다르고, 결말에 ‘이종에게 상을 내려 주백(州伯)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싸움에 공을 세워 군주가 된 것처럼 썼다.
김이 박으로, 박이 김으로 다른 예는 박제상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삼국사기]는 박제상으로, [삼국유사]는 김제상으로 썼다. 여기서는 그 반대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차이만 넘어간다면 결국 이사부가 새롭게 일어서는 신라에 커다란 공을 세운 인물임을 강조했다 하겠다.
지소태후의 남편이자 세종공의 아버지
공을 세운 이로서 그 공적이 부각된 데 그친 위의 두 자료를 떠나 [화랑세기]에 오면 이사부는 아연 살아있는 인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삼국사기]에서 이사부의 다른 이름을 태종(苔宗)이라 하였다. 이 이름으로 [화랑세기]를 뒤져보자.
태종의 아버지는 아진공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이다. 그런데 태종을 둘러싸고 이들보다 중요한 인물이 부인인 지소태후이다. 지소는 본디 이름이 식도부인이고 법흥왕의 딸이었다. 처음 입종에게 시집을 가서 나중의 진흥왕을 낳았다. 법흥왕의 유명(遺命)으로 영실(英失)을 계부로 맞이하여 황화공주를 낳았다. 아마도 입종이 먼저 세상을 뜬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영실과 헤어지고 이사부와 결혼한다. 이사부와의 사이에서는 세종을 낳았다. 6세 풍월주인 세종은 미실의 남편이 되었다. 세종과 미실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지소와 이사부 사이에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로 둘 사이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에 태종을 불렀다. 미실로서 의논하여,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폐하의 집안일을 어찌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 처녀는 곧 영실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영실은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전군(殿君 : 세종을 말함)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 사도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잘못할 뻔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미실로 하여금 궁에 들어오게 하였다.” ([화랑세기]에서)
이때는 진흥왕이 왕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진흥을 낳은 지소부인은 태후가 되었는데, 영실의 후손인 미실을 며느리로 들인 것인지 태종 곧 이사부와 의논하는 대목이다. 지아비로서 태종을 존경하는 말투이고, 영실을 생각하면 미실을 곱게 볼 수 없는데, 태종은 전후 사정을 들어 냉정하고 침착하게 판단하라 권하고 있다. 그러자 태후는 그의 조언을 고맙게 받아들인다. 매우 정중한 태도이다.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지소부인의 태종에 대한 태도를 보라. 아버지의 명령으로 재혼한 영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를 이어 남편이 되었을 이사부에게는 깍듯하기까지 하다. 이사부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대영웅에서 신으로까지
이사부를 둘러싼 왕실의 복잡한 혈연관계는 이로써 끝이 아니다. 이사부와 지소태후 사이에 낳은 딸이 숙명공주이다. 숙명은 태후 못지않은 문제적 인물이다.
“(4세 풍월주) 이화랑은 위공의 아들이다. (중략) 그때 황화, 숙명, 송화 공주가 모두 공을 따라 배웠다. 공은 이에 숙명궁주와 정을 통할 수 있었다. 그 때 태후는 왕의 총애를 홀로 받게 하고자 모든 일을 공주에게 받들게 했는데, 왕은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고 하여 매우 사랑하지는 않았다. 공주 또한 그러하였다. 공주의 아버지는 곧 태종공인데, 그때 상상(上相)으로서 나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신하였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공주는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탕하였다. 태자를 낳고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꺼림이 없었다. 왕은 평소에 사도(思道)황후를 사랑하여 그 아들 동륜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화랑세기]에서)
여기서 왕은 진흥왕이다. 그래서 숙명을 일러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태후가 숙명을 총애하는 것은 숙명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남편인 이사부에 대한 애정의 깊이와 연관되는 듯싶다. 이로써 태후 덕분에 숙명의 콧대는 한참 올라가 있다. 드디어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은 것 같은데, 이는 [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는 자료이다. 숙명의 권세는 동복이부(同腹異父) 간인 진흥왕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결국 태자가 된 사도황후의 아들 동륜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자리에 오르기가 더뎠던 것은 바로 숙명 때문이었다. 상상(上相)은 상대등으로 보이는데, 이사부의 위치가 만만치 않고, 지소태후의 입김까지 워낙 거세게 작용하고 있었다.
나중에 숙명은 이화랑과 결혼하여 원광(圓光)과 보리를 낳았다. 원광은 신라 불교를 반석에 올린 사람이요, 보리는 12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렇다면 원광에게 이사부는 외할아버지이다. 그런 숙명이 자기 아버지 이사부를 얼마나 끔찍이 존경했는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숙명공주가) 한번은 (보리공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 태종 각간은 곧 너의 할아버지이다. 하늘도 높다 않고 땅도 넓다 않는 대영웅이다. 너는 마땅히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화랑세기]에서)
이사부는 영웅을 넘어 신으로까지 올라갔다. 물론 숙명이 딸인 마당에 딸은 아버지를 그 이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부인과 딸에게서 이런 대우를 받는 이사부는 정말 멋진 사내였던가 보다. 대체로 밖에서 멋져 보이는 남자란 실상 안에서는 구실 못하는 형편없는 경우가 많다.
