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틈서리
이 너른 세상에 열 평이 대수일까마는 내 느낌으로는 테니스장만 한 공간이다. 매일 새벽 이 공간에서 간밤의 무사를 감사하고
새로 주신 하루를 기쁨으로 맞는다. 촘촘한 주택가 끄트머리 여기는 지붕 없는 집, 이름하여 솔밭집, 땅만 있지 건물은 무형이다.
3년 전 새벽이다. 걷기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 가, 소나무가 들어선 주택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년 내외 중 남편인
듯한 남자는 사다리를 놓고 소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여자는 채소밭에서 상춧잎을 따고 있었다. 그 모습들이 정겨워서 발걸음을
멈추는데 소나무 꼭대기에서 “여보, 선생님 오셨어”하는 거다. 엎드려 일하던 여인이 고개를 들더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글
제자다. 그날 찬찬히 살펴본 채마밭은 내 눈에는 손바닥만 했다. 평수로 치면 백여 평 되는 빈터에 소나무를 20여 그루 심고 남은
땅에 밭을 일군 모양이다. 거기다가 상추, 토마토 가지를 몇 포기씩 꽂아놓고 가꾸는데 꼭 소꿉놀이 같다. 부러움 가득한 눈길을
의식했던지 제자가 이 밭을 가꾸어보라 제안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그 봄부터 조석으로 문안드리며 농사를
짓고 있다.
사실은 농부의 아내로 늘 흙을 가슴에 담고 산다. 차로 20여 분 거리에 사과 농사를 짓던 농장이며 농막이 그대로 있건만 기동력
이 없는 노인의 처지라 바라보고만 사니 씨 뿌리는 계절이 오면 온몸이 근질거린다. 내 안의 농부가 여태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러자니 봄이 오면 남모르는 증세를 지병인 양 안고 산다.
올봄에는 욕심이 생겨 땅콩, 파를 반 판씩 심고 고추, 상추, 토마토, 가지, 케일을 서너 폭씩 심었다. 어디 이뿐인가. 부추 두 골,
당귀, 참나물, 취나물까지, 담장 아래로는 삼잎 국화도 심었다. 왜 이렇게 구구절절 뇌느냐면 이것은 순전히 내 추억의 실마리다.
30년 동안 산 뽕나무골 농장에서 가꾸던 애들을 구멍구멍 옮겨다 재생의 뜰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내 기억의 상징물들로
자란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방이다. 실은 솔밭이라 이름은 지었지만 내게는 뽕나무골이다. 그러니 남다른 애착이 갈 수
밖에 없다. 내용을 모르는 이웃들은 허리 굽은 노인네가 마트에 가서 채소를 사다 먹지 무슨 청승으로 농사를 짓냐고 하지만 이
초록의 방은 삶의 여백이다.
새벽마다 여기서 섭리를 만난다. 내가 믿는 신을 만난다. 모종을 처음 심고 근 열흘은 간당간당하는 목숨의 사투를 안타깝게
지켜봐야 한다. 달리 손쓸 방법이 없다. 오직 제 몫이다. 숨넘어갈 듯하다가 가까스로 일어서는 투쟁의 현장에서 삶의 의지를
발견하는 기쁨. 그것은 문자로 표현된 것이 아닌 날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여기 오면 시간 의식이 없다. 나날이 노쇠해가는 내일의 불안도 없다. 다만 푸르른 생명 가득한 현재만 있다. 이상도 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머리에 끓는 잡념이 물감 묻은 그림 붓 물에 헹군 듯 맑아진다. AI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이즘에 경제가
사람의 목숨까지 관여하는 판국에 열 평 땅에 앉아서 세상의 현자라도 된 듯 흰소리하는 노인네를 사람들은 이해 불가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게 기계로 뽑아놓은 사탕 과자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한창 가뭄이 들어 채소들 이파리가 늘어질 때다. 새벽 운동을 하고 밭에 오니 어스름 속에서 누가 호스로 물을 주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제자 남편이었다. 자기네 오백 평 농장도 학교 출퇴근하며 가꾸기 어려울 텐데 여기까지 마음을 써주니 살가운
정을 느낀다. 어떤 날은 소독 통을 메고 오토바이를 탄 분이 들밭으로 나가다가 우리 밭 고추 여섯 포기에 진딧물이 꼈다고
약을 뿌려주고 간다. 열 평의 공간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일용할 채소를 준대서 만 아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 앞가림만으로도 벅차서 옆을 살필 겨를이 없다. 그런 세상을 살면서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생기를 주고 세상의 희망을 보여준다. 사실은 나도 열 평 밭에서 생산하는 자잘한 채소를 앞집 옆집 문고리에
초록을 매다는 기쁨이 솔찮다.
어제는 이웃 면으로 맛집을 찾아갔다. 동행한 이들은 딸 같은 정으로 지내는 사람들이다. 음식을 주문해놓고 계산하러 갔던 이가
얼굴이 벌게져 돌아와서 “아 글쎄 저쪽 테이블에 있는 분이 선생님께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먼저 계산했다네요.” 자기가
일부러 낸 시간인데 억울하다고…. 찾아가 보니 얼굴만 아는 분이다. 노인이라서 받는 대접이겠지만 그분이 간직한 마음의 틈서리
가 시킨 것이라는 생강이 든다. 사람들 마음 깊숙이 숨어 있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지고한 영역, 나는 그것을 중심이 아니라
틈이라 생각한다. 조금 모자라도 느려도 가난해도 좋다. 세상은 그런 틈이 있어 아름답지 않은가.
첫댓글
그러니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움의 연결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지만
이렇게 훈훈한 정을 나눠 주시는 이웃님들
감동입니다
청송 님
다음에 한번 대접하시면 되지요 ㅎ
양떼 님! 그래서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더 정겹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