이사부가 권력의 중심이었던 한 때
이사부와 그의 부인 지소 그리고 딸 숙명을 놓고 그려보는 삼각편대는 막강한 권력의 구조로 보인다. 부인의 사랑은 애틋하고 딸의 존경은 지극하다. 부인은 전남편의 아들인 진흥왕을 꽉 잡고 있고, 숙명은 이부(異父)간인 왕에게서 아들을 낳은 다음 당대 풍월주와 결혼하였다. 어머니와 딸의 행보가 어쩐지 닮아 있다. 그 중심점의 이사부는 상대등 또는 각간이다. 게다가 아들인 세종은 진흥왕에게서 아우라는 말을 들었고, 끝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적어도 진흥왕이 실권을 행사하기 이전까지 신라 왕실은 이렇게 이사부 중심으로 움직인 듯하다. [삼국사기]에서, “이사부를 배하여 병부령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대 일을 맡도록 하였다”(신라본기, 진흥왕 2년)는 대목은 그 하나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앞에 제기한 의문점 하나가 풀릴 것 같다. 지증왕 대까지만 해도 이사부는 외직으로만 돌고 있었다. 그나마 공적이 있어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지만, 법흥왕이 다스리는 26년간은 공적도 지위도 시원치 않았다. 그러다 법흥왕의 딸 지소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이사부는 핵심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다. 우연의 일치는 아니리라. 병부령이 된 일 뒤에는 모종의 역학관계가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이런 이사부의 권한은 적어도 진흥왕 6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해 7월, 이사부는 제2위인 이찬의 지위에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는 임금과 신하의 잘잘못을 기록하여 만대에 포폄을 보이는 것입니다. (국사를) 정리하여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으로 살피겠습니까” 하자, 왕은 거칠부등에게 명하여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국사]가 바로 그 책이다. 그리고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에게서 성을 빼앗기까지 한다.
비록 [화랑세기]를 중심으로 한 자료의 정리여서 그 한계는 있지만, 이사부는 신라 땅에서 권력이 무엇이며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았던 처음 사람이었다.]
16:45~16:50 [영웅의 한 세기]라는 제목의 황금사자 조형물과 ‘나무 사자 전국 공예대전’ 수상작들과 삼척 문어와 용왕이야기 계단(천국의 계단)을 사진촬영
16:50~17:00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추암동 산 69 번지에 있는 추암 촛대바위로 이동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추암동 추암해수욕장 근처 해안에 있다. 바다에서 솟아 오른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그 모양이 촛대와 같아 촛대바위라 불린다. 전설에 따르면, 추암에 살던 한 남자가 소실을 얻은 뒤 본처와 소실 간의 투기가 심해지자 이에 하늘이 벼락을 내려 남자만 남겨놓았으며, 이때 혼자 남은 남자의 형상이 촛대바위라고 한다.
촛대바위 주변에 솟아오른 약 10여 척의 기암괴석은 동해바다와 어울려져 절경을 연출하며, 그 모양에 따라 거북바위, 두꺼비바위, 부부바위, 코끼리바위, 형제바위 등으로 불린다. 이곳의 바위군(群)은 동해시 남서부에 분포된 조선누층군의 석회암이 노출된 것이다. 석회암은 화학적 풍화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 일대의 석회암이 토양 밑에 있을 때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독특한 모양을 이루었고, 이것이 바닷물에 의해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시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던 한명회(韓明澮)는 이곳의 바위군(群)이 만들어 내는 절경을 가리켜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凌波臺)'라고도 하였다.
예로부터 영동지방의 절경으로 손꼽혔으며 특히 해돋이 무렵, 태양이 촛대바위에 걸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어 해돋이 명소로 각광받는다. 주변에 추암해수욕장, 해암정 등이 있다.]
17:00~17:05 '능파대(凌波臺)'라고도 불리는 추암 촛대바위를 사진촬영
17:05~17:10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추암동 468-1 번지에 있는 추암조각공원 화장실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7:10~20:30 "좋은사람들" 버스로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추암동 468-1 번지에 있는 추암조각공원 화장실을 출발하여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역으로 귀경 (249km) [3시간20분 소요]
해파랑길 32코스 지도
삼척시 고성산 산행지도
[죽서루&실직군왕비릉] 위치도
삼척 이사부길 지도
[이사부사자공원&해가사의 터]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